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 비전향 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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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한쪽 땅에 말살된 남편의 존재를 되살리는 길

[서평] <이여자, 이숙의>를 읽고서

2007-08-19 08:39

OhmyNews    권성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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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상인

20세기를 통틀어 1억5천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과 국가 지도자들의 명령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광기 어린 히틀러의 나치즘 속에서, 전쟁의 좌우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허울 좋은 명분 속에서, 한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그들만 죽임을 당했는가? 산술적으로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가 1억5천만 명이지만 그들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은 버젓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단의 아픔 속에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듯, 삶의 끈을 놓은 채 가슴앓이하며 평생을 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분단의 현실과 아픔이 낳은 <이여자, 이숙의>란 책도 그렇다. 이는 우리나라의 남과 북, 전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남편을 향한 한 여인의 사모곡이자, 분단의 현실 속에서 말살된 남편의 존재를 다시금 이 땅에 살려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글이요, 40여 년의 세월 동안 숱한 가슴앓이와 협박 속에서도 오직 후학들을 위한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 한 선생님의 자랑스런 교단일지이기도 하다.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추구하면서 진실 되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신념과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목숨이 일각에 달렸을 때는 묵묵히 그 고통을 삼켰고, 교직 생활 시절에는 그저 아이들을 위해 지성과 사랑을 쏟았다." (262쪽)

실로 그랬다. 교단생활에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그녀는 해방과 더불어 좌익대표의 연설자로 나선 박종근과 함께 1947년 6월 10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3일, 남편 박종근은 공부를 더하고자 월북했고, 1948년 4월엔 딸이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951년엔 남편 박종근이 태백산맥의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한다는 소식과 함께, 1952년 3월에는 그의 사망 소식까지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월북 때까지도 남편이 하는 일이 다만 나라를 바로 살리기 위한 정치에 몰두하는 일인 줄만 알았을 뿐이다. 설령 그것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틀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그 자체가 남한 사회에 참된 정의와 평등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코 남편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편의 사망 이후 그녀는 1953년 9월 10일에 의성 남부초등학교 교사에 복직하게 된다. 달랑 딸 하나를 낳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남편을 애타하면서도 그녀는 오직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어쩌면 그것만이 남편과 사별한 그 아픔을 달래는 최후의 길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때 간첩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수감된다. 그야말로 그녀의 목숨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평소에 쌓은 덕과 신뢰를 바탕으로 곳곳의 지인들이 나서서 그녀를 탄원해 주었고, 급기야 얼마 되지 복직하게 되었고, 학생들을 향한 애정 어린 교육 덕택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장학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하지만 남편의 사망신고와 아울러 교단의 이전투구로 인한 갈등 때문에, 그리고 끊임없는 국가 체제의 감시 때문에 결국 그녀는 1977년 사표를 제출하고 딸과 사위가 있는 서독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손자와 손녀를 키우는데 못다 한 사랑을 베풀었고, 그곳의 2세들을 위한 '한글 교실'도 열어 우리말을 가르치는데 열심을 다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훗날 해방 50주년을 맞이해, 그녀는 1995년 12월 평양에 초청을 받아 남편 박종근의 열사증과 국기 훈장, 영웅칭호 수여증, 그리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곳에서는 값진 유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눈물과 분노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남한 땅에서조차 참된 보상책이 될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설령 분단의 한쪽 땅에서 말살된 남편의 존재가 다시금 자랑스럽게 회생했다고 한들, 그것이 이쪽 땅에서까지 참되고 값진 유산으로 남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반백 년의 세월이 더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참된 원상회복은 통일 후 역사적 통합과 화해 속에서만 진정으로 이룰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만이 참된 보상책을 여는 지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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