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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이 종이장 앞뒤”

<인터뷰> ‘이 여자, 이숙의’의 딸 박소은

2007년 09월 04일 (화) 17:26:33

  김치관 기자

 

 

 

 

8월 25일과 9월 1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혁명가의 아내 이숙의 여사의 자서전 '이 여자, 이숙의'의 출판기념식을 앞두고 딸 박소은(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씨를 만났다.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여기 한권의 소설보다, 한편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한 여인의 삶이 있다.

이숙의(1926-2000). 신혼 6개월만에 남편과 생이별한 후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하다 숨졌다는 소식이 들리는 남편 박종근을 평생 그리워하고 원망하며 살아야 했던 혁명가의 아내.

그러나 그녀는 가슴 속 깊은 아픔을 품은 채 유복자나 다름없는 한 점 혈육 딸 소은을 키우며 교육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현실은 그녀에게 여전히 형무소행이 기다리고 있고,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의 광기어린 교육정책이 옥죄어 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1977년 딸 소은 부부가 살고 있는 독일로 떠나게 된다.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그녀의 삶은 절절한 남편에 대한 애정과 회한, 삶에 대한 굳센 의지와 남다른 열정 등으로 인해 특별한 것으로 기억되고 한편의 소설로 끝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여기까지가 다가 아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기다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빨치산 대장을 하면서도 집에는 연락 한번 주지 않고 사라진 남편에 대해 마음속 깊이 서운함과 의문을 품어오던 그녀.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월간 말’지에 인터뷰를 하면서 이같은 사정이 알려져 결국 북측의 초청으로 방북하게 된다. 그녀는 혁명열사릉 묘역에 시신도 없이 모셔진 ‘경상북도 도당위원장 박종근’을 47년에 헤어진 이래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정작 클라이막스는 또 남아 있다. 2000년 잠시 귀국한 그녀에게 비전향 장기수 김익진 선생과의 뜻밖의 만남은 남편에 대한 일생일대의 의문과 원망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바로 그날 그녀는 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익진 선생 역시 6.15공동선언에 따라 며칠 후 바로 북으로 송환된다.

따라서 이숙의 여사의 자서전 ‘이 여자, 이숙의’(삼인, 2007))는 김익진 선생의 일대기를 북에서 소설화한 ‘의리’(문학예술출판사, 2002)를 추가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김익진 선생은 이숙의의 남편 박종근 위원장의 연락책으로서 이숙의 부녀를 북으로 데려오라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필생의 업으로 알고 실행하고자 했으나 30년 세월을 모진 고난 속에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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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의 여사와 김익진 선생의 극적인 만남과 이 여사의 운명, 김 선생의 북송은 딸 박소은에 의해 기록되고 박소은 씨는 2003년 평양에서 다시 김익진 선생과 해후하게 된다.

‘이 여자, 이숙의’와 ‘의리’는 어떤 소설과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한 혁명가 아내의 극적인 삶을, 아니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희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삼인출판사는 이숙의 여사의 자서전에 딸 박소은의 글을 추가한 ‘이 여자, 이숙의’ 출판기념식을 오는 7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책 출간에 맞춰 고국을 찾은 박소은(59) 씨는 지난달 25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며 ‘6.15공동선언 실천 유럽지역위원회’(6.15유럽위) 내부의 사정부터 거론하고 나섰다.

일전에 통일뉴스가 ‘6.15유럽위 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 박소은 씨의 기고글을 실은 뒤 6.15유럽위 내부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홍역을 치러야 했던 기억 탓에 “이숙의 여사의 딸로서 인터뷰에 응하되 6.15유럽위와 관련된 내용은 박 선생의 발언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직접 전하겠다”는 기자의 제안에 박 씨도 동의했다.

인터뷰는 8월 25일과 9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으며, ‘이 여자, 이숙의’에 담긴 내용은 가급적 피하고 독일 유학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중점에 두고 진행됐다.

