반칙과 세대갈등과 교포

 

김원호  

 

1. 한 모형적 사건

독일 어느 도시의 토요일 오후다. 40대에서 60대에 속한 한국 장년 팀과 20대에 속한 한국 1.5세와 2세대 청년 팀이 오늘도 그들의 정기적인 친선 축구 시합을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축구 장에서 벌이고 있다. 건강유지, 운동의 즐거움을 찾을 뿐만 아니라, 이국 땅에서 갖는 고립 감, 소외 감, 모국 향수 감들을, 같은 핏줄들 끼리, 더구나 현저한 세대차를 넘어서, 서로 해소 해보는 교포사회의 한 흐뭇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30도의 무더위도 잊은 채, 시합이 한창 열기에 오른 후반전 어느 순간, 40대 말의 한 장년선수와 20대 초반의 한 선수가 공을 뺏기 위한 필사적인 추격전을 전개하다가, 서로 몸 충돌을 하면서 반칙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정확히 누가 반칙을 범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고발생시의 그들의 몸 자세와 양 측의 반응태도를 미루어보아 아마도 장년선수가 범한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반칙여부와 반칙자 추궁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험상궂은 얼굴과 위협적인 눈초리, 몸짓, 그리고 고성의 욕지거리를 서로 교환했고, 공을 뺏기 위해 옥신각신하며 폭력충돌의 위험한 순간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장년선수가 모욕적인 언사 섞인 발언을 하며 공을 내주지않고 계속 완강한 반칙부인의 자세를 고수하자, 별도리 없는 청년은 극도의 흥분 끝에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욕 한마디를 독일어로 쏘아주고는 대결에서 물러났다. 나이 어린 아들과 같은 청년에게서 예상 못한 기습적인 언어폭력을 당한 장년선수는 극도의 분노를 참지 못하자, 뒤 돌아서 걸어가는 청년에게 달려가 그의 목덜미에, 비록 손 바닥으로 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신체의 폭력행사를 가했다. 신체 폭력을 받은 청년은 즉각적인 반사행위로 상대방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들이 이렇게 해서 서로 붙어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몸 싸움을 하게 되자, 곁에 섰던 두서너 명의 청년들이 재빨리 뛰어들어 장년선수에게 합세공격을 가했다. 이를 지켜본 장년 선수들 몇 명도 싸움판에 끼어 들어서, 드디어 서로 패싸움을 하게 되었다. 사태가 위험하게 확산되는 것을 느끼자, 주위에 섰던 모든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가서 그들을 간신히 제재 시키고 양쪽을 서로 떼어 놓았다.

양쪽 팀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않은 가볍고 미미한 몸 충돌과 패싸움이었지만, 이 사건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관중과 그 소문을 들은 교포들, 특히 장년들 층에게, 충격, 분노, 모욕감, 반목, 질시, 절망과 같은 여러 큰 감정들의 물결을 드높게 안겨주게 되었다. 격분한 장년 팀과 주최자들은 운동정신과 동양윤리를 “범한” 청년들에게 두 달간의 징계처분을 내렸고, 그들의 정규 축구모임을 당분간 중단 시켰다. 상호우호와 화목으로 시작한 두 세대간의 친선 축구시합은 이렇게 해서 불미스럽고 유감스러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필자는 현장에도 없었고, 축구심판도 아니므로, 이 충돌사건을 이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분석하고 반칙자 색출과 그 책임추궁을 할 아무런 능력도, 권한도, 의도도 전혀 없다. 다만 여러 선수 들과 관객들의 진술을 종합 재현 시킨 위와 같은 장면을 근거로 하고(만약 이 재현이 사실과 상이하다면 용서를 구한다), 중립적인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러나 교포사회의 화합과 평화를 걱정하는 한국인으로서, 이 사건을 좁은 축구시합의 차원이 아니고, 좀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한번 분석 해보고자 한다. 왜냐 하면 이 사소한 사건은, 만만치 않게도, 세대갈등, 문화와 가치관과 민족성의 차이, 그리고 교육과 같은 큰 문제들을 내포하는 사회적 갈등의 한 작고, 상징적이면서도, 전형적인 모형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단순한 당사자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교포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반칙사고 발생의 원인과 그 이후의 반응들을 사회학적, 심리학적, 민족생태학적인 가설을 세우면서 해석하고, 평가하며, 사건에 의미를 부여 해보고자 한다.

