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 비전향 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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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사령관과 무명옷 입은 선생님의 ‘50년 사랑’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 박종근과 그의 아내 이숙의

2007년 10월 01일

  안현상 르포작가   민족 21

 

  • 프롤로그
    한 빨치산의 가족이야기

1990년대 초반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이후 비로소 ‘빨치산’이란 단어는 금기에서 풀려났다. 이현상, 방준표, 박영발, 하준수,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빨치산들….
불꽃같은 그들의 삶마다 현대사의 상흔이 담기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지금부터 전하는 이 가족의 삶만큼 애절한 것이 또 있을까.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 박종근과 그의 아내 이숙의, 그들의 유일한 혈육, 박소은. 그리고 그들의 생애와 운명처럼 맺어진 비전향장기수 김익진.
5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남과 북, 그리고 독일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펼쳐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해보겠다.

 

  • 1부  이 남자, 박종근
    “그 사랑을 한시도 잊지 않았소”

“대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꿈결인 듯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아득하다. 그렇다. 며칠 전 일월산 자락에서 토벌대와 조우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위망을 뚫는 과정에서 그는 다리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 가까스로 사선을 뚫고 나왔지만 그후의 기억은 파편적이었다. 그는 줄곧 들것에 실려 이동해야만 했다. 편히 쉬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토벌대의 동계대공습이 자행되는 산중에서 이동을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대장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비트가 나옵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십시오. 절대 잠이 들면 안 됩니다.”
총상을 입은 그를 줄곧 곁에서 간호하며 행군했던 간호장교가 간절히 호소했다. 그래, 버텨야 한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4년 여 동안 한시도 잊지 못했던 그 얼굴. 전쟁 발발 후 남쪽에 내려올 때부터 수소문했지만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고향마을까지 사람을 보냈으나 끝내 찾지 못했던 그 사람.
차가운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다시 붙잡으며 그의 기억은 5년 전으로 돌아갔다.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1946년 3월 1일이었다. 해방되고 처음으로 3·1만세운동 기념식이 전국에서 열린 날, 그는 고향 의성의 군민대회에 좌익을 대표하는 연사로 참여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이미 열여섯 때부터 밤이면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물거리는 등잔 밑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던 그는 청년시절을 독립과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오롯이 바쳤다.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민족해방투쟁에 헌신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의성군 일대에서 칭송이 자자하던 청년운동가였다.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이 다만 선열의 숭고함을 되새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민이 주인이 되는 새조국 건설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연설은 특히 한 여성의 가슴을 높뛰게 만들었다. 의성읍내 중부국민학교 여교사였던 그 사람은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한눈에 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성군의 여성들을 위한 교양강좌가 열렸다. 그는 이 강좌에 연사로 초대됐다. 맨 앞자리에 앉은 여교사는 그의 시선과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얼굴이 벌개질 만큼 당황했던 그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스물여섯과 스물, 정말로 도라지꽃처럼 청순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대구를 시발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간 10월항쟁이 미군정과 경찰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좌익활동가들은 탄압을 피해 지하로 들어가야만 했다. 의성의 투쟁을 주도했던 그에게도 체포망이 좁혀왔다. 결국 그는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어둠을 안고 비밀리에 찾아든 그 사람의 집에서 그는 언제일지 모르는 해후를 약속했다. 여명을 따라 집을 나서는 그에게 그 사람은 밀려올 추위에 대비해 양말과 내의를 여러 벌 챙겨주는 것으로 가슴속의 사랑을 전달했다. 

의성의 구봉산을 넘어 그가 훌쩍 사라진 뒤 남은 그 사람은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의 행방을 추궁하는 경찰들로 그 사람의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신여성 여교사는 결국 이듬해 3월, 그를 찾아 서울행을 감행해야만 했다.

