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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남, 두 개의 조국과 나

[특별기획] 재일조선인 여성 조경희로부터 듣다⑤

 2008년 07월 16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경희

 

2002 년 5월말, 고생 끝에 한국영사관에서 입국허가를 받아 숙박할 곳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적이 아닌 ‘조선’적을 가진 채로 3번째 한국입국, 게다가 7개월이라는 장기체류 허가를 얻었던 것이다. 나는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에 휩싸여 있었다.

마침 한일월드컵이 한창 열띠게 진행되었던 때다. 원래 축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고, 오히려 한일전과 같이 국가별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6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한국 국가대표선수 한명 한명의 프로필까지 다 알 정도로 축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나에게 월드컵은 친구를 만드는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재 외동포 당사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지구촌동포연대(KIN) 사람들과 처음 만난 날도 식당에서 함께 이탈리아전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 극적인 반전에 함께 손을 잡고 흥분하면서 왠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하이터치를 하면서 나는 한국사회와의 ‘만남’에 그저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대~한민국!” 이 메아리치는 순간에는 매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열중해도 그 응원만은 따라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온 몸이 거부하는 것 같았다. 이 감각이야 말로 내가 항상 되돌아가려고 하는 정체성의 원점이다.

남조선에 대한 기억

 

▲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Our School, 2006) 스틸 컷

 

어 렸을 때부터 나는 부모님한테서 “너는 조선사람이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집안에서 칸코쿠(한국)란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어떤 친구가 “꾱히~짱은 칸코쿠진(한국사람)이니까 한국의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때 5,6살 정도였던 나의 어린 마음에도 “여기서는 쵸센(조선)이라고 하면 안되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아 “그래요, 나는 칸코쿠의 선생님이 될래요”라고 대답하였다. 쵸센(조선)/칸코쿠(한국)의 울림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이 후에 한국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조선학교에 입학한 후다. 1980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남조선의 광주항쟁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학교 수업에서 배운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동네 분회활동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 느 날은 가게를 했던 우리 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광주는 고발한다”라는 영상물을 함께 봤다. 참고로 부모님은 건물 1층에 빠칭코, 2층에 마작(麻雀)과 술집을 영업하셨고 가족들은 건물 3층에 살았다. 대낮부터 어른들이 술을 먹고 노는 모습을 보곤 했지만 어떤 날에는 그 성인오락실 공간이 동네 조선사람들의 집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 영상물에서 본 광주항쟁의 모습은 ‘남조선’에 대한 기억의 원풍경이다.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학교에서는 남녘땅의 민주화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배웠다. 이러한 영상물이나 교육내용에 어떤 정치선전의 요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남쪽의 현실을 ‘우리’의 문제로 생각하려고 했던 그 경험들은 나에게 올바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북조선 ‘귀환 사업’

물 론 그 당시 나에게 남쪽땅은 북쪽에 비하면 훨씬 먼 땅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도와 제주도인데 남쪽에 연락을 취하는 친척들도 없었고, 지금과 달리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보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반면 해마다 북쪽에서는 조선학교에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명목으로 지원금을 보내왔고, 1980년대 전반까지는 ‘귀국’(북조선으로 돌아감)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한 국에서 ‘북송사업’으로 불리는 북조선으로의 귀환사업(공식적으로는 1951년부터 1984년까지로 기록)은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에게 남의 일이 아닌 역사이다. 나의 외삼촌 또한 단신으로 귀국을 택하셨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외삼촌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귀국을 희망하였고, 3년 전에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함경도의 음악단 단장으로 활약하셨다.

 

▲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Our School, 2006) 스틸 컷

 

친언니의 동창이었던 아는 오빠가 북쪽으로 귀국한 것은 1984년 즈음이다. 조직적인 귀환은 벌써 전에 끝났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빈번히 오고간 시절에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귀환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 지막 환송모임에서 중학생이었던 언니네 학급은 다 같이 울면서 가수 이루카의 명곡인 ‘나고리유키(잔설)’를 불렀다고 한다. 조국으로 떠나는 동무에게 일본노래로 작별을 하는 학생들 모습을 선생님들은 어떻게 봤을까. 그날 저녁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그저 말없이 떠나는 그 오빠를 보내는 언니들이 너무 어른스러워 보였다.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이란

그 시절 나에게 조국이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물론 조선학교에서는 조국통일을 이야기했지만, 북조선이 심리적으로 가까웠던 것에 비해 남쪽땅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며 가난하고 민중들이 짓밟히는 땅으로 기억되었다.

그 러나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1990년대 초반에 영화나 텔레비에서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남조선의 모습은 과거에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여성들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패션은 물질적인 풍요를 보여줬고 톡톡 튀는 서울말에서 그 어떤 비장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져가는 무렵에 한국사회는 정치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루어가고 올림픽을 거쳐 본격적인 세계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으로 남쪽사회를 밟기 전까지 나는 2번 북쪽을 방문하였다. 1994년, 나는 대학생 대표단으로 한달 동안 방문하면서 오히려 북쪽사회에 대해, 그리고 조국과의 관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매일같이 차려지는 진수성찬에, 인민들의 째려보는 듯한 시선에, 우리가 결국은 풍요로운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는 것을, 조국과 비대칭적인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재 일조선인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남북 사회의 변화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겪어온 경험과 얻은 지식을 통합해 조국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양쪽에 연루된 삶,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그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분단된 조국과 관계를 맺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과거를 뛰어넘기 전에 먼저 과거와 대면하기를

결 국 나는 남쪽사회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여기서 살게 되었다. 그 전까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이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38선 없이 사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오히려 분단의 현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일상이며 항상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과 거 한국정부는 이러한 재일조선인들의 존재 양태를 정확히 포착하고 분단체제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물론 지금 한국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그러나 그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 쉽게 과거를 뛰어 넘지 않고 과거와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 때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는 불쌍한 동포”나 “국가를 넘나드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분단의 현실을 상기시키고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을 함께 나누는 존재로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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