2. 심판 없는 주관적 판단

이 반칙사건 발생의 직접적인 첫째 원인은, 직업적인 전문 심판이 없었고, 경기규칙의 전문적 이해나 그 준수성도 완전치 못한 아마추어들이 규칙을 무시하거나 혹은 반칙을 하고도, 시인하지않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불리한 판단과 해석을 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경기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반칙의 원인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생성된다. 첫째는 인간의 한계 밖의 요소인 우연이 반칙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이 때 양측 모두가 우연의 작용임을 인식하고 서로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양측 모두가 우연을 인식 못하고, 상대방에게 유죄선언을 하며 서로 싸운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우연이 벌이는 장난에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꼭두각시 노릇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죄이지만 불행히도 반칙선언을 받은 자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비록 반칙이 우연의 장난임을 모르고도 상대방에게 유죄 선언하는 자는 상대방을 비인간적이고 반 인간적으로 다룬 무죄 선언 받은 죄인이 되는 극적인 역설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 모두가 악의에 찬 우연의 불행한 희생물 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서도, 우연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계산하고, 유죄 무죄 판단에 성급한 속단을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은 다행히도 서로가 쉽게 인지할 수가 있고, 또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영역 밖의 일로 일단 문제시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란,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간 자신의 실수와 잘못된 주관적인 시각에서 대개 유래하는 법이다. 따라서 운동 경기 도중 생기는 충돌이나 일반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갈등은, 자신이 의식하던 않던, 인간자신의 실수, 오판, 그리고 고의적인 반칙에서 오는 두 번째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축구시합은 애초에 상호 친선우호의 시합이었지만, 동시에 승패를 가리자는 경쟁 시합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친선보다는 승패를 가리려는 운동시합의 단순한 논리에 매혹 되었기 때문에, 심판 없는 기회를 틈타, 규칙을 어기고도 반칙을 부인하며, 상대방에게 유죄선언까지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자기의 주관적인 해석이 서로 약속한 법과 규칙에 위반되고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칙여부를 둘러싸고 자신의 옳음만을 완고하게 주장했다면, 반칙자는 말할 것 도 없고, 무죄하다고 하는 상대방도, 그 진리여부가 의심스러운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에만 의거해서 조심성과 유보성을 두지않았기에, 둘 다 모두 유죄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 사건에 대해서 공동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반칙사건의 참된 진리여부와 그 책임소재를 아무도 모르는 위와 같은 경우에는, 실수 많고 이기적이 되기 쉬운 주관적인 판단에 신중성, 조심성, 양보심을 동반 시켜야 했을 것이다.

3. 언어의 장벽

자타가 공인하는 정확한 원인과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반칙사건이 폭력사태로 확산된 또 하나의 직접적인 이유는 두 세대간에 존재하는 언어의 장벽이다. 그들이 공동언어를 소유했더라면, 반칙사고의 정확한 상황의 파악, 자기주장의 합법성, 상대방의 불법성을 신속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서로 사이의 오해를 제거하면서 자체해결을 할 수가 있었을 것 이다. 특히 그들의 반응면에 있어서는 반칙사건 자체보다는 언어의 차이가 가져온 오해가 오히려 그들의 폭력적인 행위에 더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장년선수가 그 청년선수에게 던진, 악의 없고, 오히려 친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습관화된 욕은 거의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청년의 귀에는 인격을 모독하는 의도적이고 악의에 찬 욕설로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젊은이가 악의 없이 쓰는 일상적인 독일어 욕도 장년선수에게는 인격모독이요, 어른에 대한 참람한 폭력행사가 될 수 있다. 양쪽 언어, 특히 한국어에서, 복잡하고 미묘하게 사용되는 존칭어의 잘못된 적용도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기 십상이다. 충돌 당시에 그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서로 언쟁과 모욕적인 언사를 거침 없이 교환 했을 것이므로, 그들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높은 언어의 장벽은 그들 사이에 사고와 가치관과 문화의 장벽뿐만 아니라, 세대간의 장벽도 드높게 쌓아 놓는다.

4. 자아비판과 양보의 결여

반칙사건이 폭력사건으로 확산되는 과정에는 위와 같은 직접적이고 외적인 원인 이외에도 그 못지않게 간접적으로 작용한 원인들, 즉 그들 각자의 도덕적인 약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년선수는 반칙현장에서 자기 두 눈으로 상대방의 반칙을 분명히 확인했기 때문에, 자기 판단의 옳음과 상대방의 반칙부인의 잘못을 확실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옳은 판단이 우연의 작용, 자신의 규칙이해의 오류, 상대방의 비 의도적이고 악의 없는 반칙등에서 기인된 경솔한 오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안 했을 수도 있다. 상대방이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무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어디에서나 상존하므로, 그는 지나친 자기 중심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상대방에게 무죄의 기회를 허락하는 관용을 베풀어야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년선수도, 만약 자신의 잘못된 법 이해에서이던, 그 준수성의 소홀에서이던, 혹은 나이와 신체적 열세에서이던, 자타가 공인하는 반칙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와 책임을 우연이나 현격한 나이차이와 체력이라는 불공평한 시합조건에 전가하면서 자기의 반칙을 인정하지 안 했다면, 그는, 자기 비판의 결여는 고사하고, 오히려 비겁한 위선자요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으리라. 그리고 심지어, 그는,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지나친 반감을 표시 하면서, 자기의 반칙에 대한 남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고, 자기 죄를 희석내지 번복 시키려 했다는 혐의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 질 수가 없을 것이다.

심판도 비디오 녹화도 없는 위와 같은 경우에는 양쪽 모두 각자가 가진 양심과 정직성이 유일한 판단의 기준일 텐데, 서로가 자기주장만 고집하고 싸웠다면,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이 싸움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은 장년보다 아량과 관용은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가 했던 모욕적인 언어의 폭력 때문에, 진정한 양보와 관용은 될 수 가 없는 것이다.

