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본성상 열려있다”

정수일 전 교수 ‘한국 속의 세계’ 두 번째 강좌 <강연전문>

 2007년 05월 11일 (금) 11:15:21

정명진/이계환 기자

 

‘실크로드 학자’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의 특별강좌 ‘한국 속의 세계’ 제2강이 지난달 27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렸다.

정수일 전 교수는 제2강 ‘세계를 향한 열림’을 강연하면서 모두(冒頭)에서 “우리는 이때까지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연장선 상에서 우리 자신이 자학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안주해오다 보니까,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며 우리 역사를 바로 볼 것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정 전 교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 대원군의 이른바 ‘쇄국’이 “10년밖에 안되는 극히 짧은 기간에 있었던 임기응변의 전략적 방편에 불과했던 일”이라고 시각 교정을 부탁하고는, 아울러 우리가 부정적인 병폐로만 치부하는 조선시대의 이른바 당쟁문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정 전 교수는 이날 강연 주제와 관련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폐쇄적이거나 닫혀있는 게 아니라 항상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다면서 그 사례로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 △‘중세 아랍-무슬림들과의 교류’, △‘개방적인 귀화책’, △‘조선은 열린 나라’ 등 네 가지를 들면서 영상 그림과 함께 조목조목 실증적으로 설명ㆍ해석했다.

특히 정 전 교수는 강연 말미에 최근 학계 및 ‘민족민주운동진영’에서도 관심사인 민족과 민족주의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는 몇 가지 문제를 화두로만 제시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민족문제와 관련, 첫째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민족의 개념문제’, 둘론 민족이 언제 출현했는가 하는 ‘민족의 시원문제’, 셋째 민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민족의 구성요소문제’, 넷째 ‘단일민족론 문제’ 등을, 큰 틀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설명했다.

또한 민족주의문제와 관련, 첫째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문제’, 둘째 ‘민족주의 출현문제’, 셋째 ‘민족주의의 유형화문제’, 넷째 ‘민족주의의 전망문제’ 등을, 역시 큰 틀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설명했다.

정 전 교수는 특히 민족주의문제 세 번째인 ‘민족주의의 유형화문제’를 설명하면서 “논자들마다 무슨 민족주의니, 무슨 민족주의니 하면서 각양각색의 민족주의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고 현 상황을 꼬집고는 “민족주의에는 무슨 열린 민족주의니, 배타적 민족주의니 하는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다른 민족을 배척할 때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배타주의’인 것이며, 그것은 이미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정 전 교수는 “진정한 민족주의는 절대로 배타적이 아니고 열려있으며 남과 어울리고 남의 것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인다”면서 그 이유로 “민족주의란 본래가 민족의 발전을 지향하는 이념으로서, 그러자면 닫혀있어서는 안되고 열려있어야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강연은 ‘한국 속의 세계’라는 큰 제목 아래 진행된 두 번째 강좌였으며 제3강 ‘창의적 수용’은 5월11일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제2강이 다소 시간이 지났지만 원래 계획대로 강연 전문을 싣는다. / 강연 정리-정명진, 이계환 기자

 

 

▲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의 특별강좌 ‘한국 속의 세계’ 제2강이 4월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렸다. 열강중인 정수일 전 교수.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반갑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강의입니다. 제가 1강 모두(冒頭)에서 ‘세계 속의 한국’이란 주제를 선택한 이유에 관해서 잠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시각 내지는 오해를 아직 극복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역사를 좀 더 정확하게, 그리고 세계사와 눈높이를 맞춰서 봐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이런 주제를 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흔히 이때까지 우리가 그렇게 알아왔고, 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그렇게 봐왔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문화는 결코 ‘은둔’이라든가 ‘폐쇄’라든가 닫힘이 아니었고, 오히려 세계를 향해서 일찍부터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치고 남들과 서로 어울리며 교류해 온 그런 역사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강의는 ‘열림’이라는 화제를 택했습니다. ‘열림’이란 시쳇말로 ‘개방’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오늘 나눠드린 요지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최근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 하나가 첨부돼 있습니다. ‘경향신문’ 17일자입니다. 제가 13일에 1차 강의를 했으니 4일 후입니다, 저도 우연히 이 글을 알았습니다. 쓰신 분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님이십니다. 저는 이 분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이 분은 우리의 근대사, 특히 조선시대사를 전공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 시대를 전공하면서, 글에도 나오다시피,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논쟁문제였나 봅니다, 글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조선사를 연구하면서 이 문제가 많이 걸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 교수님이 쓴 글을 보면, 논쟁거리로 민족주의 문제도 있고, 쇄국 문제도 있고, 국수주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 중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관한 문제는 학계에서 상당히 고민해 온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문제들로서 이러한 문제들이 조만간 매듭지어져야 우리의 근현대사가 제대로 연구의 틀이 잡혀질 것 같습니다. 먼저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전공은 한국사가 아니고 교류사입니다. 제 강의는 주로 교류사의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조망하는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럼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세계를 향한 열림’입니다. 우선 제가 ‘역사적 오해’라는 그런 소제목을 하나 달았습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연장선 상에서 우리 자신이 자학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안주해오다 보니까,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취지입니다.

‘무지의 소치인 은둔국관’

이 내용과 관련해서, 첫째 ‘무지의 소치인 은둔국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상을 비추죠. 먼저 시간에는 영상물을 한꺼번에 뒤에 몰아서 설명했더니, 여러분들이 내용 전개와 병행해서 방영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오늘은 가급적 이야기를 하면서 영상도 병행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익히 알고 계시라 봅니다. ‘은둔국’에 관한 문제는 당시 도쿄대학에 와 동양사 교수를 하던 미국인 목사 그리피스(Griffis, W.E.)라는 분이 제일 먼저 언급했습니다. 이 분이 고종 8년, 그러니까 1871년에 우리나라에 왔다갔답시고, 이른바 『은둔의 나라 한국』이라는 세 권짜리 책을 내놓습니다. 사실 이 책이 서구에서는 우리나라에 관한 첫 통사격인 서적이고, 또 제목 자체도 좀 자극적인 ‘은둔의 나라’로 되어 있어서 19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의 머리 속에 우리나라의 이미지로 깊이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무지의 소치’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피스는 우리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은둔의 나라’라고 지목했는데, 그건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이 책이 세 권짜리입니다. 5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고대사와 중세사이고, 제2부는 사회, 정치 등 우리나라의 개관이고, 제3부가 현대사입니다. 이때까지 대체로 학계에서도 그랬고, 또 저희들도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분이 우리나라에 직접 왔다가서 쓴 현지견문록으로서 사실성이라든가 신빙성이 상당히 높은 책이라고 알았고, 유럽에서도 물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사 전공자로서 우리나라에 직접 왔다가 갔다고 한다면, 아마 우리문명은 중국 문명의 예속문명이나 주변문명쯤으로 알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자기의 선입견과는 영 딴판이죠. 그래서 갑자기 놀라는 거예요. 아! 세상에 내가 모르고, 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높은 갓을 눈두덩까지 깊숙이 내려쓰고 땅바닥만 보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그런 나라, 그런 민족이 여기에 있구나, 마치 산속에 숨어 사는 은자의 나라가 바로 이곳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책이름을 그렇게 붙인 겁니다.

그가 심어놓은 은둔이란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유럽 사람들의 머리 속에, 유럽에서 출간되는 우리나라 관련 책자들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일상메뉴입니다. ‘은둔’과 함께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맑은 아침의 나라’라는 말, 이 두 가지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입니다.