‘이 여자, 이숙의’ 7일 연세대에서 출판기념회

 

 

 

두 차례에 걸쳐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된 이번 인터뷰는, ‘이 여자, 이숙의’에 담긴 내용은 가급적 피하고 독일 유학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중점에 두고 진행됐다.     사진은(오른쪽)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통일뉴스 : 인터뷰에 앞서 6.15유럽지역위 내부 사정이 복잡한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한 박 선생의 견해와 박 선생의 직책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달라.

■ 박소은 : 유럽지역이 복잡하다. 왜냐하면 2년 전에 결성을 했고 결성 이후 6.15평양행사를 전후해서 조직이 붕괴상태에 들어갔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2005년 6.15평양행사 참가를 위해 대표단 20여명이 북경까지 갔다가 입북을 못하고 돌아온 사태가 있었다. 돌아온 뒤 후유증으로 내부 조직이 붕괴되는 시점이 왔다. 서울 8.15 60주년 행사를 앞두고 양쪽에서 대표단을 파견하는 사태가 왔다. 그 이후에 8.15행사가 끝나고 나서 동경에서 6.15해외위 곽동의 위원장께서 유럽에 와서 붕괴가 아니라 통합이 됐다며 모임을 갖고 통합선언하는 몇 차례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성 당시 위원장이었고 현재도 6.15유럽지역위 위원장의 직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해 2005년 붕괴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8.15를 앞두고 성명서를 처음으로 발표하게 됐는데, 저희 위원장 체제를 여러 이유로 공동위장 체제로 하자고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반대했다. 기술적으로도 불법이었고, 그 방법 외에도 유럽 내부 문제점을 토론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15행사 준비를 위해서 급속하게 조직을 만들어서 서울에 와서 공인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급하게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정했고 지금도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사실 그 자체만이라면 운동과정의 분규로 해소과정이 있을 것인데 6.15해외위가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잘못 처리됐다. 2005년 7월에 결성된 분들이 박소은 체제는 없어지고 새로운 공동대표 체제로 바뀌어졌다고 발표하자 곧바로 동경 사무국이 이를 공식 유럽기구로 인정하고, 더구나 해외 ‘민족통신’에서 그대로 보도해서 국내 내지 해외에 운동하는 분들 사이에 공식화된 것으로 알려져서 저희들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장을 잃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럽위 문제의 핵심이다.

□ 그렇다면 박 선생께서는 지금도 6.15유럽위 위원장이라는 뜻인가?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장을 잃게 된 것. 이것이 유럽위 문제의 핵심이다".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그렇다. 명백히 하면 유럽은 두 개의 조직이 평행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고, 왜냐하면 일부 ‘민족통신’을 통해 국내에 일방적인 정보만 들어왔기 때문에 유럽의 상황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갔다. 왜 해외운동이 분리되느냐를 생각하면서 이런 식의 움직임이 있다면 해외운동 전체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을 글로서나 성명서로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이번에 입국하신 이유와 입국 후의 활동에 대해 소개해 달라.

■ 이번에 원래 8.15 부산행사에 참여하려고 했다. 남북해외 공동행사에 참여하려 했지만 공동행사가 무산됐다. 나는 유럽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책 출간이 방문의 주 목적이다.

그렇지만 6.15남측위에서 하는 8.15행사에도 참석했고, 오후에 진보연대가 했던 집회에도 참석했고, 가능하면 이 기회에 6.15남측위에 관여하시는 여러 분들을 만나도 뵙고 싶고 대화도 나누고 싶고, 특히 6.15해외위 문제에 대해서 국내 계신 분들과 충분한 정보교환과 생각들을 나누고 싶어서 몇 분을 만났고 앞으로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서 가능하면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다면 한번도 여행을 못해봤기 때문에 광주, 가까운 도시나 바다나 산천도 보고 여행할 욕심도 있다. 마침 책 출간에 맞춰 아이들도 두 명이 들어와 아이들 구경도 시켜주고, 운동의 모습도 보여주고 여행도 할 계획이다.

□ ‘이여자, 이숙의’ 출판 기념회가 열리게 된 배경은?

■ 이번에 귀국해서 바로 다음날 특별한 책을 출판한 것을 나름대로 기리기 위해서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애쓴 가장 가까운 분들과의 작은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신문에 기사를 통해서, 또 책을 읽은 여러분들, 특히 어머님의 잊혀졌던 제자들. 한번도 가족사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친구, 후배, 1974년부터 독일에서 운동하면서도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느냐, 공식적인 기념회를 한 차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들이 들어왔다.