5. 상호이해와 인격존중의 부족

축구 반칙사건으로 생긴 반응들과 폭력대결의 배후에는 또한 두 선수들의 상대방에 대한 편견, 깊은 이해와 존경심의 부재도 깊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청년선수는 상대방이 독일의 법과 사고방식, 사회질서, 문화 등 다 방면에 걸쳐서 자기보다 정보가 어두운 “외국인”이요, 또한 자기의 유죄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나이와 권위로 자기의 유죄를 위장하고 부인하는 비양심적인 무법자로 보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인간에 대한 자기의 도덕적인 우월감과 고자세에서 상대방을 폄훼하고 유죄선언 했을 것이다. 그가 장년선수와 그의 구 세대가 가진 고질적인 반칙 불감증, 반칙부인 벽, 자기 위신과 체면의 과대 보호 증 등에 대해서 내린 정확한 판단을 우리는 부인 하기 어렵다. 그가 그들에게 가진 축적된 불만과 반감이 그로 하여금, 시합은 시합이고, 법은 법이라고 하는, 차디찬 논리를 전개하고 결연한 반항을 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서, 그에게 상대방과 그 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이해, 그리고 나아가서 그들의 부정적 행위에 대한 생태적이고, 사회적, 역사적인 원인과 배경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의 성급하고 경솔한 속단이나, 모욕적인 욕과 폭력과 같은 도발적인 행위는 어쩌면 자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구세대들은 우선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이와 권위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민주화 되었다는 현금의 한국에서도, 나이와 권위는 보이게 안보이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회 구석 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장년선수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나이와 권위라는 기득권이, 그 객관적인 정당성과 합법성 여부를 떠나서, 일단 도전을 받게 되면, 마치 생존권의 도전이라도 받는 듯, 알레르기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오랫동안 착취와 가렴주구를 일삼던 주위의 강 대국들과, 국내의 군주, 지방의 탐관 오리들이 만든 법에 의해서 압박 받고 지배되어온 불행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법에 대한 회의와 불신감, 그리고 둔감하고 불 분명한 법 관념의 잔재들을 아직도 민족의 공동기억으로 희미하게나마 오늘까지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이러한 구세대들의 역사적인 생리와 생태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잘못된 권위와 불의, 부정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항한 것은 옳았지만, 그가, 이러한 깊은 이해 없이, 상대방을 무법자라고 성급히 낙인 찍었다면, 그것은 같은 동포에 대한 경솔하고 비연대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장년선수도, 이 곳 청년들이 한국 청년들 보다 법 준수성이 우월한 서양 문화권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을 것이다. 청년이 자기의 반칙에 대해서 본능적인 반응과 반항을 보여 주었을 때, 그는, 그를 단순히 버릇없고 예의 없는 건방진 반항아로 보는 편견적이고 속단적인 낙인을 찍기 이전에, 독일인들과 그 청년의 정당한 법 이해와 법 준수성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청년의 무례한 태도는 실은 그와 그의 세대가 이들에게 동양의 예의와 도덕에 대해서 교육을 시키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과 과오의 결과라는 사실도 함께 인정하며 오히려 자성을 해야 옳았을 것이다.

장년선수는 또한 동양의 도덕적 우월감과 권위의식의 시각에 의거해서, 이 청년을 무례하고 예의 범절을 모르며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독일 “야만인”으로 보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청년을 이렇게 비하시 하지 않고 자기 눈 높이에 서있는, 자기와 동등한 인격체요, 동등한 선수로 보는 인격존중의 자세가 있었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를 자제 했을 것이다. 그 청년 선수가 자기와 동년배의 선수였다면, 과연 그가 폭력을 사용 했을 가? 그에게도 청년처럼 역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무엇 보다도 인격존중의 자세가 결여 된 것이다.

6. 가치관, 문화, 민족성의 차이

위에서 축구 반칙 충돌사건의 이유들을 여러 가지 외적조건, 그리고 내적인 도덕성의 부족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이들을 이번에는 그들이 각자 대표하는 동서양의 가치관, 문화, 민족성의 차이점들에서 한번 찾아보겠다. 우리는 이 차이점들을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법 이해의 차이점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가) 법의 이해