언젠가 무슨 책을 하나 보니까, 미군정이 들어올 때 미군정청 음악교육고문으로 헤이모위츠(E. Haimowitz)라는 사람이 부임합니다. 그 분은 지금도 생존해 있는데, 우리나라 기자들이 “당신이 서울에 올 때, 한국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왔는가, 한국을 어떤 곳으로 알고 왔는가” 하고 물으니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다만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은둔의 왕국이라는 것밖에 몰랐다”라고 한마디 대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피스가 과연 서울에 직접 와서 보고 책을 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대체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저희들이 여러 가지 연구들을 하고 내용을 검토해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사실 일찍이 문일평 선생 같은 분은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은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게 바로 그리피스가 쓴 책인데, 그 오른쪽 그림이 뭡니까. 그 책 속에 있는 그림 그대롭니다. 즉 ‘조선의 잔칫상’이란 그림입니다. 누가 봐도 저것은 조선의 잔칫상이 아니죠. 그가 와서 보고 그려놓은 거랍니다. 사실성에 의심이 들게 하는 내용이죠. 아마 그가 역사학자이고, 주변에서 많이 맴돌다 보니까 우리나라에 관한 지식을 얻은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은둔’이 바로 ‘무지의 소치’일 정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그의 지식은 19세기 말 이른바 ‘쇄국’으로 오해받던 그 즈음의 편향된 지식입니다. 그는 조선사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 시기의 우리나라는 ‘은둔’이나 폐쇄적인 나라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은 나라였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지했나 봅니다.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지했었다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타이틀은 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해의 소치인 쇄국관’

그 다음으로 ‘오해의 소치인 쇄국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자녀분들의 국사책을 한번 뒤져보십시오. 조선사 부분에 심심치 않게 ‘쇄국조선’이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아마 여러분은 누가 ‘쇄국조선’이라고 말한들 별로 귀에 거슬리지 않게 들릴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쇄국조선’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왔거든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질 않습니다. 조선은 ‘쇄국’이 아니라 열린 나라였습니다. 오늘 4가지 사례를 가지고 이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례로 ‘조선은 열린 나라’를 잡았습니다. 거기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이 ‘쇄국관’이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로 일본의 식민사관과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학적 역사관의 산물입니다. 일본은 개화 전 장기간에 걸쳐 지독한 쇄국정책을 펴왔습니다. 그에 대비해, 혹은 그 연장선상에서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의 전철을 밟은 양 ‘쇄국’을 들먹였습니다. 사실상 조선의 ‘쇄국’은 일본의 쇄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조선의 ‘쇄국’은 대원군 때 10년밖에 안되는 극히 짧은 기간에 있었던 일시적인 몸부림, 임기응변의 전략적 방편에 불과했던 일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도 전 조선에 걸친 ‘쇄국’인양 확대해석하는가 하면, 그것이 조선의 근대화를 좌절시킨 중요한 병폐의 하나로 알아왔다는 겁니다. 우리 국사책에 나오는 ‘쇄국조선’이란 아마도 그러한 뜻이 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도 말씀드리겠지만, 일본은요, 일본은 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막부시절인 에또(江戶)시대 전체 264년 가운데 무려 241년 동안이나 지독한, 그야말로 지독한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이에 비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라는 것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에 실시한 하나의 임기응변적인 책략이나 정책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대원군은 왜 이런 쇄국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가.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간단하게 추리면, 내외 정세와 관련되죠.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와 같은 부단한 외침을 막아 국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대원군은 부득이하게 이런 자구적이며 방어적인 쇄국정책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죠. 자기 아버지 묘까지 파헤쳐지는 이런 난세에 그로서는 그런 방비대책, 경계대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임기응변의 방편이나 혹은 당시 정세를 타개하기 위한 일시적인 몸부림으로 봅니다. 따라서 전 조선시대를 무성한 숲이라고 할 때, 이 ‘쇄국’은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했다, 흔들리는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하다,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우리는 대원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지어 ‘쇄국’했다는 이미지에서 죄인시까지 해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대원군을 이렇게 몰아 부친 것은 역시 식민사관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대원군을 ‘죄인시’한 것은 일본사람이 쓴 『근세조선정감』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마치도 대원군의 쇄국으로 인해 조선이 망한 것처럼 왜곡하면서 그를 ‘망국의 죄인’으로까지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민사관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 보니까 ‘쇄국 조선’이라는 오해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몇 달 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흥선대원군, 그를 왜 개혁가라고 하는가’라는 한 시간짜리 다큐를 방영했는데, 거기서 그를 ‘조선왕조의 마지막 개혁가’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원군을 다시 진지하게 재평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원군은 많은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여러 가지 정책들이 있습니다. 세도정치를 청산했죠, 인사정책에서도 문무병관 즉 문무를 골고루 기용하는 정책을 썼어요. 또 관리들의 횡포나 수탈을 막기 위해 환곡제도나 사창제도를 바꾸는 개혁정책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 오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국고에서 갹출해 화포와 수뢰포(수중폭발) 같은 현대적인 무기까지 제조해서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폅니다. 따라서 대원군에 대해서는 이 같은 개혁의지와 그 실천이 위주가 되고, ‘쇄국’은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했다는 식의 평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열림’을 말하면서 여는 말로 쇄국문제를 좀 길게 언급했습니다. 이만 각설하고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이제부터 ‘세계를 향한 열림’이라는 주제에 관해 4가지 사례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1강과 마찬가지 방법이겠습니다. 1강에서는 ‘세계와의 문명유대’라는 주제로 5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내용이 많기 때문에, 한 가지 줄여서 4가지만 가지고, 그것도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이른바 당쟁문제도 새롭게 조명해야

아참,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들 조선을 근대화하지 못하게 하고 망하게 한 병폐의 원인으로 ‘쇄국’과 더불어 이른바 ‘당쟁’을 듭니다. 사화라든가, 붕당(朋黨)이라든가 하는 당파 싸움 말입니다. 마치 그것이 조선의 개화나 개혁, 또는 현대화의 전진을 가로막은 암초인양 백안시합니다. 더 한심한 것은 그런 당쟁의 여파가 오늘까지 이어져서 마치 오늘의 지역분쟁 같은 것을 야기시킨 원인(遠因)으로까지 보는 경향이 없지를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이른바 당쟁문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당쟁이라고 하면 대체로 정말 몹쓸 부정적인 병폐로만 치부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관해서도 정확한 역사적 인식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한 외국인들의 평가와 지적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당파문제가 많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1890년대에 조선을 방문한 한 외국인이 쓴 『맑은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쟁에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하는 형태에서 빚어진 것이지, 결코 조선의 정치에서만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반역과 패륜이 난무하는 서구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그래도 그 나름의 도덕성과 게임의 규칙이 있다. 이렇게 평합니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라는 충고로도 들립니다.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평언입니다.