동시에 2000년 어머니를 잃었을 때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함께 운동했던 민건 선후배들, 어머님이 끓여주신 밥 한끼를 먹었던 모든 유학 선후배들이 대구 장례식장까지 와주었다. 사실 그때 내가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책 출판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못다한 효뿐만 아니라 그분들에 대한 인사의 장으로 삼으로 한다. 그래서 이번 출판 기념회는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 운동하시다 귀국해있는 분들, 6.15활동을 통해서 알게 된 통일광장 어르신들, 6.15남측위 관계자들, 친구, 동기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어머니 책을 계기로 모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 출판 기념회는 어떻게 진행되나?

■ 출판 기념회는 9월 7일 금요일 오후 5시부터 8시 반까지 연세대 알렌관에서 열린다. 여러분들이 준비하고 있는데, 통일관계 원로 분들 소개도 물론 있고, 문화공연도 있다. 공연하는 사람들도 아마 어머니 책을 다 읽고 공연하기로 했다. 어머니 사진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비칠 준비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아버지, 어떤 활동가인지 두 모녀는 잘 몰랐다”

 

 

 

"아버님이 사상가, 활동가로서 대단한 인물인 줄은 알았다. 그러나 어떤 위상의 어떤 활동가인 줄은 몰랐다. 어머님도 사실은 잘 몰라 두 모녀는 잘 몰랐다".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독일에는 언제 무슨 이유로 가게 되었나?

■ 1971년 연말에 건너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간 셈이다.

□ 당시만 해도 유학길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 서울대학의 문리대 사학과를(동.서양학과와 역사과로 나뉘어지기 전에) 졸업하고 당시 공부를 더 하려면 대학원을 가거나 해외유학이 있는데, 미국은 장학금을 많이 받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다. 독일은 국립대학 제도여서 대부분 당시 미국은 부유층이, 독일 쪽은 인문사회, 즉 철학 신학이 (전공자가) 많이 갔다. 당시 유학시험제가 있어서 소위 국가가 장려하는 유학생 제도에 합격해야 외국에 내보냈다.

□ 유학 갈 때 아버지 때문에 신분상으로 지장이나 제약이 없었나?

■ 신원조회에 걸려서 당시 어머님이 교육계에 계셨으니까 당시 교육장, 국회의원 등 3명이 신원보증을 섰다. 끝까지 해결되지 않아 고생했다. 몇 차례 신원조회를 해서 몇 달이 걸렸고 차관급 이상인가의 고위 공직자 3명의 보증을 요구해서 해결했다. 해외 가서 절대로 정치운동을 하지 않을 것도 요구했다.

□ 부모님의 과거에 대해 언제 알게 됐나?

■ 사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자랐다. 어머닌 본인이 감당했던 것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분위기는 알고 있었지만 유학을 가기 전에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아버님이 사상가, 활동가로서 대단한 인물인 줄은 알았다. 그러나 어떤 위상의 어떤 활동가인 줄은 몰랐다. 어머님도 사실은 잘 몰라 두 모녀는 잘 몰랐다.

□ 사학과 출신인데도 알지 못했나?

■ 나는 동양사를 주로 전공했고, 1945년 이전 중국혁명 전까지만 공부했다. 해방사나 현대사에 접근할 상황이 아니었다. 유신독재였기 때문에 현대사가 많이 부족했다. 어머니가 짐작하는 무게는 알고 있었지만 자료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 유학 중에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나?

■ 뮌헨대학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외국이니까 서양사를 해볼까 했는데 서양사람들이 빈틈없이 다 해놓아 손을 못 대겠더라. 중국 5.4운동 쪽에 한국에서 해보지 못했던 혁명이후 것을 유럽에 와서 할 수 있다는 짐작이 있었다.