서양 법의 기원은 선과 악의 이원론에 있다. 법은, 악이 인간을 항상 지배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법을 통해서 인간을 거짓, 사기, 부정, 폭력, 살인과 같은 악에서 보호하고, 각자 개인이 요구하는 권리를 보장해주며, 의무와 벌도 부과시키면서, 공동사회의 질서와 안정과 평화를 유지시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사를 가진 독립된 인간 개체는 자기의 소유욕과 지배 욕을 지나치게 추구하며, 자기가 만든 법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남용도 하기 때문에, 인간의 법은 종국에는 인간의 평화 보장에 항상 불충분한 도구요, 역설적인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법이 인간의 악과 싸우면 싸울수록, 인간의 악은 더욱 악해지고, 인간의 지능도 더욱 교묘해지기 때문에, 법도 따라서 더욱 강하고 엄하게 되며, 법조문도 증가 하게 되어, 오히려 악의 유발에 동기가 된다. 그 결과 법은 자율성을 얻어 인간을 노예화 시키며, 법이 인간을 위하지 않고 법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 좋은 예는 독일이다. 독일인은 완전한 법제정과 철저한 법 준수를 지나치게 “동물적인” 진지성과 기계적인 논리로 추구하가 때문에, 그들은 쉽게 법의 노예가 된다. 독일인은 남과 법적 갈등을 가질 때, 아집(Sturheit), 독선(Selbstgerechtigkeit), 완고성( Rechthaberei)에 빠져서 자기 주장만 관철하고 남에게 양보 하기를 심히 꺼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기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자기가 법이 아니라, 법이 자기를 지배할 만큼, 법에 종속이 된다. 그들은 엄한 법을 통해서 질서유지는 잘 하지만, 그들 자신은 불행하게도 법에 종속된 부자유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독일의 법은 완전 무결성을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우수한 법이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항상 앞장서서 가는 인간의 악하고 영리한 지능을 영원히 추월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이런 독일의 우수한 법 정신 속에서 자란 그 청년은 그가 배운 대로 법과 규칙을 정직하게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합은 비록 친선 우호 경기 였지만, 그에게는 승패를 가리는 시합이었다. 이 시합은 그에게는 자기와 동등한 자격으로 임한 적수를, 정해진 법과 규칙의 한도 내에서, 모든 놀라운 기술과 역량을 발휘하면서, 싸워서 이기는 매력을 가진 경쟁 시합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대방의 높은 나이와 약한 체력은 물을 필요가 없는, 이미 계약된 전제 조건이었다. 따라서 그는 적수가 반칙을 했을 때에도, 법에 의거해서 자기의 권리를 정정 당당히 요구했고, 또 그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경우에서라도, 가능한 자기에게 유리한 점을 최대한 수확 하려고 했으며, 반칙사태 이후의 그의 반응태도에서도, 그는 상대방의 불법행위에 아집적인 반항도 한 것이다. 즉 그에게는 일방적이고 근시안적인 서양식 법 논리만 있었지, 동양의 법 이해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동양의 법은, 도가, 유가의 철학에서 보듯, 일원론으로 해석이 되어진다. 우주만물의 시원은 하나, 무, 혹은 도이며, 그것이 둘, 셋 등의 유와 자연으로 현현이 된다. 이 현상계 속에서 선과 악 같은 대립이 생기게 되고, 문란과 타락도 일어난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선과 악은, 서양에서처럼 서로 멀어지면서 영원한 모순(kontradiktorisch)으로 남지않고, 하나의 상반되는(kontraer) 개념으로 남다가 언젠가는 서로 근접되고 지양되어 다시 원래의 하나, 즉 도, 무로 복귀한다. 그 복귀 방법은, 무위자연을 따르고, 허정과 유약적인 자세, 예와 효, 삼강오륜 같은 도덕 율을 통해서 극기복례하고 수신하는 일이다. 따라서 자기와 현세의 지나친 주장으로 인해서 대립과 분열이 생겨서 법을 꼭 필요로 하는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인위적이며 엄하고 무서운 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각자 모두가 스스로, 상벌을 주는 법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를 누르고 키우고, 남과 공동체와 평화를 위하면서, 곧 닥쳐올 하나를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도덕경 17장 淳風), 법을 짓밟기 때문에 백성들이 미워하고 욕하는 폭정 보다는, 권위와 형벌, 권모술수로 백성을 부리기 때문에 백성이 겁을 먹지만, 그래도 어쩔 수없이 법을 좇는 법치가 낫고, 그보다는 인, 예,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하는 덕 치가 나으며, 그러나 그 보다도 가장 나은 것은 그들을 다스리는 군주와 법이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게 무위자연으로 근본을 삼고 다스리는 무치라고 했다. 인위적인 법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 말에 흔히 의로운 사람을 가리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법 존재의 필요성을 넘어서서 도를 더 높이 평가하는 동양의 법 이해의 한 좋은 예이다.

장년선수가 이런 고차원적이고 긍정적인 노장사상을 가지고 축구시합에 임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일반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동양인의 태도에는 이러한 동양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법 이해가 공동체적인 기억(kollektive Erinnerung)으로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을 것이라 상상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부정적인 법 이해의 좀더 직접적이고 신빙성 있는 이유는, 특히 한국인의 경우,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외세의 식민지지배와 국내의 군주와 탐관오리의 착취정책으로 일관된 불행과 가난의 역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반항심과 불신감에서 찾아야 할 것 이다.

어찌 되었던, 그 장년과 청년의 법에 대한 자세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기에 그 장년선수는, 청년과는 달리, 축구시합에서 승패보다는 친선과 유희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반칙에는 별로 무게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반칙에 대한 자성적 검토와 반성이나, 반칙인정 보다는, 오히려 청년에게서 받은 모욕감, 멸시 감, 분노 감의 해소, 그리고 자기 체면회복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법이 금하는 폭력행사마저도 불사했고 또 자기의 위장 목적의 수단으로 오히려 폭력을 필요로 했을 수도 있다.

청년선수는 상대방의 반칙부인으로 인해서, 장년 선수보다 더 심한 격분과 모멸감을 가졌었지만, 그는 우선 상대방을 신체의 폭력보다는 좀더 이성적이고 냉정한 언어폭력으로 대했다. 두 가지 모두 폭력행위이긴 하다. 그러나 독일 법은 그들을 차이 나게 벌을 매기고있다.