들것에 몸을 뉘어 얼마쯤 갔을까. “토벌대다!” 하는 낮고 빠른 소리가 퍼져왔다. 며칠째 집요하게 추적해오던 토벌대의 모습이 건너편 산능선 위로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행군 걸음을 멈췄다. 재빨리 바위틈을 은신 삼아 흩어졌다. 이 고비를 넘기고 조금만 더 가면 비트가 나오지만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가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곳은 1947년 3월 여맹의 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리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여운형 선생의 강연이 잡혀 있었다. 막막한 서울 하늘 아래 기적을 바라고 찾아온 그 사람을, 그는 이곳에서 정말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의성에서 헤어진 지 반 년만이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찾는 경찰과 우익청년들이 무시로 들이닥쳐 들들 볶아대는 의성에서, 그 사람은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47년 6월 10일 서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남부군 제3지대장으로 맞은 최후

신혼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으나, 늘 불안했다. 그는 여전히 일급수배자의 신분이었다. 시절 또한 급박하게 돌아갔다.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과 체포소동은 갈수록 노골화됐다. 그럴수록 그 사람의 불안함도 커져갔다. 이 행복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람의 직감처럼 그는 장기항쟁을 위해 월북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것은 조직의 요구였지만, 시대의 상황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3일, 결혼한 지 겨우 6개월이 되던 때였다. 그때 그 사람의 뱃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북으로 간 그는 당의 결정으로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던 중 1948년 8월 해주에서 당시 지하선거로 선출한 남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그는 경북 의성 대표로 오는 이 편에 그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해주로 왔다. 마침 의성 대표였던 이는 두 사람을 모두 잘 아는 이였다. 그 편에 그 사람이 4월에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헤어진 두 사람을 오갔던 유일한 소식이었다.

38선을 두고 전쟁이 터졌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인민군 속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민군 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미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결국 퇴로가 막히자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남부군 제3지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다.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의 경북 북부 산악지대가 그들의 주무대였고 최전방이었다.

“탕, 탕, 타다다다탕!”
토벌대 쪽에서 콩 볶듯 터지는 쇳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토끼몰이 하듯 토벌대의 포위망이 사방에서 좁혀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은 동요했다. 그가 몸을 누인 들것도 이리저리 출렁였다. 버티기란 어려워보였다. 대원들은 그를 필사적으로 호위하며 퇴로를 뚫고자 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한 식경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동지들…, 나는 조국을 위해, 당을 위해, 동지를 위해 투쟁했기에 행복했소. 이제…, 나를 두고 이곳을 빠져 나가오. 조국과 당은…, 언제나 동지들과 함께 할 것이오.”
그리고 허리춤에서 권총집을 끌러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타앙!”
낮고 강렬한 소리가 산 메아리로 울렸다. 순간 그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1952년 2월 17일이었다.

▲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박종근 위원장의 최후 사진. 그가 죽은 날짜와 상황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 2003년 4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선 박소은 씨 부부.

 

 

▲ 박종근 위원장의 연락병이었던 비전향 장기수 김익진 선생의 아파트를 방문한 박소은 씨 가족. 오른쪽 두번째가 김익진 선생이다.

 

 

  • 2부 이 여자, 이숙의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아주머님,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대장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바로 아주머님과 따님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의성 일대를 수소문했지만 행방을 찾질 못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간곡히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비록 쫓기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못했단 말인가. 빨치산 하면서도 다들 가족들한테 연락은 했다는데, 아니 어떤 사람은 아이까지 낳고 그랬다는데…. 어쩜 그 사람은 한 번도….

“조국에서도 돌아가신 대장님의 가족을 데려오라고 저를 다시 남쪽에 내려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체포돼 삼십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요. 그런 제 말을 못 믿으신다면 도대체 누구 말을 믿으신다는 겁니까?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도 대장님은 언제나 따님을 보고 싶어 했고, 아주머님에 대한 사랑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죽은 그 사람의 부하였다는 그. 우리를 찾아 의성 일대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질 않았다는 그….


50년 만에 나타난 그 사람의 연락병

1947년 12월 3일 그 사람이 개성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뒤, 나는 어쨌든 서울에서 살아내야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혼자서 낳는 일이 난망했다. 결국 이듬해 봄 나는 의성의 친정으로 내려왔다.
1948년 4월 난산 끝에 세상에 나온 딸아이를 끼고 나는 삯바느질이며, 농사일이며 닥치는 대로 부딪혔다. 하지만 이웃도 친척도 우리 모녀를 몰라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현실이 더욱 황량했다.