1970년대 초는 68학생운동이 종결은 되었지만 불씨가 아직 훈훈하게 남아있었다. 나와 남편이 찾아간 마부르크대학이 좌파진영의 아성이었다. 대다수 교수들이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대학이 상당히 궁금했고, 중국사를 맑스-레닌주의 시각에서 했기 때문에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45년 이후는 혁명이니까 접근을 못했는데, 중국사 속에서 45년 이후는 다루기는 했지만 맑스-레닌주의로는 거의 접근을 못했다.

서양이지만 여기서 동양사를 할 수 있겠구나, 확인이 됐다. 사회주의 문제, 중국혁명 이후 사회경제사, 그 당시 대학은 소위 말하는 맑스-레닌주의적인 동독의 교육제도를 많이 따왔다. 철학, 정치학, 사회학을 합쳐서 정치경제학은 물론이고,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는 학문을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했다. 사실은 역사학을 포기하는 길을 갔다. 역사학 보다는 생생한 사회주의 이론을 가지고 중국사를 접근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처음으로 배운 셈이다.

유학 후 74년 ‘민건’ 막내로 동참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남편은 독일 유학 중에 만났나?

■ 남편 이경택은 유학을 가자마자 만났다. 그 집은 오래된 해외통일운동가의 집이다. 시아버님 이영빈 목사는 50년대 중반쯤 한국전쟁 끝나고 신학을 공부하러 오셨다. 박순경 선생과 동창이다. 독일 쪽 칼 바르트 신학자 학파 쪽으로 공부하다가 일찍 독일로 유학 왔다. 남편이 맏이인데 12살 초등학교만 마치고 독일로 왔다. 독일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막 대학을 들어와서 정치학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 당시 대학원 유학을 갔는데 남편은 대학을 막 들어갔다는 말인가?

■ 나보다 3살 어렸다.

□ 잠깐 언급했지만 시댁이 유명한 민주화운동 가족인 것으로 아는데.

■ 남편은 같은 대학 다니면서 알게 됐지만 결혼보다도 먼저 1974년에 독일에서 최초의 조직적인 해외운동을 여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결성하게 되면서 시댁 가족들과 관계가 맺어지게 됐다. 시아버님은 뮌헨대학 교목이라는 자격으로 있어서 윤이상 선생 등과 함께 연장자 그룹을 형성했고 나머지 유학생들, 종교인들, 노동자들, 간호사들이 합쳐서 결성하게 됐다. 유학을 갔기 때문에 남편과 내가 가장 어린 나이로 동참하게 됐다.

1974년 3월 1일 기미독립 55주년이다. 결성을 주도한 사람이 55인의 서명을 하자, 그 당시에는 이름을 내지 않으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서명을 모았다. 기미 55주년 정오에 당시 서독 수도 본에서 반유신.반독재 조직을 해외에서 처음으로 띄웠다. 시부모님하고는 해외에서 민주화운동 반독재 대열에서 만남 셈이다. 76년에 결혼했다.

□ 어머니 이숙의 여사는 언제 독일로 왔나?

■ 큰 애 낳았을 때 오셨으니까. 1977년이다.

□ 늦췄던 결혼식은 어떻게 치렀나?

■ 결혼이라는 형식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동지적으로 만났고, 같이 민건에 참여한 선배들이 왔다.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결혼식이 간소하다.

□ 독일에서의 정착을 생각했나?

■ 얼마나 장기화될지 몰랐지만 반정부 운동 가담 그 게 문제가 됐다. 어머님이 또다시 조사받고, 자식들이 해외 나가서 더구나 서독은 대단히 공안당국 주목대상이 되면 번거로운데 어머닌 상당히 불안했다. 해외에서 딸 사위를 통해 또다시 과거가 반복될까 걱정했다.

당시 어머니는 직장혐오증도 생기고 교직 쪽에 청와대나 교육부의 모순된 지침이 내려왔고, 나마저 잃을까 인간적인 불안감으로 오셨다.

오랜 세월을 독일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가 무너지면 다들 귀국한다고 생각했지 전두환 독재가 다시 들어서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혁명가의 아내이자 교육자, 그리고 어머니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독일에서 어머니와는 어떻게 지냈나?

