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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의 여름 나기

2007.8.7

  창비주간논평  송재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짜증스러운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물리적인 더위도 견디기 힘든데 금년 여름엔 마음의 더위 또한 만만치 않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른바 범여권의 20여명이나 되는 인사들이 벌이는 '여름리그'와, 한나라당의 '빅2'가 벌이는 이전투구식 폭로전이 이 여름의 더위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하고 있다. 이랜드와 쎄브란스병원 노조의 파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말할 수 없이 덥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요즘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들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봉사와 선교, 미국과 테러리스트,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그래서 잠시 더위를 식힐 겸해서 옛 선비들의 여름 나기를 엿보기로 하자.

1549년의 어느 여름날,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은 경상남도에 있는 감악산 속 시내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목욕만한 것이 없었을 터이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남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사십년 쌓여온 온몸의 허물을
맑은 못의 천섬 물로 다 씻어버리리
혹시나 오장에 티끌이 남았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천인벽립(千?壁立)의 기상을 가졌다는 남명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섬뜩한 시이다. 남명은 평소에도 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여름도 서늘하지 않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753년을 전후한 어느 여름날, 중국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안휘성(安徽省)의 산속에 있었다. 25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인 촉땅을 떠나 중원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42세가 되어서야 장안에서 조그마한 벼슬을 얻었는데, 그것도 잠깐, 당시의 실력자인 고력사(高力士)와 양귀비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서는 다시 천하를 주유하던 중 이 산중으로 들어와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여름날 산속에서(夏日山中)」라는 시를 썼다.

흰 깃털 부채를 흔들기도 귀찮아
푸른 숲 속에서 웃통을 벗고
두건마저 벗어서 바위에 걸어두니
드러낸 이마를 솔바람이 씻어내네


인간과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며 거리낌 없이 행동했던 그에게 웃통과 두건을 벗어던지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웃통과 두건을 벗어던진 것은 물론 더위 때문이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속박하는 세상의 모든 질곡을 내던지는 시원함도 만끽했을 것이다. 이백은 이렇게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이백이 산속에서 여름을 보냈다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더위를 피해 산을 떠나 도시로 나와 있었다. 연암은 35세 되던 해인 1771년 무렵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골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수시로 이곳과 서울을 오갔는데 1772년경에 쓴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서 그해의 여름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의 가족은 광릉(연암의 처가가 있는 곳―인용자)에 있었다. 나는 평소에 몸집이 비대해 더위를 못 견디는데다, 초목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모기가 많고 논에는 개구리가 밤낮 쉬지 않고 울어대는 게 괴로워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늘 서울 집에서 더위를 피했다. 서울 집은 몹시 좁기는 하나 모기나 개구리, 초목의 괴로움이 없었다.

남들이 더위를 피해 산속으로 가는 것과는 달리 연암은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좁은 서울 집에서 무엇으로 소일했던가? "갈수록 게으름에 익숙해져서 경조사도 폐하고 혹 며칠씩 세수도 않고 혹 열흘간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막 배운 양금(洋琴)을 타기도 하고, 어쩌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마시고 취하기도 하면서 여름을 난다고 했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고 몸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하자는 대로 유유자적하게 지내면서 행랑채의 상민(常民)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연암의 피서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연암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이 영글고 있었을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1804년의 어느 여름날 술을 마시고 있었다. 1804년은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그는 나라걱정, 백성걱정에 번민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면서 <여름날 술을 마시며(夏日對酒)>라는 1060자에 달하는 장편(長篇) 시를 썼다. 다산은 이 시에서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폐단, 불합리한 신분제도와 과거제도 등 이조 후기의 모순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있다.

시의 중간 중간에
"생각하면 가슴속이 끓어오르네 / 술이나 들이켜고 진(眞)으로 돌아가리" "두어라 말아라 술이나 마시자 / 백병 술이 장차는 샘물같이 되리라" "깊이깊이 생각하니 애간장이 타들어 /  부어라 다시 또 술이나 마시자"와 같은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날 견디기 힘든 마음의 더위를 술로 달래며 이 시를 썼던 것 같다.

옛 선비들의 여름 나기를 돌이켜보며, 선비 축에 끼지도 못하면서 선비인 양하는 내 자신을 되돌아본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어중간하게 다리를 걸치고서 때로는 대책 없이 분노하기도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 여름이 가고 찬바람이라도 불면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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