그러다 38선에서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진 뒤 나는 두 돌이 지난 딸아이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는 판국이라면 차라리 의성에 남아 있는 편이 그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목숨부터 부지해야만 했다. 전쟁이 터진 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남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됐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밤사이 산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어느 날 밤 국민학교 제자였던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대뜸 빨리 피하시라고, 곧 선생님을 체포하려고 경찰이 들이닥칠 거라는 말을 건네고는 급히 사라졌다. 허겁지겁 몸을 피한 곳이 시삼촌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시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시아버지는 좌익이었던 맏아들과 달리 대동청년단장으로 ‘공비 토벌’에 앞장서왔다. 우리를 충분히 지켜줄만한 처지임에도 시아버지는 외면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의성땅을 지킬 처지가 못 된 우리는 결국 영천을 거쳐 경산으로, 대구로 찾아들었다.

풍문에 듣자니 그 사람은 상주를 거쳐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퇴각하면서 의성과 안동을 거쳐 태백산 줄기로 들어갔다고 했다. 우리 모녀가 의성으로 되돌아온 것은 1951년 가을이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의성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후퇴하는 국방군을 따라 내려갔고, 우리가 의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산으로 들어간 뒤였다.

1952년 3월,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을 의성경찰서 수사과장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에는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그뒤 생포당한 그 사람 부대의 간호장교가 했다는 이야기를 형사들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총상을 입은 그 사람이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풀고 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제는 살아야했다. 그 사람의 단 하나뿐인 혈육을 키우면서…. 그 사람의 죽음 이후 아침저녁으로 뻔질나게 드나들던 형사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나는 밤을 새며 삯바느질에 매달렸다. 그게 유일한 살길이기도 했지만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시절

시간이 흘러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의 죽음’은 나에게 복직의 열쇠를 안겨 주었다. 이미 산으로 간 대부분이 잡히거나 죽은 몸이 된 1953년 9월, 나는 의성읍 남부국민학교에 복직했다. 당시만 해도 공주사범을 나온 교사가 드문 시절인지라 은사와 동창들이 힘을 많이 써주었다. ‘이제 내 인생을 아이들을 위해 바치리라.’ 이때부터 나의 유일한 인생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시절은 나를 그대로 놓아주질 않았다. 1959년 나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간첩죄로 구속되었다. 의성 출신으로, 온 집안이 좌익으로 몰살당한 여성이 있었다. 나의 소학교 후배이며 안계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그녀만이 홀로 살아남아 월북했다. 그녀는 1958년 남파되어 의성으로 내려왔고, 나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녀는 1959년 가을 체포됐는데, 그녀를 만난 것이 문제가 되어 나 역시 구속되어야만 했다.

나를 석방하기 위해 다시 은사들과 동료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당시 의성군의 국회의원이었던 나의 시아버지를 찾아갔지만 끝내 외면당했다. 그러던 중 나와 절친한 여교사가 당시 대구 정치권의 거물인사였던 신도환 의원과 인연이 닿아 그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렸다고 한다. 결국 나는 신 의원의 노력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석방된 후 나는 더욱 교직에 몰두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 그 사람과의 유일한 혈육인 딸 소은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버지를 닮아 명석했던 딸아이는 서울대 사학과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딸아이에게 출국허가가 나기까지 우리는 또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 등장 이후 교육은 정권의 통치기구로 변질됐다. 특히 유신시절의 교단은 참담한 실정이었다. 교육현장은 부조리로 넘쳐났다. 애국애족을 내세워 정권에 충성을 강요했다. 내가 그에 대해 항의라도 할라치면 뒷공론부터 일었다. 출신은 속이지 못한다느니 역시 색깔이 있다느니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들이 쌓여가면서 나는 천직으로 알았던 교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독일로 유학을 떠난 딸이 그곳에서 결혼해 정착하면서 나 역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1977년이었다.  