■ 이 책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어머님 인생에 대해서 딸의 입장이 아닌 데서 훑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어머니 인생은 크게 세 덩어리인데, 혁명가의 아내가 가장 중심축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교육자로서의 본인의 삶, 성취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혁명가의 아내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그 부분까지만 써있고.

이번 책을 내는 계기에 ‘교육단상’을 추가하게 됐다. 많은 제자들이나 일반사회에서는 교육자로 알지 혁명가의 아내는 가족내부의 문제였다.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독일에서 짧지 않은 세월에 저희 아이들을 통해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되시면서 어머니로, 모성으로 돌아오는 기간이 독일 생활이었다.

□ 이전에도 딸로서 어머니를 봐왔을 텐데 독일에 와서 새삼 모성을 느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 나는 주로 외가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너무 바쁘셔서 밖으로 표현하거나 할 시간적인 여유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독일에서의 나와 손주들과 처음으로 제대로 한 가정생활을 아주 좋아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져 영원히 여기서 사느냐 불안해하시기도 했다.

독일 생활이 손자손녀와 가족이라는 것, 모성이라는 것에서 좋은 생활이었지만 늘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엄청난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2000년 잠시 귀국해 여기서 떠나신 것이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어린 시절이 기억나나?

■ 사실 어머니가 책을 2000년에 내시려다 세상 떠나시고, 어머님이 보는 시각과 다른 나의 시작에서 어머님의 상을 보충해보는 글을 써보고도 싶었지만 못했다.

어머니가 간첩사건에 연류돼 서대문경찰서 가는 것이 엄청난 폐허 같은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1959년 10살 정도 상당히 어렸던 땐데, 기억에 외갓집에 갔다가 갑자기 집으로 가야 했다. 대구 집으로 갔더니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던 광경이 아주 다른 장면으로 다가왔다. 평생 잊지 못한다. 지금 엄마가 잠시 없다고만 생각했지 이해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정확하게 이해 못했다. 어렸기 때문에.

대구지역 전 교육계, 교장 선생님들이 서명 구명운동을 했다. 움직임에 대한 소음,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사건은 이해 못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님을 잃으면 살 수 없다는 불안한 강박관념에서 어려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10살까지만 살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기억 안 나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책에 적어 두셨다.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지?

■ 어머님을 혁명가의 아내, 교육자, 어머니와 할머니로서의 모성, 이 3가지를 보아야 한다. 혁명가 아내로서 만은 너무 부족해 출판사와 많이 토론했지만 어떤 책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 책에서는 혁명가의 아내 중심으로 했고, 교단생활이 조금 나왔다. 모성이나 이런 부분은 많이 언급 안 됐다. 어머니는 본인에 대한 자기 확신, 운동한다면 사상의 확신일 텐데, 아버님과 달랐다면 사상의 확신으로 목숨까지 바친, 정치나 사상의 형태가 아니었지만 본인이 옳다고 하면 열정과 정의에 대한 확신과 진정성이 있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결혼도 누가 봐도 무모한 조건에서 강행했고 교사직에서도 열성을 아낌없이 발휘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주관적으로 삶을 펴야 하니까 교사생활에서 아낌없이 헌신적으로 바치셨다.

역사속의 한 개인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개체 개체는 주관적인 희로애락도 있고 가꿔가는 생활이나 쏟는 애정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경우 전형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

남들이 보는 입장에서 어머니가 치른 엄청난 고생과 희생으로 만 다가오겠지만 어머니는 유머도 있으셨다. 그렇지만 나는 성장하는 아이로서 부모님들의 큰 그늘에서 참 힘들었다. 아버님 어머님이 어떻고 칭찬하니까 더 잘 해야 하고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경우 아버님처럼 하나를 위해 몰두하고 목숨 바친 형태는 아니지만,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열정과 성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책을 보면서 확인됐다. 대단히 어려운 시절에 확신을 갖고 생을 살았다. 자신의 진정성, 책임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 이숙의 여사는 어머니로서는 어떠하셨는지?

