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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고싶어도 '자수서' 쓰곤 안가

감정으로 일본 대하면 또 당할 수도"

[단독인터뷰 ①] 팔순의 노 망명객,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박철현 기자   

 

▲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올해 팔순을 맞은 정 선생은 34년째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박철현 기자

대표적인 재일 통일운동가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노 망명객 정경모 선생. 지난 89년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주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마이뉴스>는 작년 가을부터 정 선생과의 인터뷰를 추진해 왔다.

일본에서 본 북-일관계, 우경화로 급선회하는 고이즈미 내각, 한반도 통일방안 등에 대해 정 선생의 생각을 들어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마침 그 무렵 한국정부의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건이 터졌으며, 이후 송두율 교수에 대한 정부의 태도 등 악재가 겹쳐 인터뷰가 일단 연기되었다.

게다가 올해로 81세 고령인 선생의 건강악화로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무리라는 판단으로 인해 인터뷰는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던중 이달초 선생이 <주간 오마이뉴스>에 실린 한 기사를 읽은 것을 계기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직접 걸어와 마침내 선생과 마주 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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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왜 고향땅에 안 가보고 싶겠나?" 한국정부에 서운함 내비쳐

어렵게 성사된 정 선생과의 인터뷰는 지난 4월 3일 선생이 거주하고 있는 요코하마 히요시의 한 커피숍에서 약 2시간동안 진행됐다. 인터뷰에서 선생은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때 자신은 왜 참가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속사정을 비롯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일본어로 번역했을 당시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의 에피소드 등 그간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솔직하게 털어놨다.

선생은 또 "일본정부의 우경화는 고이즈미 총리 개인의 성향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며 "역사적 흐름속에서 봐야할 것"을 주장하면서 놀라우리만큼 일관되고 완결된 근거를 제시하였다.

덧붙여 선생은 "20세기 초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과 미국과의 커넥션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한국사람들은 정보면에서 부족하고, 또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감정만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데, 이러면 오래되지 않은 장래에 또 큰일 당한다"며 일본에 경계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조차 파악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일 방위청 군사작전 '미쓰야(三矢)작전'과 패전 이후 1급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이 가지는 연관성, 60년 '안보투쟁'의 암초를 만나 일시 퇴장한 것 처럼 보였던 일본내 친미 우익의 생명력 등에 대해 선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선생은 은연중에 한국정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특히 "나라고 왜 고향땅에 안 가보고 싶겠나..."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서 선생의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선생께 마지막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기자는 솔직히 망명객 생활에 대한 한스러움이나 과거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정 선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현대사 공부를 더 많이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커밍스 만나 민족의식 눈떠...<찢겨진 산하> 운동권 필독서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은 누구?

1924년 서울 출생. 경기중학 졸업후 1945년 일본 게이오 대학 의학부 예과를 수료한 후 도미. 1950년 미국 에모리 대학 문리과대학을 졸업한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애국의 일념에서 미국군에 지원입대, 당시 맥아더사령부에서 통역요원으로 지내면서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과 친분을 쌓았다.

휴전 이후에도 유엔군 군사정전위원회 소속으로 56년까지 활동했으나 미군의 침략성과 차별에 분노하며 정전위원회직을 사퇴했다. 한국정부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던중 이승만 정권의 친미. 반민족성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그만둔 후 이후 미국서 10년간 생활하면서 브루스 커밍스등과 교분을 쌓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통해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73년 『민족시보』 주필을 역임했으며, 이 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세카이> 9월호에 기고한 그의 글을 통해 그때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없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1980년 '씨알의 힘'이라는 사숙을 열어 남북통일의 이론적 틀을 제공함을 물론, 재일조선인 문제에도 천착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표적인 통일운동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그의 주장 및 이론은 잡지 '씨알의 힘'(씨알의 힘 발간. 1~9호)에도 실렸는데, 6호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오리지널판)은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 등이 사망 후 천상에서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희곡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찢겨진 산하>는 80년대 중반 해적판으로 국내에 역수입돼 당시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서로 『어느 한국인의 생각』 『일본인과 한국인』 『한국민중과 일본』 『기로에 선 한국』 『찢겨진 산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등이 있으며, 역서로 『한국전쟁의 기원』등이 있다.