50년간 풀리지 않던 문제가, 이제는 풀렸다…

독일에 와서 보니 피는 못 속이는 법인지 딸 소은은 투사가 되어 있었다.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동포들이 결성한 조직에 남편과 함께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목사였던 바깥사돈 역시 통일운동을 위해 여러 차례 북에 다녀왔을 만큼 동포운동권의 큰어른이었다.
나는 바깥사돈을 통해 그 사람이 죽고 나서 북에서는 열사로,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침 1995년 남쪽의 잡지에 나의 사연이 실린 것을 보게 된 북측 당국은 나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1995년 11월, 2주간의 평양 방문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심어주었다. 북측 당국은 죽은 그 사람에게 수여된 열사증과 국기훈장, 영웅칭호 수여증, 조국통일상을 내게 대신 전해왔다. 그나마 조국의 반쪽에서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 사람은 왜 우리를 찾지 않았을까. 그 사람의 부고는 세월 속에서 감내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연락도 남기지 않았던 그 사람의 행동은 50년 시간 앞에서도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50년간 풀리지 않던 문제가, 이제는 풀렸다. 그 사람의 부하였다는 이가 50년 만에 연락이 닿아 나를 만나고 간 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딸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몇 번씩 되풀이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나러가야지. 나를 애타게 찾았다는 그 사람을…. 2000년 8월 28일 새벽 1시였다. 

 

  • 3부 그들의 딸, 박소은
    “돌아가신 대장님을 많이 닮았구만요”

2000년 8월 25일, 김포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소은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실로 30년만의 귀국이다. 1971년 독일로의 유학 이후 30년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 그저께 대구의 친척으로부터 급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심장병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은은 김포에서 곧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의 불볕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달려간 병원 중환자실에서 어머님과 마주했다. 다행히 의식도 돌아오고 회복 속도도 빨랐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뭔가에 쫓기듯 허둥대신다. 서울에서 손님이 내려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이가 옛날 빨치산 시절 내 아버지의 부하였다는 것이다.


북송 장기수 김익진 선생

서울에서 내려온 노인은 어머니와 좁은 병실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은은 어머니의 손님과 병원 구내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돌아가신 대장님을 많이 닮았구만요. 나는 아버님과 같이 산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오랜 감옥살이를 끝내고 며칠 후면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가기 전에 아주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김익진이었다. 1960년대에 남파됐다 체포돼 3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북송이 결정되면서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소은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자신이 소은의 아버지의 연락병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로부터 아내와 딸을 찾아 데려오라는 과업을 받았지만 끝내 그 과업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연히도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에서 박종근 위원장의 가족들이 당시 빨치산부대 동료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내 달려왔다고 한다. 며칠 뒤면 북으로 돌아간다는 그는 50년 전 과업을 이제라도 수행할 수 있어서 대장님께 면목이 선다고 했다.

그날 밤 어머니는 한평생을 떠나지 않던 궁금증을 풀었다면서 소은에게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마치 긴 여행을 마무리 지으며 깊은 잠에 들 듯 이승과 작별을 했다.
소은에게 어머니의 뜻밖의 임종은 큰 충격이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 평생의 한처럼 안고 살아왔던 것을 풀고 가셨으니 한편으로는 위안도 됐다. 그러면서 소은은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 기억은 어느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1971년 겨울,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찾아온 독일땅이었지만 소은의 유학생활은 평탄할 수 없었다. 마치 운명의 끈처럼 소은은 독일에서 민주화운동 대열에 뛰어들었다. 1974년 독일에서 유신정권에 맞선 유럽 동포운동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가 결성될 때, 소은은 막내로 참여했다.
1960년대부터 ‘경제건설의 역군’이란 칭송을 받으며 광부로, 간호사로 찾아든 이들은 이역만리에서 접하는 유신독재의 횡포를 보며 조국의 동포들보다 먼저 투쟁했다. 이들의 대열에 많은 유학생들도 동참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조직이 ‘민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과 맞바꾼 것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들에게  ‘친북인사’ ‘빨갱이’라는 낙인을 붙였고, 기어이 그들의 귀향마저 막아버렸다. 그 엄혹한 세월은 그들이 백발성성한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유신정권이 무너지면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까지 이어졌다. 소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세기를 돌고 돌아 하나가 된 가족

소은을 찾아 독일로 온 어머니는 소은이 가려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길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딸과 사위가, 그들의 동지들이 모임과 집회를 할 때면 더운밥을 먹이지 못해 속상해했다. 소은과 동지들이 독일에서 낳은 아이들을 거두고, 2세 꼬마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은 항상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2003년 4월, 소은은 북측 당국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서 소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소은은 어머니가 손수 그림을 그린 비단 천보자기에 싸 가지고 온 잔에 술을 따라 아버지께 올렸다. 그 술과 잔은 2000년 대구에서 어머니 제사상에 올린 그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장지에서 담아 온 흙과 들풀들을 아버지 묘비 앞에 뿌렸다. 비로소 확인한 아버지의 실존. 북과 남, 독일로 나뉘어야 했던 가족은 그렇게 반세기를 돌고 돌아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2003년 4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선 박소은 씨 부부.