■ 나한테는 뭐랄까 표현과, 세부적인 섬세하게 다독거리는 어머니 상은 없다. 자랄 때는 늘 바쁘셨고 유일한 여장학사로 맡은 바가 많았다. 뭇사람 사이에 어머니를 빼앗겼다. 아주 엄격했고. 무심히 대했지만 엄청난 기대를 하셨기 때문에 참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서울로 대학에 가면서 나를 처음 떠나보내고 나서 어머니는 내가 있었던 자리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기숙사에 살면서 연애하듯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불만이나 서운했던 것, 어머니가 대단한 미인이셨던 터라 주변의 뭇남성들에 대한 솔직히 불안감도 있었고. 그런 것도 간혹 있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 전화하고 편지하며 대구에 계신 어머니와 관계를 유지했다.

독일에 오셔서 강한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역할을 하시면서 또 한번 대단한 열정을 가지셨던 것 같다. 혁명가의 아내와 교사로 살아오시다 독일 오셔서 아이들 사랑, 저에 대한 배려를 못다 했다고 생각하셔서. 운동하면서 절친했던 분들께도 마찬가지셔서 독일에서 모든 분들의 어머님이 되셨다.

북에 남은 ‘기독교인’ 시할아버님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시댁에 대한 부담도 컸겠다.

■ 시부모님들은 시어머님도 신학자로 같이 감리교 나오시고, 자식들을 친정집에 두고 두 분이 공부하러 오셨다.

두 분이 다 북 출신으로 평양과 함경도다. 3대째 기독교 집안이어서 부모님을 찾아 나서 북에 연락하니까 살아 계셨는데 시할아버지는 함경도 교구를 지키면서 남하하지 않았다. 시할아버님께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드물게 정말 예수 가르침을 전하려 안 내려왔다. 지역에서 많은 존경받고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종교를 지켰다.

무척 만나고 싶었지만 쉽게 안 돼 편지를 교류하다 1981년 최초로 (시아버님이) 공개적인 평양 방문을 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화’로 한국과 해외의 기독교가 반공이라는 잘못된 병폐에 찌들어 있다는 사실에 경종을 올리고 제단에 바치는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화를 했다. 려연구 선생 등 중요한 분들이 해외로 나와 비엔나, 스톡홀룸 여러 군데서 해외기독교와 조선기독교연맹 쪽과 자주 대화하고 일년에 한 두 차례씩 했다. 미주에서는 홍동근 목사님 등이 해외 기독자 통일운동을 함께 하신 분들이라고 알고 있다.

시할아버님은 81년 시아버님이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시할아버님은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기독자 통일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돼 매년 평양에 가시거나 해외로 나오거나 벌써 하나의 상례화 될 정도로 활성화됐다. 해외통일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기독교통일회(기통회) 일을 일찍 하셨고 이후 범민련이 훨씬 뒤에 생겨 유럽 범민련에서 일하셨다.

1980년 중반에 시부모님들이 앞장서 나갔고, 나는 어머님 모시고 있어서 조금 후퇴했다. 활동의 제한도 많았고 가족이란 것 때문에 불편하다. 국내처럼 현장이 크면 3대째 모든 가족이 운동해도 문제가 안 되는데 독일 운동권 자체도 적고 가족 성원 전체가 일하기기 쉽지 않다. 저는 여성운동도 해야 하니까. 시부모, 며느리, 아들이 하기가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돈 문제도 있고.

좀 쉬었다. 해외체류가 장기화 되니까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처신 문제가 캄캄한 시절이었다. 전두환 시대에 애들도 키워야 하고 장사도 해야 되고, 먹고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야 했다.

귀국할 날만 기다리지 말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운동 선배중 철학박사가 동양식품점을 열어서 우리도 우리 기센에서 식품점을 열고 그 일을 했다. 10년이 후딱 가고 아이들 키우고 살았던 얘기, 어머니 독일 생활은 이번 어머니 책에는 다 쓰지 못했다.

□ 학위는 취득했나?

■ 걷어치웠다. 아이들도 키워야하고 금방 가는 것 포기했기 때문에 학위도 필요 없었다. 거기서는 쓸모없고 국내에 들어올 때 필요하니까.

사람의 운명이 종이장 앞뒤

 

 

 

사진은 박소은 6.15유럽공동위 위원장  [사진제공-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어머니 이숙의 여사의 책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나오게 돼 기쁘겠다.