남과 맺은 계약과 법을 중요시 하지않은 이유로 남과 의견 충돌을 해야 할 경우, 쉽게 이성을 잃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신체적 폭력도 불사하는 한국민족과, 법과 계약을 정확하게 지키며, 감정과 폭력을 자제하고 타협을 선호하는 독일 민족의 생태는 이렇게 사뭇 다르다. 한국인의 불철저한 법 개념과 범법에 대한 무감각성, 소홀성은 오늘 날에도 수많은 사회의 부정과 비리와 무질서를 초래해서 한국의 민주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반면, 독일인의 엄한 법과 철저한 준수성, 질서유지, 그리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의견충돌의 해결방법은 특히 이차 대전 이후의 독일에게 한국보다 더 안정된 민주주의와 평화를 제공하고있다. 노사문제로 노동자들과 경영주들 간에 벌어지는 한국의 데모와 파업투쟁은 국기소각, 단지, 자살과 같은 일시적 감정폭발로 끝나기 일수이지만, 독일은 중재자를 중심으로 끝없는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을 거치면서 서로가 만족하는 동의를 모색해서 타협한 후, 평화롭게 끝을 맺는다. 완전무결과 철저성을 좋아하는 독일 민족은 법 제정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재정을 투자 하기 때문에, 원칙을 무시한 체 임기응변, 미봉책, 단기적으로 적당히 법 제정을 하는 한국에게는 모범이 되고 있고, 또 되어야 할 것임을 우리는 인정은 한다. 따라서 청년이 독일의 정확한 법 정신에 따라 상대방을 유죄 선언을 하고, 그의 무죄주장에 집요한 반항을 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그가, 반칙자를 가려내고 벌을 주며, 자기 권리만 찾으려는, 서양의 법에만 매몰되는 대신, 그보다 차원 높은 동양의 관용과 양보를 통한 상호간의 화해와 평화사상을 알았더라면, 폭력충돌을 피할 수가 있었으리라 생각 한다. 공동생활에서는 적대적이고 차디 찬 법만이 아니고, 사랑, 존경, 양보와 같은 우호적이고 따뜻한 원리도 존재한다.

나)개체와 공동체

두 선수들의 충돌사건, 특히 그들의 반응태도 이면에는, 법 이해의 차이 이외에도 또 다른 동서 문화의 근본적인 차이 점, 즉 사회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이 숨어있다. 서양 사회는 계몽된 자아, 독립된 “나”라는 개념 위에 세워진 사회인 반면, 동양사회는 서로가 밀접하게 상호의존 되어있는 “우리”라는 공동체 구조 위에 구성된 사회이다. 이성, 양심, 자유, 권리, 의무, 같은 인본주의의 기본 개념으로 계몽된 서양은 개체를 과거의 중세 종교 권위주의에서 해방 시키고 신 대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 개체는 자기의 자유의사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남과 계약을 맺으며, 자기가 맺은 계약에 의거해서 자기의 권리를 요구하고, 책임과 의무도 스스로 부담하는 자유롭고 독립된 개체이다. 따라서 그들의 대인관계도 분명하다. 그러나, 대인간에 갈등이 생길 때, 자기 주장만 하게 되어, 서양 고대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남은 자기에게 항상 늑대가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인은, 나이, 성, 교육, 직책, 권위에 따라 정치 지도자, 상관, 성직자, 교사, 부모, 남편 같은 지배계급과 농민, 노동자, 여자 등의 피지배자들로 구성된 계급(Hierarchie)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행동과 의사와 자기주장은 제약 되어있었고, 권위에 대한 순종, 복종, 순응은 절대적이며, 비판과 반항은 금기 시 되어왔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위에 세워진 독립된 개체개념이 희박한 장년 선수는, 그가 반칙을 했음을 전제로 할 때, 자기의 반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않고, 가능한 한 자기가 아닌 남이나, 운명 혹은 제삼의 딴 어떤 것에 책임전가를 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반칙여부의 철저한 해명 자체나, 자기 반칙이 남에게 미치는 악 영향에 대한 염려 보다는, 공동체의 명예수호, 공동체 속의 자기체면과 위신의 보호와 확보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반칙인정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것은 동양인의 개인과 공동체 일치 감의 자연적인 발로이다. 또한 한국인은 독립된 개체에 대한 개념 및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진리, 자신의 의견을 공동체에 매도 시켜서 독립된 개체로서의 존엄성과 책임성을 스스로 상실 시킬 뿐만 아니라, 남이라는 존재와 그의 의견도 무시 내지 비하 시켜서 인권침해까지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아가서, 대화나 토론, 또는 의견충돌 시에 공과 사, 주체와 객체, 사물과 사람을 명백히 구별하지 못해서, 공정성, 합법성, 합목적성을 잃고 혼란에 빠지기도 일수이다. 이 모두는 공동체 속에 묶인 개체의 계몽결여에서 오는 한국인의 전통적이고 숙명적인 오점이다.