평양 방문에서 소은은 김익진 선생과도 뜻깊게 해후했다. 깨끗한 복장의 가슴에 가지런히 달린 훈장들처럼 김익진 선생의 얼굴은 건강하게 활짝 빛나고 있었다. 40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조국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으며 ‘가족’이라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뒤늦게 되찾았다. 그 모습이 소은에게는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 에필로그 2007년 9월, 서울

2007년 9월 7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이숙의 선생의 회고록 《이 여자, 이숙의》의 출판기념회였다.
출판기념회장 입구에서 손님맞이에 분주한 초로의 여성이 보였다. 언뜻 보니 행사장 안에 걸린 플래카드 속의 여성과 빼닮았다. 곡절 많은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남겨놓은 이숙의 선생과 빨치산 사령관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박종근 위원장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인 박소은 씨다.

출판기념회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 박종근 위원장을 기억하는 빨치산 출신 동지들, 이숙의 선생의 제자들, 그리고 박소은 씨의 독일 유학시절 선후배들…. 백발이 성성해서 만난 이들은 20세기 곡절 많은 한국현대사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을 가족사에 모두 숙연했다.
출판기념회를 위해 독일에서 온 박소은 씨는 “비록 대구와 평양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식처는 분단되어 있지만 두 분은 우리들에게 내재하는 하나의 고향 땅, 하나의 조국 땅에서 분명 자유분방한 왕래를 하고 계실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추서(追書). 박종근 위원장과 이숙의 선생, 비전향장기수 김익진 선생의 이야기는 북의 소설가 김덕철에 의해 2005년 《의리》라는 제목의 소설로 평양에서 출간됐다.


※박종근. 1920년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부터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그는 고향 의성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주도했고, 대표적인 좌익활동가로 경북 일대에서 이름이 높았다. 1946년 10월항쟁 당시 의성군의 경찰서와 군청을 무혈접수하는 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뒤 서울로 올라와 남로당과 전평에서 활동했다. 1947년 12월 월북한 뒤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 장교로 참전한 뒤,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 남부군 제3지대장을 역임하다 ‘백야전사령부’의 동계대공습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17일 일월산에서 빨치산다운 최후를 맞았다. 그와는 이념을 달리한 아버지 박영교는 극우단체인 대동청년단장으로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3, 4대 국회의원(경북 의성)을 지냈다.

※이숙의. 1926년 대구에서 태어나 의성에서 자랐다.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모교인 경북 의성 중부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남편 박종근을 처음 만나 1947년 6월 10일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월북 이후 1948년 4월 딸 소은을 낳아 홀로 키웠다. 1953년 9월 의성 남부국민학교로 복직해 이후 대구 중앙·복명·대구초등학교 등에서 교사생활을 계속했다. 1959년 간첩사건에 연루됐으나 무죄로 석방됐다. 1963년 경북교육국 초등계 초대 장학사로 발령받았고, 여러 차례 교육자 특공상을 받았다. 1977년 딸과 사위가 있는 독일로 떠났으며, 1995년 북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했다. 2000년 6월 자서전 준비를 위해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8월 28일 대구 가톨릭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박소은. 1948년 4월 25일 경북 의성에서 박종근과 이숙의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독일유학 길에 올라 뮌헨대학을 거쳐 마부르크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했다. 1974년 독일에서 유신정권에 맞서 결성된 동포운동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 참여했고, 이후 30년 이상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이 때문에 20여 년간 입국불허 신분이었다가 2000년에서야 귀국이 가능해졌다. 1976년 민주화운동의 동지였던 남편 이경택과 결혼해 슬기, 보람, 한결 등 1남2녀를 두었다. 1977년 독일로 건너온 어머니 이숙의와 함께 살았다. 2003년 북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 애국열사릉에 묻힌 아버지 박종근의 묘소에 참배했고, 이때 아버지의 연락병이었던 김익진 선생과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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