그 다음, 제가 얼마 전에 어느 한 책에서 미국의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초대소장을 지낸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에 관한 글 한 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작고하셨지만 서양인으로서는 한국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분입니다. 최근 일조각에서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이라는 그분의 두툼한 책 한권을 펴냈습니다. 이 분은 한 40년 동안 우리 한국학을 연구했습니다. 그 분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우리 학자들도 못해낸 일을 성취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물론 고려시대부터 도입됐죠, 과거제도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급사를 비롯해 과거에 급제한 관료들은 사회의 중추죠. 와그너 박사는 이런 인물 5만 5천명을 몽땅 조사해서 그들에 관한 개별 신상카드를 작성했습니다. 지어 2003년에는 이것을 CD롬으로 작성해서 발행까지 했습니다. 하여튼 우리나라에 관해서 많은 연구를 하신 대단한 분인데, 그 분은 요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들은 조선인은 셋만 모이면 파벌싸움을 하는데, 이런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쟁은 조선이라고 유별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사화와 당쟁을 통해 정당한 절차를 갖춘 통치양식이 발달함으로써 중국과 일본에 비해 조선왕조가 길게 존속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역설적인 얘기죠. 무슨 얘긴가 하면, 당파나 당쟁이라는 것은 무턱대고 악일 수가 없고, 그 이면에는 상당히 건전한 것도 있다는 뜻이죠. 요컨대, 사회통치제도를 정착시키고 건전한 사회의 정치질서, 정치제도를 수립하는데서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조선왕조는 중국이라든가 일본의 왕조에 비해서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다음 강의에서 말씀드릴 내용과 비슷한 맥락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쇄국이나 당쟁처럼 우리가 역사에서 부정시해 왔던 일련의 사실들에 대해서 이제는 다시 한 번 고찰해서 정확한 시각들을 세워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례에 들어가겠습니다. 사례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일찍부터 세계를 향해 열려져 있었는가. 남들이 어떻게 열린 우리와 교류했는가, 그래서 우리 역사와 문화, 전통의 창조에 어떤 기여가 있었는가, 하는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

첫 번째 사례로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조금은 의아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고고미술사가 요시미즈 쯔네오가 쓴 책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라는 책 내용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분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유리 전문가인데, 신라문화에 관해서 30년 동안 이나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 연구결과를 응집한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참, 학문하는 저희들로서는 퍽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그는 동양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 왔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이 분도 물론 그런 통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저 멀리 떨어진 로마로부터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찬란했던 신라문화는 로마문화와의 상관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지금까지의 통설에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는’ 파격적인 논지가 될 것이라고 설파하고, 또 그런 기대를 표명합니다. 그는 책 전반에 걸쳐 그 당시 신라와 로마 간에 있었던 여러 방면의 교류상과 상관성을 구체적인 유물들을 가지고 입증합니다. 분명, 그는 신라문화의 개방성, 국제성, 진취성에 심취되었던 겁니다. 그는 두 문화 간의 공유성과 교류를 통한 로마문화의 수용, 그리고 신라인들의 로마문화에 대한 창의적인 수용 등 세 가지 방면에서 그러한 상관성을 조목조목 밝혀냅니다.

우선, 신라와 로마 문화의 대표적인 상관성 유물로는 수목형금제관식(樹木型金製冠飾) 같은 공유성 유물을 듭니다. 교류사에서 ‘공유성’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먼저 시간에 제가 세계와의 문명유대라는 이야기에서 문명 간의 공유성을 말씀드렸죠. 그 당시 신라와 로마 간에는 문명사적으로 여러 가지 공통적인 점, 즉 공유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류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문명의 보편성에 의해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통적인 문명요소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기 나오는 수목형금관입니다. 여러분들이 금관을 상기하면 아마 짐작이 갈 겁니다. 수목(樹木)이라는 것은 금관의 한 장식입니다. 학계에서는 이 수목을 성수(聖樹)사상, 즉 나무를 숭배하는 사상에서 나온 하나의 장식물로 봅니다. 이 성수사상은 본래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사상이었는데, 그것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로 승화됩니다. 그런데 신통히도 우리의 금관에도 그런 사상을 반영한 장식이 보이니, 그것이 바로 두 문화의 공유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상관성을 증명하는 유물로는 각종 유리제품과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 등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수용유물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각종 장신구와 뿔잔 등 창의적으로 변용해 수용한 유물들입니다. 신라인들은 일회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생활정서나 환경에 맞게 창의적으로 변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신라문화를 한층 더 풍부화시키는 슬기를 발휘했습니다. 저자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의 유물들을 가지고 당시 두 문화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합니다. 자, 넘어가겠습니다.

영상물 사진을 보십시오, 유물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금관이죠. 여기 이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죠, 나뭇가지나 나무 잎사귀 장식은 성수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문명들 간이 공유성이라 말합니다. 여기 있는 다른 장식은 새 깃입니다. 이것은 성조(聖鳥), 즉 새를 신성시하는 사상에서 나왔다고 보는 겁니다.

그 다음, 이쪽에 황금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귀중한 유물입니다. 경주에서 출토됐는데, 무슨 장식이냐면, 상감입니다. 금알맹이와 옥을 박아 넣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이라고 합니다. 겉면에 금알맹이와 옥을 박아 넣으면서 다채로운 색깔을 내는 아름다운 장식데,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다채장식기법의 유물입니다. 동양에선 우리 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법은 대체로 1세기에서 4세기까지 지중해 로마 일대에서 흥행했던 기법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까지 왔는데, 사실 그 중간의 두 곳에서밖에 유사품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귀중한 유물이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에 소개한 것은 공유성 유물과 그대로 수용한 유물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창의적으로 변형해서 받아들인 유물들입니다. 그 중에 각배(角杯)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각배 중에는 국보급 유물도 있습니다. 각배라는 것은 일종의 뿔잔입니다. 뿔잔은 본래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이 사용하던 전통 술잔인데, 이것이 그리스에 전해져서는 풍요를 상징한다는 의미의 ‘풍요의 잔’으로 승격됩니다. 그 뿔잔이 주로 남방루트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중간 길목인 인도나 중국에는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에도 없습니다. 가야하고 신라에만 나옵니다. 가야와 신라인들은 실정이나 정서에 맞게 창의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 식입니다. 기마식 각배죠. 원래의 각배 모습과는 다르죠. 우리의 취미에 맞게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겁니다.

그 다음은 각종 금제장신구들입니다. 원래 귀걸이나 목걸이, 팔찌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였으나 우리 동양문명권에서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소박함을 미덕으로 여겼으니 그러했겠지요. 고대 중국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라곤 거의 없습니다. 상당히 소박해요. 이것이 동양사상이거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때에 오면, 보다시피 허리띠나 띠드리개 같은 것을 이렇듯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습니다. 금반지도 보면,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 기본형태인 마름꼴이지만 취향에 맞게 약간씩 모양새를 바꿨습니다. 이런 것을 창의적 수용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것이 이른바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일며 ‘인물무늬상감구슬’)입니다. 이것은 아까 보여들인 황금장식보검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그리스-로마쪽 문물을 수용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옥을 상감해서 만든 목걸이입니다. 경주 미추왕릉지구의 한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입니다. 이것이 중심옥인데, 지름이 1.8cm밖에 안됩니다. 그 속을 보면, 앞뒤에 모두 여섯 사람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왕과 왕비로 추정됩니다. 그밖에 여섯 마리의 백조가 있습니다. 또 두 그루의 나무도 있습니다. 대단히 섬세한 공예품입니다. 여기 보면 사람이 있죠. 이 사람을 보면 분명히 아리아인입니다. 얼굴이 희고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동그라며, 눈썹이 맞닿아 있습니다. 얼굴이 길쭉한데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특이하죠. 그렇다면 이 물건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 이 아리아인들, 백인들이 백조를 키우며 살던 곳은 어디였을까 ? 추적해 보니까 인종은 5~6세기 로마 식민지였던 흑해 부근에 살던 북방계 백인종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멀리 흑해 부근에서 온 유물로 추정됩니다.