그리고 분명한 자기의 의견, 창조적인 비판과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서양의 세대들에 비해서, 한국의 구 세대들은, 창조적인 자아의 결여로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이 될 수 있고, 기성이념의 권위에 적응과 답습을 하면서 편협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빠지기도 쉽고, 건전한 민족주의, 민주주의 건설과 역사의 발전에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대를 위해서 소를, 공동체를 위해서 개체를 무시해야 하는 동양의 획일적인 지배 가치관은 개인, 소수단체, 연소자, 여자, 병약자, 극빈자 등 수많은 희생자를 요구한다. 공동체의 권위, 그리고 자기 체면과 위신 때문에 진리를 왜곡 해야만 했던 장년선수도 그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특히 청년선수처럼, 물론 그가 반칙사건에서 무죄임을 전제로 할 때, 올바른 비판과 자기 주장을 하고 공동체와 권위에 반항을 하는 자는 공동체의 억압과 견제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장년선수가 젊은 선수에게 행한 폭력은 이러한 공동체가 반항하는 개체에게 가한 벌이라고 해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인 동양사회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계몽된 개체 중심의 서양 사회에서도, 자아비판이나 법적, 사회적, 공동체적인 감시가 결여될 때에는, 아집과 지배 욕에 사로 잡혀서 분열과 대립과 전쟁을 일으키며, 개체는 소외 고립되고 불안과 절망에서 헤매게 되는 부정적인 면을 갖게된다.

특히, 치열한 경쟁, 소유욕, 지배 욕이 난무하는 신 자본주의 속의 오늘의 서양 사회는, 그들 애초의 이상인 인문주의를 스스로 왜곡 남용 겁탈 하면서, 이기주의의 늪 속으로 계속 전락하고 있다. 과거에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던 독일인도 이제는 뇌물, 횡령,부정, 부패와 같은 사건으로 거의 매일 신문의 구설수에 오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이기에 복고적이 되기 쉬운 동양사회와는 달리, 구세대의 부정을 지적, 비판하고 반항하는 계몽된 개체중심의 서양 세대들은, 한 세대 전에 있었던 68세대들처럼, 역사의 새로운 발전에 제 나름대로의 창조적인 기여를 한 몫씩 한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들 68세대에 대한 역사적 결산은,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폭력행위, 방향감각 상실, 그리고 그들이 의도한 인간의식 구조 개혁의 실패를 들고있지만, 그러나 독일의 전후 나치세대 고발, 반 제국운동, 반 권위주의, 반전, 반핵, 환경보호, 여성 지위 향상들은 그들이 쟁취한 부분적인 역사적 전리품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한 세대 전, 구세대의 유신정치, 군사독재에 항거하고 일어났던 4.19 학생혁명과 학생운동 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이곳 해외에서 조국의 반독재와 민주건설, 평화통일을 위한 소수단체 들의 미약한 활동들도 그 나름대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한 조그마한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긍정적인 평가가 되어져야 하고 또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이제 한국도 계몽된 개체와 인권과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 속에는 불행하게도 오랜 과거에 유가, 도가, 불가들이 설파하고 가르친 동양의 지혜와 생활신조 들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보기 드물게 되었다. 대인 관계에서도 사랑, 존경, 양보는 배금주의에 의해서 배제되었고, 내용 있고 실속 있는 권위도 이제는 허위와 위선, 형식화된 빈 껍질로 전락 했으며, “법 없이 살던 사람”들도 무법자로 돌변해서 자기와 남을 기만하는 부정적인 서양식 개체주의자와 이기주의자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7. 세대의 갈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등장한 한 새로운 세대는 30년간의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구세대를 분석, 수용 내지 비판 개혁하면서, 자기의 독창적인 가치관과 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새 세대에게 전해준 후,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 때 그들은 자기의 문화를 자기세대와 자기 국가에만 국한하지 않고, 차세대와 국제사회와의 관계라는 미래 지향적이고 열린 자세로 창조해야 할 것이다.

새 세대는 또한,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정치, 경제, 문화 도덕 등 사회제반 영역에서 막강한 기득권과 권력을 소유하고있는 기존 지배세대와 충돌 대립해야 하는 운명도 지니고있다. 이때 그들은 구세대에 적응 동화하는 대신, 창조적 도전과 대립을 하면서, 구세대의 모순과 불의는 용감하게 비판 개혁하고, 그들의 장점은 수용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의무와 책임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현재 한국의 신세대가 ” 4 5정”과 같은 강압적인 은퇴조치를 통해서 구세대에게서 기득권과 생존권마저 탈취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해와 기득권만을 위한 쟁탈전을 구세대와 더불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 세대는 비판과 관용이라는 복합 원칙 아래에서 기득권 문제를 두고 공정하고 합법적인 대결을 하되, 서로가 공존 상생하면서, 새로운 사회 창조를 위한 대결을 해야 할 줄 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교포들은 신구세대가 갖는 권위와 자유, 보수와 개혁 같은 세대갈등의 일차적인 쟁점뿐만 아니라, 동서 양대문화와 민족과 가치관의 차이라는 이중적인 쟁점도 안고있다. 낯선 서양문화에 적응 못하고 한국 문화만 고수하는 1세대들이나, 한국 핏줄이면서도 한국문화와 역사의 이해 없이 서양 문화권 속으로 태어나고, 그 곳서 자란 2 세대들이나, 모두 각자 자신들의 정체성 파악문제를 가지고 혼란과 착오와 방향감각 상실 속에서 고민들을 하고있다. 그들 사이의 언어장벽은 대화와 의사전달과 토론을 방해하고 있고, 자기 문화의 우월만을 주장하고 상대방에게 강요까지 하면서, 서로간의 소원성, 적대감정, 세대충돌, 세대전쟁을 유발 시키고있다.