정 선생은 올해로 망명생활 34년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현재는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처와 2남이 있으며, 차남 아영은 '제주 4.3 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의 사무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 박철현 기자

다음은 정경모 선생과의 일문일답.

- <주간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읽으시고, 인터뷰를 허락해 주셨는데요. 어떤 기사인지 궁금합니다.
"작년에 실린 건데, 8.15 특집 비슷하게 실린 기사중에 '미군 환영하러 갔다가 쓰러졌지요...'(아래 관련기사 참조)라는 기사가 있어요. 그 안에 당시 미군의 경비를 맡았던 일본경찰이 발포한 것이 정당하다고 미군이 일본측 손을 들어줬는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두 사람의 이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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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후손들이 그때 살해당한 두 분을 독립유공자로 대우해 주길 정부에 요구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두 사람이 사실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사람이거든요. 그 기사에는 그냥 노조위원장, 보안대원 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전 이 사건이 아주 상징적이라고 봅니다. 그 두 사람의 살해에 미국과 일본이 동시에 개입했다는 것. 피해자들이 좌우합작을 추진한 건준 소속으로 미군환영차 미군 함정이 들어온 인천으로 들어간 첫 날 일본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죠."

ⓒ2004 박철현 기자

- 그런데, 이름이 밝혀졌다는 것이 어떤 중요한 의미라도 있습니까?
"그건 제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 책 안에 저 사건이 등장해요.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도 이름을 모르는지 명시하지 않았더군요. 저도 번역을 하면서 누굴까 하면서 계속 자료를 찾았는데, 건준 소속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도저히 이름이 나오지 않더군요. 이름이 나와야 다른 정보나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보다 깊이있게 다룰 수가 있으니까..."
-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의 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필독서로 꼽히기도 합니다만, 직접 번역을 해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처음 그 책을 접하고 놀란 것은 이 양반이 너무나 적확하게 해방당시 한국사회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총체적 사고라고 할까요? 지금 한국 미국 가릴 것없이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1950년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새벽에 총을 한방 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구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커밍스의 관점은 그게 아니예요."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커밍스는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1945년 9월 8일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이지요. 아까 말한 두 명의 한국인 두 사람이 사살당한 날.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부터 다루기 시작해 1947년에 끝이 납니다.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날이 1948년 6월이고, 실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인데, 이 책은 1947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가게 돼 있다고 판단한 셈이지요. 말 그대로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 커밍스 교수가 일전에 일본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세계 약 50여개 국에서 번역되었지만, 그중에 정경모가 번역한 것이 가장 충실하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글쎄요. 그 양반이 일부러 한 말 같기도 하고(웃음). 어느 번역자나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그 책을 번역할 때 최대한 충실하자는 생각을 했죠. 이를테면 각주나, 주석같은 것도 전부 번역하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책이 세 군데 출판사에서 나왔더군요. 저도 지인한테 받아서 다 읽어 보았는데, 주석이 많이 빠져있었습니다. 이 책은 주석이 참 중요한데.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 <한국전쟁의 기원> 뿐 아니라, 80년대 중반 운동권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던 <찢겨진 산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를 집필하시기도 하셨지요?
"아, 그건 원래는 일본어로 쓴건데, 일본어 좀 하는 친구들이 그걸 번역해서 해적판으로 만들어 돌렸나 봐요. 저자의 허락도 없이(웃음). <찢겨진 산하> 같은 경우엔 지금은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내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다고 하던데, 원래는 한 10년전 쯤에 나올 수도 있었어요"