넘어가겠습니다. 이것은 봉수병이죠. 새머리 물병이라고도 합니다. 유리병이죠. 저희가 1993년에 모 방송국하고 신라와 서역간의 교류관계를 다큐로 만들기 위해 카이로에 갔습니다. 원래 카이로는 로마의 유리제작 전통을 이어온 중심지의 하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로맨글라스 제조법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공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전통 유리공장에 찾아갔습니다. 제조공에게 경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4세기 후반경의 봉수병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대로 하나 만들어보라고 주문했습니다. 제조공은 사진을 보자마자 10분도 채 안 걸려 금세 똑 같은 유리병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색조는 조금 다르지만, 형태는 꼭 닮았습니다. 신통하죠.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1,600여년 전에 벌써 신라와 지중해 간에는 문화적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컵에 손잡이가 달려있죠. 원래 동양문명권에서는 컵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컵에 손잡이를 다는 것은 로마의 문화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로 들어온 것입니다. 오늘까지 남아있는 유물 유산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고, 문화교류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라는 책 속에 소개된 대표적인 실례들입니다. 그만큼 당시 신라는 저 멀리 로마, 지중해 세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교류루트 같은 것은 우리가 연구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그 중간환절인 중국이나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어디서 어떻게 그러한 유사유물들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동양을 놓고 말하면 신라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학문적으로 해명할 것인가가 연구의 과제입니다. 아무튼 요체는 그 옛날에 벌써 우리는 로마세계와 다양한 문화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사례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사례, ‘중세 아랍-무슬림들과의 교류’

두 번째 사례는 ‘중세 아랍-무슬림들과의 교류’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런 것을 연구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나라를 누가 제일 먼저 알았을까. 세상에서 우리나라를 제일 먼저 소개한 사람은 누굴까. 이런 것을 말입니다.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 관한 최초 기록으로 루브루크가 남긴 한마디를 꼽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55년경 프랑스 루이 9세 황제가 루브루크라는 사신을 몽골 헌종에게 파견합니다. 파견 목적은 몽골과 제휴해서 이슬람군을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신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사신이 돌아가서 복명서, 즉 부여받은 사명을 어떻게 수행했는가 하는 보고서를 왕에게 제출합니다. 그 속에 ‘섬의 나라 까우레’란 한 마디가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최초의 우리나라 소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은 누구일까요. 중국과 일본 사람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때까지는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 즉 오늘의 김해에 온 스페인 선교사 쎄스뻬데스가 우리나라에 온 첫 서양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수백년 앞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이 있은즉, 그들이 바로 아랍-무슬림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아랍문헌에 나옵니다. 851년에 씌어진『중국과 인도 소식』이라는 책에 벌써 신라에 관한 기술들이 나옵니다. 신라가 지구의 동쪽, 태평양 상에 있으며, 그 나라에는 금이 많다는 등, 이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루브루크나 쎄스뻬데스보다 적어도 400-500년 내지 700-800년 전에 벌써 그네들은 우리나라에 관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9세기 중엽 이후의 문헌이나 사적들에는 우리나라에 관한 기술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지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독도 같은 영토에 관한 국제적 분쟁문제로 인해서 동해 명칭 등 지명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세계지도에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가 그 첫째 관심사입니다. 가령 20여년 전부터 전문학회를 만들어서 우리의 동해가 ‘동해’로 표기되었는가, 아니면 ‘일본해’로 표기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오랜 세계지도들을 샅샅이 뒤집어 봅니다.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세계지도에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우리나라 지형은 도대체 어땠을까를 깐깐히 살펴봅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세계지도에 소개된 것은 1562년 스페인의 벨호라는 사람이 그린 세계지도입니다. 지금 그 지도는 스페인의 라 스페시아 해군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에는 지명이 없습니다. 대충 지형만 봐서 우리나라임을 추정할 뿐입니다.

우리나라 이름을 처음으로 명기한 세계지도는 그보다 33년 뒤인 1595년에 프랑스의 메르카토르라는 사람이 만든 세계지도인데, ‘꼬레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이름이 새겨진 최초의 세계지도라고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랍사람들은 이보다 무려 408년 전에, 정확하게는 1154년에 이드리시라는 지리학작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라는 이름이 아주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몇 장의 지도를 보시겠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강의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우리에 대한 세계적인 이해와 인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고 여겨서 몇 장의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쪽 지도는 1606년의 것인데, 중국의 동쪽에 있는 길쭉한 자루모양의 반도가 바로 한반도죠. 그 때는 저런 식으로 봤죠. 이 지도에는 아직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까 말한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에는 그래도 ‘꼬레아’라는 이름이 있는데, 오히려 그 후에 나온 이 지도에는 이름조차 없습니다. 그저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해 있으니깐 우리나라 지도라고 짐작합니다.

다음 지도를 보시겠습니다. 이것은 1707년에 제작한 세계지도로서 비교적 형태를 갖추고 있죠. 그 다음에 재미있는 것은 이쪽 지도입니다. 1817년에 그린 지도인데, 북방 국경선을 좀 눈여겨 보십시오. 오늘의 중국 연변이 다 우리나라 국경 안에 들어오죠. 우리의 역사지도와 관련해서 연구적 가치가 있는 소중한 지도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 이것이 1154년에 리비아 출신의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입니다. 이분은 총체적으로 세계지도 한 장을 그리고 또한 세계를 7등분해서 매 부분마다 세밀지도 10장씩 그렸습니다. 제일 동쪽, 10번째 세밀지도에 신라가 그려져 있습니다, 신라는 6개의 섬입니다. 섬으로 그려놨습니다. 맞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아무튼 섬으로 그리면서 ‘신라’라고 철자도 아주 정확하게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에 알려진 최초의 우리나라 지도라고 추정해 봅니다.

이것이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입니다. 지중해, 여기 있는 아랍 지도는 비슷하죠. 여기 인도양, 신라는 맨 동쪽입니다. 아직 지리지식이 불충분한 때라서 아프리카를 인도양과 맞붙은 큰 대륙으로 알고 있었죠. 이 지도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자못 큽니다. 알다시피, 5세기 유럽이 암흑기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로마의 고전학문의 계승으로 지리학이나 철학 등이 상당히 발달돼서 우주를 둥근 구체로 봅니다. 그러나 유럽은 중세 암흑기에 들어가면서 이런 선진적인 고전문화나 지식, 천문학들을 다 거부합니다.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면서 우주는 둥근 것이 아니고 넓죽한 것으로 봄으로써 세계지도도 원형지도가 아니라, 두루마리식 평면지도로 바뀌어지지요, 원형지도는 없어집니다.