그러나 독일 속의 교포들은 반면에, 고국의 동포들과는 달리, 두 문화가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충돌 하는 것을 체험 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비교 관찰하며, 취사선택, 상호 절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적 조건을 소유하고있다.

이 곳 교포들의 장년 세대들은 서양문명과 문화 속에 동화되어 살고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동양문화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서양문화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게 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 하나의 좋은 예는 한국이다. 한국은 과거 자기 역사에서 한번도 남을 침략하지 않았던 평화의 민족이며, 곤경의 식민역사 속에도 그들은 민족 공동체 속에서 상호의존하면서 정신적인 부와 낙천적인 삶,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적어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권리와 소유권을 신성시하고 강한 법적주장만 하는 서양은 이기주의와 인간관계의 단절과 적대관계만 초래한다. 물질문명, 부와 육체의 행복에 기반을 둔 서양의 현세위주주의는 자연과 타민족을 침략 약탈하는 정복주의 문화를 낳아서 자연을 파괴하고 타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도래 시킬 뿐이다. 교세확장의 명목으로 현세주의, 정복주의와 결탁했던 기독교는 권위와 신뢰를 잃었고, 정신적인 갈등, 불만, 소외, 불안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현대의 서양 세속인 들에게 정신적인 만족과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서양인들에게 동양인들은 도가, 불가들의 평화사상, 자연존중사상, 정신적안정과 행복관, 심령주의, 낙관적인 내세주의 들을 대안으로 제시해줄 수 가있다. 대인관계에서도, 대립 투쟁 없이, 소박, 허정, 겸양 같은 “약한” 물과 같은 자세(도덕경 8장 “역성”)를 통해서 남을 위하고 자기는 물러나며, 서로 다투지않고 화합하는 유가의 공동체 문화를 몸소 보여줄 수 가 있다. 유교가 애초에 높이 내세웠던 권위의 개념은, 서양의 전문지식 소유자라는 단순한 뜻과는 달리, 그리고, 장년선수가 보여준 잘못된 권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인, 의, 예, 충, 신, 효, 제의 가르침 속에서 수신제가하고 자기를 극기하며 올바른 인식과, 경험, 덕, 아량, 현명 같은 인성까지 포함시킨 완숙 된 인간의 총체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지 않아도, 남이 벌써 인정해주고 존경 해주는 법이다. 구세대들은 바로 이런 올바른 권위를 이 곳에서 자라는 후세대들에게 스스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동양과 한국문화와 역사와 전통과 가치관을 배우지 못한 “무식하고 거만한” 젊은이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교화를 시켜줄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반면, 신 세대는 공동체의 지배의견 뒤에 숨어서 자기를 부정하고 공동체에 맹종하고 있는 구세대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의 개체적 존재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의식하게 해서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세우도록 자극과 용기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구세대의 불분명하고 잘 못된 법 개념과 법의 오용, 왜곡, 남용을 적나라하게 고발해서, 스스로 수치감과 창피 감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때 그들은, 젊은 선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적대감을 유발하는 속단적이고 감정적인 도전이나 폭력적 방법 대신,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양보, 관용 같은 연약한 방법이 강한 자기 주장이나 폭력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평화적인 도전임을 이해 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약한 물이 돌도 뚫는다고 했다. 강하면 꺾이고, 굳으면 부서진다는 동양의 현명한 지혜는 신세대뿐만 아니고 특히 구세대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8. 교포와 교육

독일 속의 한국교포사회는 겉으로는 터키나 딴 외국교포사회 보다는 비교적 말성이 없고 조용한 사회이다. 유교덕분으로 기율이 잡혔고, 또 평화적인 민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율이 자율적이 아니고 공동체가 강요하는 타율적인 기율은 아니며, 그들의 평화가 혹시나 동양적 체면과 위신의 상실을 두려워해서 얼굴을 가린 위선적인 가면은 아닐지?

아니면, 그들은 자녀교육을 중심으로 갈등과 암투가 상존하는 가정문제나, 사적 공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진 사회의 의견대립과 충돌들을 과연 말성 없이 잘 해결해 나가는 것 일가? 세대갈등과 같은 엄청난 문제들을 그들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 가?