■ 우리 현대사에 그런 가족 많지 않을까. 책도 내고 여러 군데 관심도 가져줘서 어떻게 생각하면 부모님 희생으로 내가 행운 받은 것 아닌가. 이름 없이 같은 삶 가진 분들 너무 많기 때문에 행운아다. 북에 가서도 열사릉에 모셔져 있다는 전혀 예기치 않는 것을 보았다. 어머님도 아버님이 끝까지 찾으셨다는 이야기도 듣고. 이번에 귀국해서는 어머니 책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어머니 제자들이 여러 명 전화했다.

□ 비전향 장기수 김익진 선생의 남파 임무중의 하나가 두 모녀를 데려가는 것이었나?

김 선생은 1951년도 산에서 몇 차례 우리를 찾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전세가 기울어져 다시 북으로 갔다가 북에서 결혼하고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북에서 공부도 하시다가 늦게 다시 내려왔다. 그때 임무는 무엇인지 직접 묻지는 못했다. 사업도 못해보고 체포됐다. 다리도 한 쪽을 못 써서 다리를 많이 절었다. 그때 임무 중에 모녀를 데려오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었겠지만 확인과정도 없었다. 김형수 씨는 그렇다고 썼더라.

□ 어머님이 김익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로 운명하셨는데.

■ 긴장이 좀 풀어지지 않았을까... 이태씨 ‘남부군’을 읽고 상당히 흥분하셔서, 거기 아버님 이름이 공식적으로 나오니까. 수십년 지나 처음으로 다시 독일 땅에서 본 게 상당히 충격이셨던 것 같다.

야, 그런데 경상도의 조건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왜 당신 남편만은 가족을 찾지 않았는지, 어머니 이야기가 처음으로 실린 95년 ‘말’지 바로 옆 기사에는 이현상 자손들이 북에서 열사릉에 헌화하는 장면도 나왔는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까마득히 몰랐다.

□ 시아버지인 이영빈 목사가 1980년대 초부터 북한을 다녀왔는데 소식을 전하지 않았나?

■ 가실 때마다 아버님 생사를 알아볼까요? 그렇지만 어머님이 원하지 않으셨다. 살아 계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 알고 있었고,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국내파고 시집식구들은 해외운동을 자유롭게 전개하고 고초를 겪지 않았다. 해외의 자유공간에서 북을 방문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어머님에게는 착잡하게 다가왔다.

누구한테도 아버님의 생사를 알아보지 않았다. 만약 살아계신다면 이름이 떠야 한다고 믿고 계셨다. 제 3자를 통해 확인할 성격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 결국 95년에 ‘말’지에 보도되면서 어머님이 북의 초청으로 방북하셨는데.

■ 갔다온 것을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통일운동 선상에서 공개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어머님이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님이 북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무척 쓰고 싶어 하셨다. 결국 못썼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남북을 오가셨으니까. 확인도 하시고. 그래서 북에 분들도 잘해주시고 상당히 어려워해 잘 모시려고 긴장했다.

□ 김익진 선생과의 만남도 쉽지 않았는데.

김익진 선생이 감옥에서 ‘말’지 읽고 우리 모녀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우리와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막상 남쪽에 남아있는 선생님 친척들은 다 외면해서, 떠나실 때도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누이, 형제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지 못했다. 출옥하고 계실 데가 없어서 청년들이 도왔다고 한다. 나는 2003년에 평양에 갔을 때 다시 뵙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 김익진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 어머님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게 어머님께 그 정도의 충격적인 확인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자식과 다른 것 같다. 두 번째 심장마비로 몸이 쇠약해지셨는데 회복기에 들어서 전혀 못 느끼고 얘기하다 돌아가셨다.

두 분 얘기 나눌 때 병실이 비좁아 나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기가 막혔겠죠. 사람의 운명이 종이장 앞뒤라는 느낌이다.

그때 산에서 내려와 우리를 찾아 구제해서 평양으로 갔으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거기서 교육받고 새로운 생활하고, 6.15시대가 돼서 다르게 만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북으로 가셨으면 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남쪽에서 겪어야 했던 고초를 절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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