이럴 때, 이드리시는 과감하게 이러한 사이비적인 중세 지도관을 타파하고, 원형을 회복해서 이런 구체의 세계지도를 그려냅니다. 1951년 이라크과학원에서 윈지도를 상당히 크게 복원했습니다. 원래 바그다드 박물관 입구에 걸려있었는데, 전쟁 통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기 이 지도는 저희들이 1980년대 카이로 국립박물관에 가서 찾아낸 지도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중세 아랍-무슬림들은 지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에 관한 지식들을 처음으로 세계 만방에 소개했습니다. 특히 신라에 관해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기록들을 남겨놓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신라를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이상형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계에는 이른바 ‘행운의 섬’, ‘불멸의 섬’, 즉 이상향적인 섬이 두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대서양에 있는 미지의 지하도시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동방의 신라라고 해요. 그런데 이 두 이상향은 서로가 다르다는 거예요. 아틸란티스 쪽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지만, 신라 이상향은 사람이 살면서 농사도 짓는 최고의 이상향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 보니 신라에 관한 이상향적인 기술들을 많이 남겨놓았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966년에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마크디시는 966년에 쓴 책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중국의 동쪽에 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재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호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신라가 명기된 세계지도를 만든 이드리시는 지도 밑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신라를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 금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금으로 만든다.”

유럽인들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로 ‘은둔국’이나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 더불어 금이 흔함을 들먹일 때 가끔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런 말의 원천이 바로 이 이드리시의 설명문입니다. 물론 과장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나라가 황금나라였다는 것만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신라에 관한 이러한 기술을 한 때 일본에 관한 기술로 오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때 일본사람들은 신라에 관한 이러한 기술들을 자기 나라에 관한 기술이라고 억지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1881년 네덜란드의 아랍학자 더 후여란 사람이 몇 가지 관련문헌을 연구하면서, 신라에 관한 이러한 기록은 일본에 관한 기록일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하나 발표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일본에 관한 아랍인들의 지식」이란 논문입니다. 일본학계를 크게 흥분시키기에 족한 글이지요, 그것이 시발이 되어서 일본 동양학계에서는 2차대전 전까지, 한 50년 동안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가지고 일시 잘 우려먹었습니다.

다음에는 당시 신라와 아랍-이슬람 세계 간에 있었던 교류사항에 관해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쪽 기록을 보면, 아랍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비단이나 도자기, 검이나 담비가죽 같은, 총 11종에 달하는 물품을 가져갑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도 그쪽으로부터 이러저러한 문물들을 수입해 왔습니다. 아까 본 유리그릇 같은 것이 대표적이고, 그밖에 『삼국사기』에 보면 여러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목숙(苜蓿)입니다.

여기 그림으로 나오는데, 이 흑담비 가죽이나 털은 귀부인 목도리 감으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것이죠. 아랍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흑담비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발해가 중앙아시아와 무역거래를 하는 품목에도 흑담비가 끼어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학자들마저도 발해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이른바 ‘흑담비의 길’이라는 것이 있었을 개연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역 물건 중에 목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숙은 본래 카프카스 지대에서 재배되는 양질의 말 사료입니다. 그것이 기원전 한나라 때 중국에 들어왔고,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전문적으로 목숙을 재배 관리하는 기구로서 목숙전(苜蓿典)이라는 것이 4곳에나 있었습니다. 관리자들의 구체적 직분까지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말의 사료인 목숙이 신라에 들어와서 유행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에 관한 기록은 없어서 그 실상을 더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목숙은 말의 사료로뿐만 아니라, 약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목숙은 어느새 야생화로 돼버렸습니다. 늦여름 초가을 들에서 피어나는 키 30cm 정도의 야생화입니다. 거여목이라고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목숙이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는데, 그 이름이 ‘우마고야시’(馬肥), 즉 말을 살찌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귀중한 약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라는 서역문물의 중계역할도 했습니다. 이것 말고도 신라가 서역 문물을 일본에 전해준 것은 향료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라의 국제무역상 일단을 보여줍니다.

그밖에 서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문물이 적잖게 있습니다. 당시는 아랍-이슬람 세계를 포함해 중국 서쪽에 있는 나라나 지역은 통털어 서역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매장유물이나 지상유물 가운데는 서역에서 들어온 것들이 여러 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옆에 괘릉이라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능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서역인상을 한 무인석상 한 쌍이 우뚝 서있습니다.

이 능은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38대 원성왕릉이라고 짐작됩니다. 들어서자 어구에 마주서있는 한 쌍의 거대한 무인석상이 눈길을 끕니다. 그밖에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도 똑같은 한 쌍의 무인석상이 능을 지키고 서있습니다. 이 무인석상들은 누가 봐도 깊이 패인 눈에 높은 코를 한, 이른바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임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심목고비는 전형적인 서역인상입니다.

괘릉에 관해서는 일본사람들이 1910년대에 처음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네들이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석상의 키는 2미터 반 이상입니다. 꽤 웅장한 편이지요. 보기에도 우람합니다. 그리고 그 조각기법이 매우 생동하고 뛰어납니다. 그러면 동양인도 아닌 외방인의 형상을 어떻게 저렇게 잘 조각해냈을까 하는 것이 제일 큰 연구과제였습니다. 일본학자들은 이런 조각기법은 중국 당나라의 것을 본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여겼지요. 그것이 거의나 통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당시 축조된 중국측 능들을 두루 탐사했습니다. 서안에 있는 건릉을 비롯한 여러 능들을 일일이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그런 이색적이고 우람한 무인석상은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조그마한 호인용(胡人俑)뿐입니다. 이런 호인용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장용으로 능속에 파묻은 것입니다. 능을 지키는 우리네 무인석상 같은 석상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의 무인석상을 놓고 오판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신라와 서역 간에 있었던 교류나 인물내왕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에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내왕했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아랍문헌 기록이나, 한반도에서 발견된 서역유물 등을 근거로 할 때, 당시 아랍인들을 비롯한 서역인들이 신라 땅에 왔었다는 것은 의심이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믿어집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현장에서 모본으로 삼아 이러한 사실적이고도 생동한 무인석상을 조각할 수 있었다고 추단해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것이 금동제사리탑인데 송림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속에 사산계 유리로 만든 사리함이 들어있습니다. 사산계란 사산조 페르시아, 즉 오늘의 이란을 말합니다. 사산계 제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보다시피 표면에 전형적인 사산계 문양인 고리무늬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희귀한 유리제품입니다. 다음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이것은 서역인을 형상한 토용(土俑), 즉 흙으로 빚은 인형인데,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일명 ‘개무덤’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마구 파헤치다가 별로 중요한 것이 나오지 않으니 폐분으로 저버린 데서 지어진 별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20년 전에 우연히 다시 파봤는데, 거기서 이런 토용들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이 무덤은 일반 무덤이 아니라 귀족 이상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유물은 도굴 당했습니다. 수습한 유물들만도 상당히 귀중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28점의 이러한 토용이 있습니다. 남자상 15점, 여자상 13점입니다.

근 절반은 아까 말한 심목고비한 서역인상이예요. 28명 모두는 무슨 관직에 있는 사람들 같은데, 그 가운데서 두 번째나 세 번째로 큰 사람이 바로 서역인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그 사람이 손에 무엇을 들고 있죠,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홀(笏)이라는 겁니다. 홀이라는 것은 당시 대신들이라든가 신하들이 아침에 임금을 만나 조회할 때 자기신분을 밝히는 일종의 신분증입니다. 이렇게 서역인이 홀을, 그것도 상당히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만이 패용할 수 있는 홀을 잡고 있다는 것은 그의 높은 지위를 시사해주지요. 고위직의 이방인, 신라의 열린 자세와 수용성을 말해주지요.