어는 단체, 어느 사회에서던, 중요한 문제들을 두고 정당한 의견 대립과 충돌이 있는 것은 상례이며, 그것은 자기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대립과 충돌이 없거나, 혹은 그들을 회피하고 조용히 삼키는 모임과 단체는 위선의 혐의가 있다. 고인 물처럼 부패되어 정지내지 퇴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축구반칙사건은 한국 교포들의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운 오점이 아니고,오히려 교포사회가 긍정적으로 발전 한다는 하나의 징표가 될 것이다. 두 선수들과 사건 가담자들은 잠시동안 분노의 시간을 가졌으나, 시간이 흐르고 흥분들이 진정된 후 모두 후회와 자성, 그리고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가지고 많은 것을 배우면서 새 출발을 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줄 안다. 얼마 전, 두 달간의 징계기한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들은 서로 사과하고 화해한 후, 중단된 시합을 다시 재부활 시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감성력, 적응력, 기민성, 역동성, 인내성과 같은 좋은 국민성을 가진 우수한 한국 민족이 이성, 원칙성, 철저성을 좋아하는 이곳 독일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의 끝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창조적이고 독창적이며 긍정적인 자아의 육성과 개성의 개발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세계무대위로 뛰어난 인물,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배출 시키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들의 이 원동력은 이곳 교포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자녀교육, 즉 한국의 구세기 유물인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교육목표와 방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곳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개성과 능력과 기호의 정확한 판단에 의거해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지성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강요와 억압대신, 자녀 스스로가 하는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고, 그 선택에 대화를 통한 끊임없는 협조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나 이때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자녀의 이런 지성적 자아와 개성개발에, 상호협조하고 화합하며 양보하는 동양의 인성교육, 공동체정신, 그리고 민족정신까지도 동반 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반세기 전 건전한 민족주의를 능욕한 나치정권을 체험한 이후,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한 회의와 불신감이 내포된 오용되고 남용되었던 민족주의 대신 극도의 개인주의를 추구하고있는 독일인들이 아니고, 침략성, 배타성, 편협성 없는 건전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민족이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조국의 분열, 그리고 강대국의 종속에서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지상의 물질적, 육체적, 현실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늘의 젊은 이기주의적인 독일인들(Spassgesellschaft)과는 달리, 소박과 겸양 속에서 정신적인 행복을 찾았던 동양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민족의 후예이며, 한 핏줄로 연결된 운명 공동체에서 민족동질감과 생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민족이다

한국은 이미 과거의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체제를 청산했고, 이제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내린 지가 오래다. 현금에는 역동적이고 기상 높은 “한류”문화가 경제, 문화, 체육부문 등에서 아세아에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고, 우리의 상품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은 세계 유수 강대국 대열에 곧 끼게 될 야망의 나라라는 자긍심을 우리는 우리 후세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황홀한 경제부흥이 단순한 지상통계나 숫자에 있지않고, 국민들의 진정한 내적, 외적인 부와 그 현실생활 만족도에 있고, 안정된 경제, 고도의 민주주의, 고차원의 문화발전이 강대국의 기본 요소라는 것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주위의 강대국들이, 고구려 역사의 왜곡문제, 독도영토 문제, 그리고 군사, 경제, 외교권의 견제와 고자세적이고 자의적인 간섭 등으로 괴롭히고 있는, 아직도 완전 자립 되지 못한, 약한 종속국가라는 사실도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 이다.

우리는 강한 외세들의 각축장 속에서, 그리고 서로 경쟁하는 지구 공동체 속에서, 마치 북조선처럼, 세계열국 들과 밀접한 관계없이 고립되어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서, 마치 60년 동안의 남한처럼, 그들의 불의에 우리의 주장마저도 크게 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예속국으로만 영원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남북통일이 제시한다고 본다. 현금에는, 5년 전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해서 남, 북, 해외가 모두 과거의 역사적인 유물인 이념대립에서 탈피하고, 민족 동일성, 자주, 평화의 기치아래 서로 존중하며 화해의 대로로 달려가고있는 중이다. 독일의 흡수통일은 시간이 갈수록 내적 격리 감이 증가 되고있지만, 한국의 통일은 두 동등한 형제국들이 이념이나 경제력을 초월하고 자주 평화 신뢰 존경에 입각해서 서로 평등하게 접근하는 화합의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축구반칙으로 서로 싸웠던 두 세대들은 사소한 운동 반칙으로 생긴 대결이나, 과거의 이념 대립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분열, 대립, 반목, 질시와 같은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세에서 탈피하고, 이제는 눈을 조국으로 돌려서, 조국의 운명과 장래를 위해서 좌우나 남녀노소가 서로 평화롭고 창조적인 토론과 의견대립을 하면서, 함께 조국의 통일에 기여를 하는 훌륭한 해외 교포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 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곳 부모 세대들은 강대국 의존사상이나 반공법과 같은 전세대의 해묵고 먼지 끼인 정치 관에만 고수하는 대신, 시대와 역사의 요구에 적응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점검, 수정, 개혁, 변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이어린 세대들에게서도 겸손하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녀들에게 떳떳이 제시할 수 있고 요구할 수있는 그들의 실속 있는 참다운 권위인 것이다. 자녀 세대들도 이러한 부모 세대들의 생각과 그들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무식한” 그들에게서 겸손하게 인생과 한국과 한국의 역사를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는 일이 중요하다. 역사 없이는 참다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외 교포 속의 두 세대가 단순히 서로 언어의 장벽을 넘는 일에 앞서서 해야 할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그들의 근본 과제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지금 까지 부평초처럼 떠돌며 방황하던 그들의 안개 같은 정체성에게도 새롭고 선명한 지평선을 제시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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