- 저도 읽어보았습니다만, 94년 당시 나와도 전혀 문제가 없을듯 해 보였는데요.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문민정부 당시였고 또 사회과학서적들도 대부분 해금조치가 내려졌지 않았습니까?
"제 개인적인 것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94년 1월, 그러니까 닷새 전에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때 문 목사가 전화로 '그전에 쓴 이거(<찢겨진 산하>)를 정 선생이 직접 우리말로 재번역 해서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해서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당시 문 목사가 범민련 그만두고 나와서 만든 '통일맞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첫번째 프로젝트로 하려고 했던 게 바로 이거 재번역이라 그러더군요. 내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하고... 뭐 그런식으로. 그런데, 그렇게 전화하고 5일만에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요."

- 문 목사님과의 마지막 통화셨군요. 선생님 결혼식 때 문 목사님께서 30대 초반 나이에 주례를 섰다면서요.
"하도 오래전 이야기라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1951년에 제가 결혼을 했는데, 이 때 문 목사와 같이 GHQ(맥아더사령부)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었어요. 아무튼 그때 문 목사가 주례를 섰고, 그래서 결혼했지요. 문 목사가 나보다 6살이 많으니까 형인 셈이지요. 사람들은 30대 초반이 주례를 서는 것 가지고 좀 웃기도 했는데, 뭐 목사니까 충분히 주례 설 자격은 있죠. 그 때 결혼해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이쪽에서 살고 있습니다."

- 망명생활은 70년도부터 시작하셨으니 벌써 34년에 걸친 오랜 세월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나? 일본에 정착한 게 72년이고 73년부터 <민족시보> 주필을 했었으니까, 일본에서만 32년 망명생활을 한 셈이네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게 73년 9월호 <세카이(世界)>에 실린 '한국의 제 2의 해방과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글인 것 같은데, 9월호가 서점에 깔린 날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어요. 그것 때문에 <세카이>가 한 100만부 정도나 팔렸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김대중씨는 그렇게 유명인사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잘 몰랐는데 그 기사 속에 포함돼 있어서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됐죠."

- 지난해 가을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때 선생님 이름도 거론됐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옛날에 문 목사하고 같이 활동했던 박형규 목사가 그때 전화를 해왔더군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데서 연락을 받았는데 들어와도 된다고 하면서 영사관으로 여권을 받으러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영사관으로 갔는데, 아, 글쎄 영사관에서는 내가 방북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마치 스파이 취급을 하더군요. 즉 그러니까 날더러 자수하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그걸 자인해 버리면 지금까지 해 온게 뭐가 되나요? 그리고 그건 또 내 개인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예요. 89년 문 목사와 같이 방북한 것에 대해 내가 '자수서'를 써버린다면, 문 목사가 일생동안 목숨바쳐가며 해온 것까지 내가 전부 부인해버리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 작년에 모처럼의 고국방문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만 현재 송두율 교수의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선생님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 나이가 80이 넘었어요. 나도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지요. 거기 내 이름자 석자 쓰고 나만 가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신념이나 철학은 물론 문 목사와의 관계 등 도의적인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거절했어요.

그리고 망명이라는 것은 본국에서 쫓겨났다는, 그러니까 법적으로 본국의 아무런 혜택과 보장을 못 받는다는 말인데 독일국적을 가지고 있는 송두율 교수의 경우는 좀 틀리지요. 참고로 윤이상 선생 같은 경우엔 독일관리가 직접 공항까지 나와서 국적을 주었습니다. 나라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아마 독일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은 국적을 가지고 민족운동하는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송 교수도 독일국적을 가지고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죠. 그런데 사실 내가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일본국적 가지고 민족운동을 한다고 그러면 그게 말이 안되잖아요"

- 송두율 교수의 7년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재판할 일입니까? 게다가 7년씩이나 형을 때리고... 아주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짓입니까?"

ⓒ 2007 OhmyNews      2004-04-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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