다음으로 보시는 것이 유향(乳香)입니다. 이 유향은 40년 전에 불국사 석가탑 속에서 발견된 겁니다. 세 봉지가 나왔습니다. 유향은 분향으로 쓰이는 일종의 고급향료입니다. 그래서 사찰 같은 데서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원산지는 예나 지금이나 두 곳 밖에 없습니다. 팔레스타인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남부에 있는 하드라마우티란 곳입니다. 이것은 현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쪽에서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보여드리는 영상은 유명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나오는 외국 사절행렬도입니다. 12사람의 사절이 있는데, 마지막 두 사람을 보세요. 1965년에 발굴했는데, 발굴할 때부터 소련 학자들은 이 두 사람만큼은 분명하게 한반도에서 온 사람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어느 나라에서 온 사절인가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돼 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온 사절이란 근거는 무엇인가 ? 여러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얼굴색이 몽골계의 황색인종이고, 머리엔 조우관(鳥羽冠), 즉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조우관은 한반도 사람들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중국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같은 곳에서 저런 조우관이 발견되는데, 쓴 사람은 틀림없이 한반도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공수(拱手), 즉 팔짱을 낀 것과 환두대도(環頭大刀)를 패용한 것입니다. 환두대두란 칼 손잡이가 둥근 큰 칼로서 고구려 벽화에 그런 모양의 칼이 나옵니다. 그리고 코가 뾰족한 신발도 신었죠. 이러한 점들을 감안해서 그들이 한반도에서 온 사절이라는 데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그러나 고구려인가 신라인가 백제인가에 하는 데 대해선 갑론을박의 논쟁이 계속돼 왔습니다. 지금은 고구려 사절이라는 데 무게가 쏠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파견연대는 650년부터 651년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합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러시아 극동지방에 자리한 노브고르데예프카성의 한 취락지에서 출토된 소그드 은화입니다. 그곳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280km 지점에 있는 옛 발해의 고성(古城)입니다. 그 고성 터에서 이 소그드 은화가 발굴된 겁니다. 2003년 겨울 어느 날 현지에 간 모 방송사 취재단이 이 은화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와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감정 결과 8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활발한 국제무역을 벌이고 있던 소그드인들이 사용하던 은화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이 은화가 발해 고성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당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에 국제적인 무역가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 사례, ‘개방적인 귀화책’

그럼, 이제부터 세 번째 사례로 넘어가겠습니다. ‘개방적인 귀화책’입니다. 전번 강의 때 민족과 민족주의 문제를 다음 강의에서 언급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시간상 관계로 구체적으로 길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요점만 언급하고 필요한 화두 몇 가지만 던지겠습니다.

‘개방적인 귀화책’이란 또 하나의 열림을 말합니다. 우리의 민족사를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 우리 겨레는 닫혀있는 옹졸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너그럽게 남을 포용하는 그런 민족, 그런 겨레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우선,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부터 좀 따져봅시다. 1985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275개 성씨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귀화성이 무려 130여개나 됩니다. 몇몇 족보들을 들춰보니 그런 사실이 실감났습니다. 귀화성과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최, 박 같은 몇 성을 제외하고는 거개가 중국 성을 비롯한 외래성이라고 과장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래성 비중이 높다고 해서 무턱대고 부풀리는 것은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구체적인 사실에 준해 논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실시한 DNA 검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30여개의 혈통이 뒤섞인 민족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혼혈족인 셈이죠. 1895년 새비지 랜더라는 영국의 여행가가 조선에 왔습니다. 그녀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시베리아를 돌아보고 제물포로 해서 서울로 들어옵니다. 조선을 돌아보고 나서 돌아가서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여행기를 썼습니다.

아마 그가 방문할 때 조선사람들은 단일민족성을 무척이나 강조했나 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외방인인 그에게 퍽 인상이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책에서 조선은 ‘다민족 혼혈사회’라고 단정합니다. 벽안(碧眼)의 눈에 그렇게 비쳤나 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조선인들은 북방 몽고리아 인종이 주종이나, 중앙아시아 혈통도 많이 혼재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현상은 기호지방의 사대부 속에 더 심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화가답게 조선인들의 두상과 체형적 특징을 포착한 38장의 인물 삽화를 남겼습니다. 고종의 어진도 한 장 그렸습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혈통적으로만 보면 우리사회가 ‘다민족 혼혈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조금은 섬뜩하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 절반은 혼혈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현실일진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고려시대의 귀화정책을 대표적 사례로 들려고 합니다. 귀화문제에 한해선 고려가 가장 개방적이었습니다. 지금의 130여개 귀화성 가운데 고려시대가 60개성이고, 신라 시대는 40개성, 조선시대는 30개성입니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대를 이어 귀화해 들어옵니다. 다른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고려는 튼튼한 국력과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귀화를 환영하고 귀화인에 대해 포용과 우대의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고려는 이른바 ‘내자불거(來者不拒)’.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너그러운 귀화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많은 외방인들이 살길을 찾아 와서는 아예 귀화해 버립니다. 찾아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만, 아무튼 많이들 왔습니다. 고려시대 초 100년 동안 무려 17만 명이나 귀화합니다. 당시 고려인구가 230만임을 감안할 때, 적잖은 비중이죠. 오는 자를 다 받아들이거든. 받아들이는데도 아주 누그러웠어요. 일단 귀화하면 호적에 편입시키고 성을 하사하며 관직도 제수합니다. 뿐만 아니라, 안착용 주택과 전답, 미곡과 의복, 기물과 가축 등을 일일이 시여합니다. 지어 안전을 고려해 일반 귀화인들은 국경에 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킵니다. 얼마나 주도면밀한 귀화책입니까?

그러면 우리 선조들이 펴온 귀화나 민족정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민족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것은 비단 역사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현실성 때문에 민족문제가 이토록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순혈, 단혈 민족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떳떳하게 자부하고 세상에 자랑까지 해왔을까요? 어떤 이율배반적인 착각은 아니겠는가. 정말로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인가 하인즈 워드가 왔을 때 한참 꽤 떠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매체에서 토론하는 것도 많이 지켜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단일민족 이해가 상당히 표피적이고 단견적이었습니다. 우리의 민족사를 제대로 이해 못한 가운데, 마치도 오늘에 와서야 급조된 문제처럼 치부하니 제대로 답이 나올 리가 만무하죠. 답은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사에서 찾아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고려를 실례로 들어 봅시다. 고려는 강한 국력과 높은 문화적 자신심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내자불거’의 포용책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라는 강렬한 용광로 속에 이네들을 몽땅 융화시켜 하나의 응어리로 만들었습니다. 그 응어리가 바로 고려시대를 열어간 한민족입니다. 물론 피라는 것은 어쩔 수 없죠. 하나로 융합할 수는 없죠. 그러나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면에서는 단일민족 구성에 하등의 하자가 없는 동질성과 단일성을 확보했던 겁니다. 이를테면, 혈통을 제외한 기타의 민족 구성요소들은 완숙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사에서 볼 수 없는 민족적 단일성과 우수한 민족적 전통 및 민족성을 창출하고, 발휘하고, 또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세계사적인 수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하고 역사적 배경이 엇비슷한 나라로 월남이 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 등 역사적으로 우리와 매우 비슷한 처지에 있어 온 나라입니다. 그러나 월남은 10세기에 처음으로 독립국인 이 왕조를 세웠지만 고려 같은 강력한 국력이라든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다한 소수민족들을 그대로 뿔뿔이 방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월남이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용광로 속에 그 소수민족들을 녹여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까지도 이른바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비교할 때, 민족문제를 순기능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한 우리네 민족사에 대해 우리는 높은 긍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고려의 귀화책에 의해 귀화한 대표적인 인물 몇몇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우선 화산(花山) 이씨가 있습니다. 지금 옹진에 있는데, 선조는 월남사람입니다. 10세기 처음으로 가져본 독립국가 이 왕조가 8대 왕 이천조(李天祚) 때 그만 쿠데타가 일어나 위기에 빠집니다. 당시 군사령관격인 조카 이용상(李龍祥)은 구사일생으로 배를 타고 탈출합니다. 어찌하다가 표착한 곳이 바로 오늘의 옹진반도입니다.

그즈음 옹진반도에서는 항몽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용상은 옹진 주민들과 함께 항몽전쟁에 참가합니다. 그것이 가상스러워 고종은 화산 이씨란 성을 하사합니다. 그래서 이용상은 화산 이씨이 비조가 됩니다. 가문은 번성해 문중에서는 여러 명의 명인들이 배출됩니다. 오늘은 개성 쪽에 그 일족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무인시대’라는 드라마를 보셨을 턴데, 그 속에서 명종 연간 14년 동안이나 무소불위의 무신철권을 휘두른 이의민이란 자가 생각나십니까. 그자는 강원도 정선(旌善) 이씨 세가의 6대 손인데, 그 선조인 이양혼도 월남에서 귀화한 사람입니다.

민족과 민족주의문제에 관해서

그럼, 여기서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민족과 민족주의문제에 관해서 잠깐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민족과 민족주의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방대한, 그리고 논쟁도 많은 문제라서 시간도 시간이러니와 제 자신도 아직 많이 연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이 있게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는 몇 가지 문제를 화두로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문제의 개괄적인 얼개쯤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먼저, 민족문제입니다.

민족문제에서는 첫째로 개념입니다. 도대체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차이 나는, 상반되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은 ’허상이다’, ‘허구다’, ‘상상이다’, ‘의지 공동체다’, 하고 싶으면 하는 ‘계약 공동체다’ 라는 식의 이해입니다. 이에 반한 다른 이해는 민족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달해 온 실체 로서 나름의 개념과 규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상치된 두 견해죠.

두 번째론 민족이 언제 출현했는가 하는 시원문제입니다. 서구 학자들이라든가, 서구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마저도 민족의 출현 시기를 근세로 봅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출현을 계기로 해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체로 일본 침략을 계기로 해서 민족이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민족의 원형은 씨족이나 종족인 것만큼 민족이 결코 근세의 산물일 수 없다는 견해가 그 다른 하나입니다,

차제에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봉건적인 분할상태가 해체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형성되면서 출범한 유럽의 민족과 장기간 전통으로 굳어진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속에서 역사의 이른 시대부터 형성되어 온 동양의 민족은 그 시원이나 형성 및 발달과정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점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민족문제 논쟁을 판가름 짓게하는 열쇠가 될 성싶습니다.

세 번째로 제기되는 화두는 민족의 구성요소문제입니다. 민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어떤 구성요소로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역시 두 가지 견해가 상치됩니다. 하나는 민족의 구성요소를 주로 혈연과 언어에 국한시키거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에 매몰되다보니 피도 섞이고 언어도 섞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점을 근거로 민족의 실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죠. 민족허상론 같은 것이 바로 이런 견해에서 파생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민족의 구성요소들을 혈통과 언어, 경제와 문화, 역사와 의식 등 제반 주.객관적 요소들을 포괄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민족학적 견지에서 보면 민족이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민족 구성의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를 두루 총괄적으로 망라해야 합니다. 객관적 요소라는 것은 언어나 혈통, 지역성, 경제, 역사, 문화 등에서의 동질성이나 일체성을 말합니다. 주관적 요소라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 요소에서 유출되는 귀속의식이나 민족주의, 민족의식, 민족정신 같은 관념적 요소들을 말합니다.

좀 더 이야기를 심화시키면, 이 두 가지 요소, 즉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를 다 갖춘 민족은 완전무결한 민족이라고 해서 대자적(對自的) 민족이라고 하며, 객관적 요소만 갖추고 주관적 요소가 결여된 민족을 즉자적(卽自的) 민족이라고 합니다. 즉자적 민족은 민족적 정신이나 기개가 빈약한 기형적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은 혼과 얼이 없는 생물적 오합지중에 불과하죠. 이렇게 민족은 포괄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그럴 때 민족이라는 것은 실체이지 결코 종잡을 수 없이 허공에 떠 있는 허구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 네 번째 화두는 단일민족론입니다. 앞에서 민족문제를 말하면서 단일민족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단일민족론이라는 것은 순수혈통론이나 순수민족론이 아닙니다. 사실상 순수민족이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단일민족’, ‘단일민족’ 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고려의 경우처럼, 각이한 혈통이나 언어의 사람들을 하나의 용광로 속에 녹여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면에서 동질성, 일체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럴 경우 혈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어도 섞임과 학습을 통해 통일될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작금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상이한 남한과 북한의 주민들이 하나의 민족, 즉 단일민족을 구성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질성에 집착해 단일민족론을 부정하는 견해와 역사성과 통일론에 무게를 두어 단일민족론을 주장하는 견해가 맞서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민족문제에 이어 민족주의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역시 첫째 화두는 개념문제입니다. 민족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개념문제에서도 기본적인 시각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착안점부터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를 뭐라고 정의하느냐 하면, 민족주의라는 것은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표현들은 좀 다를 수 있으나, 기본내용은 아마 이러한 것일 겁니다. 개념에서서의 요체는 민족국가 건설입니다.

이런 견해는 민족주의를 너무 권력지향적인 쪽으로만 몰고 가면서 그 역사적 보편가치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 건설 같은 권력지향적인 면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부라거나 위주라는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봅니다. 제가 먼저 번 강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민족주의라는 것은 민족의 공동연대의식이나 수호의지, 발전지향성 같은 이념과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민족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보편가치인 것입니다. 어떤 한시적인 시류(時流) 따위가 결코 아닙니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 출현문제입니다. 민족의 출현문제에서의 차이만큼이나 이 문제에서의 시각차도 큽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죠. 사실 민족문제나 그에 수반되는 민족주의문제는 이웃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그 논의가 시들어가고 있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민족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논의의 무의미성이나 무효성을 주장하지만, 민족의 통일과 관련되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각한 논의의 대상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민족주의 출현이나 그 발현 등에 관해서 글도 쓰고 언급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그들은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19세기 말 내지는 20세기 초부터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의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눕니다. 그 분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까지 3단계나 4단계, 5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출현 시기를 근현대로 보고, 민족주의를 민족국가 건설과 결부시켜 보다나니 이런 분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긴 역사적 안목에서 그 출현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에서의 세 번째 화두는 민족주의의 유형화문제입니다. 가위 난무한다고나 할까, 각양각색의 민족주의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논자들마다 무슨 민족주의니, 무슨 민족주의니 하고 이러저러한 논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시민적 민족주의니 종족적 민족주의니, 저항적 민족주의니 하는 따위입니다. 간명하게 설명하자면, 시민적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유행한 프랑스식, 영국식 민족주의고, 종족적 민족주의는 독일식, 일본식 민족주의며, 저항적 민족주의는 우리나라와 같은 제3세계에서의 반외세의 민족주의라는 겁니다. 내재적 구조를 갖춘 민족주의를 이렇게 교조적으로 단순하게 유형화한다는 것은 일종의 편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밖에 무슨 열린 민족주의니, 배타적 민족주의니 하는 등 오만가지 민족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무지나 오해, 남용이나 악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독일식이나 일본식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우월주의 같은 민족주의에 대한 악용에서 결과된 것이죠. 민족을 지켜내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저항할 때는 저항하고, 시민성을 발휘해 공동의식이나 동질성을 강화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하죠. 그래서 민족주의를 두부모 자르듯 교조적으로 딱 나누어 놓을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서 활용하게 되는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밝혀두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에는 무슨 열린 민족주의니, 배타적 민족주의니 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민족을 배척할 때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배타주의입니다. 그것은 이미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민족주의, 본연으로서의 민족주의는 절대로 배타적이 아니고 열려있으며 남과 어울리고 남의 것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란 본래가 민족의 발전을 지향하는 이념으로서, 그러자면 닫혀있어서는 안되고 열려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논의의 대상으로 부각된 주제는 민족주의의 전망문제입니다. 의아스러운 것은 민족 없는 민족주의 논란이 버젓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은 ‘허상’이요 하면서도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가당착적인 강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서인지 이런 주장자들은 민족주의의 실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힘에 겁을 집어먹는 성싶습니다.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그들은 민족의 해체와 민족주의 폐기를 집요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을 완화시키면서 종당에는 해체하고 폐기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그네들의 환상적 욕망과는 달리 민족이 있는 한 민족주의는 남아서 제 본연의 기능을 다 할 것입니다. 민족의 해체나 민족주의 폐기는 역사발전의 필연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지, 절대로 인간의 주관적 욕망에 의해 좌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른바 민족해체론이 내포한 부당성과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민족주의란 하나의 한시적인 시류가 아닙니다. 흔히 민족주의가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잘 살게 하려는 의지를 갖고 애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람들입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존재하는 한 생성되고 온존되는 태생적인, 그래서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하나의 이념이며 생활모습입니다, 절대로 무슨 우연한 발작이거나 불필요한 기우가 아닙니다. 민족주의란 오랜 역사과정에서 순기능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면 감정이고, 의식이라면 의식이고, 이념이라면 이념이고 또한 사상이라면 사상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부당한 논의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무지와 오해, 남용과 악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민족주의는 어떤 한시적인 시류가 아니라, 역사적인 보편가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시대정신에 알맞게 함양시켜야 할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주의문제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우리에게는 더더욱 절박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함께 지혜를 모아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제로 몇 가지 측면에서 논의의 화두를 던져 봤습니다.

네 번째 사례, ‘조선은 열린 나라’

 

 

 

이날 강연은 자리를 꽉 채운 수강생들의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두 시간 넘게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강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네 번째로 ‘조선은 열린 나라’라는 사례를 들어 ‘세계를 향한 열림’이란 오늘의 강의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열린 나라였습니다. 조선을 ‘쇄국’이라든가, 폐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조선은 고구려의 역사전통을 이어받은 열린 나라였습니다. 조선은 당대의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오랜 기간 안정된 국가체제를 유지하지 않습니까. 조선조는 519년이란 긴 세월을 지탱했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각 조대의 수명은 남달리 깁니다. 고구려부터 조선시대까지의 5개 조대의 평균수명은 578년입니다. 제일 짧다고 하는 고려조도 475년간이나 되거든. 같은 기간에 중국은 8개 조대인데, 그 평균수명은 고작 203년입니다. 우리의 절반도 안 되죠.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우리 민족사가 그만큼의 안정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한 조대가 그렇게 오래 존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론 역으로 말하면 수구성이 강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한 민족의 생명력이고 지구력이며 저력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조선을 쇄국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질 않지요. 조선은 고려의 역사 전통을 그대로 이어옵니다. 그래서 조선조 초기부터도 상당히 개방적이고 외국과 교류도 많이 합니다, 중국 명나라와는 전통적인 사대교린관계를 계속하고, 이웃한 여진과도 활발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특히 말씀드릴 것은 일본과의 관계입니다. 일본은 역대로 우리를 많이 괴롭혀 온 이웃이었지요.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인 도도한 정책을 씁니다. 한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가령 세종 때만 해도, 조선조 초기죠, 매해 200여 척의 배가 오고, 5,500명의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내왕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동래와 울산 등 포구를 16세기 전반 중종 때까지 일본인들에게 열어놓고 거주를 허용합니다. 그 뿐만 아니죠. 일본인들의 내왕무역을 허용하는 조약까지 체결하고, 일본에 통신사도 보냅니다.

강의 요지에 보면, ‘조선인은 선량하고 외방인에 너그럽다’라는 말이 있을 겁니다. 최근에 알아낸 자료입니다. 베질 홀이라는 영국 함장에 관한 얘깁니다. 그는 1816년, 최초로 우리나라 서해안을 탐사합니다. 서해안의 백령도에서 장항만, 신안해협을 걸쳐 제주도까지 열흘 동안 쭉 탐사합니다. 2년 후에 동인도회사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합니다.

아프리카 남단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우연히 대서양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라는 조그마한 섬에 도착합니다. 당시 그 섬엔 나폴레옹이 유배되어 있었거든. 나폴레옹은 베질 홀 아버지의 후배입니다. 유배 중인 나폴레옹에게 베질 홀은 조선에 왔다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조선에 가보니까 낯선 이방인인데도 사람들은 상당히 다정하게 대해주며, 같이 술도 마시면서 즐겁게 보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조선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사람들은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몹시 의아해 하면서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처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보리라”라고 화답합니다. 조선에 찾아가보는 것, 그것이 나폴레옹의 유언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생각되는 바가 없지 않죠.

마지막으로 ‘닫힌 일본’에 관해 좀 언급하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이 무슨 엄청난 ‘쇄국’을 한 것처럼 비쳐지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일본에 비하면 ‘새발에 피’라고나 할까. 일본은 무려 241년 동안이나 도꾸가와 막부가 아주 지독한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그 핵심은 기독교 금지와 막부의 무역독점입니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기해 개방을 했지만,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명치유신 이전 에또 시대 264년간, 처음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향해 개방합니다. 개방하다가 기독교 신자가 70만명으로 늘어나자 겁을 먹고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고 스페인과는 국교를 단절합니다.

진짜 쇄국은 일본이 했어요. 우린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본은 지독한 쇄국을 했기 때문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우리보다 한발 뒤늦었습니다. 흔히들 일본이 시종 대단히 앞서서 동아시아 문명을 이끈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명치유신 이후는 그런 면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이전 쇄국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문물 받아들이는 데서 우리보다는 한발 늦었습니다.

이 그림은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설명을 위해 준비한 영상물들입니다. 다음, 이것은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입니다. 며칠 전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우리는 보무당당하게 13번이나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 선진문물을 전해줍니다.

그 다음으로, 이것이 일본보다 우리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서 앞섰다는 증거물입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라는 세계지도입니다. 여러분, 아마 처음 보실 겁니다. 1402년에 그린 세계지도입니다. 몇 년 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출판한 『지도학의 역사』라는 책의 표지에 앉혀진 세계지도입니다. 왜 그렇게 앉혀졌겠습니까?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도에 관해서는 다음 강의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390년 이후에야 중국에서 마테오리치라는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지도」지도란 세계지도를 그대로 본떠다 내놓습니다. 역법에서도 조선보다 무려 250년이나 뒤져서야 새 역법을 만들어냅니다. 그만큼 일본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서 우리보다 늦었습니다. 오늘 제2강은 여기까지로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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