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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정형근 의혹’의 증언자들]

“파이프담배 문 정형근이 고문을 지시했다”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정형근이 2~3일에 한번씩 들러 뒷짐진 채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타나 ‘심진구! 이제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되었는데’라며 그뒤에 있을 고문을 ‘예고’하곤 했다. 그가 들렀다 간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고문이 어김없이 가해졌다.”》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의원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은 많으나 이번은 사정이 좀 다르다. 언론뿐만 아니라 검찰도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원 관련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정의원의 명예훼손 혐의가 인정되는 만큼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고 전제하고 “고문 의혹 등 정의원을 둘러싼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낱낱이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12월14일 현재 정의원에게 5차 소환장을 보내 놓은 상태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에서도 “이번만큼은 정의원이 검찰의 포위망을 빠져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신동아’는 이미 99년 1월호에 ‘정형근을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정의원의 과거 행적을 추적취재한 기사를 실은 바 있다. ‘신동아’는 이 기사에서 ▲홍사덕 후보 비방 유인물 살포사건(92년 3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89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87년 1월) 등에서 정의원이 당시 안기부 수사단장·국장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해서는 당시 정의원이 안기부 수사단장으로서 이 사건의 축소·은폐를 꾀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서의원 밀입북사건과 관련해서는 “정형근은 ‘DJ와 북한을 엮기’ 위해 직접 나를 고문했다”는 서씨의 증언을 통해 고문 의혹을 폭로했다.

특히 “92년 총선 흑백 선전물 사건 총감독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었다”라는 전직 안기부 간부 K씨의 직격 폭로는 홍사덕 의원 비방 유인물사건에 관해 처음 밝혀진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은 세 사건에 대해 각각 ▲“흑색 유인물사건은 터지고 나서야 알았다” ▲“국회의원을 어떻게 고문했겠나” ▲“박종철군 아버님도 오해 푸셨다”라는 말로 의혹의 핵심을 피하거나 이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또 최근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1만달러 수수 및 고문 여부가 자신의 부산 집회 발언을 계기로 다시 문제가 되었으나, 정의원은 여전히 “나는 정치공작한 적도 고문한 적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의원은 나아가 “현 정권이 ‘고정간첩’(서경원 전 의원)을 앞세워 ‘정형근 죽이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역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결과와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정의원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동아’는 이와 같은 취재결과를 토대로 지난 11∼12월 두번에 걸쳐 인터뷰 및 서면 답변을 요청했으나 정의원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정의원은 보좌진을 통해 “인터뷰 및 서면 답변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 국정원 ‘정형근 파일’에 담긴 4대 비리유형 ]

정치공작·용공조작·축소은폐·직권남용

한 나라당 기획위원장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은 매우 독특한 이력과 멘탈리티의 소유자다. 그는 194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수재였던 그는 경남중·경남고(64년)·서울대 법대(68년)를 졸업하고 70년 사법시험(12회)에 합격해 사법연수원·군법무관 생활을 거쳐 75년 부산에서 처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검사나 법조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검사(8년)나 변호사(5개월) 생활이 짧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안기부 경력이 강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원은 83년 서울지검 검사를 끝으로 그해 안기부 대공수사국 법률담당관으로 파견나가 대공수사국 수사2단장(85년), 대공수사국장(88), 기획판단국장(93년), 1차장(94년) 등을 거쳐 95년 안기부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연기 검토 문건’이 폭로되어 옷을 벗기까지 13년 동안 안기부에서 근무했다. 정의원처럼 검사로 안기부에 파견나가 그토록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정의원의 안기부 경력은 공안검사들의 ‘경력 관리’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잘 나가던 정씨의 안기부 경력은 95년 지자체 선거 연기 검토 문건 폭로를 계기로 끝났다. 안기부의 2인자인 국내담당 차장까지 오른 그가 야당의 문건 폭로로 일격을 맞았으니 그로서는 야당의 ‘정치 공세’에 의해 안기부장을 눈앞에 두고 물러났다는 ‘피해의식’을 가졌을 법하다. 국민회의에서는 정형근 의원의 ‘사설 정보팀 운영’ 건도 이런 피해의식의 발로로 보고 있다.

정권 바뀌면 국정원장 영순위?

국민회의 한 관계자는 “정형근 의원의 사설 정보팀 활동은 한나라당의 단순한 일상적 정보수집 활동이 아니다. ‘3년만 있으면 정권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누가 신임 국정원장이 되는지 영순위가 정해져 있다’는 공공연한 말로 퇴직한 국정원 직원들을 끌어모으는 등 정권탈취를 위한 공작기구의 성격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공작에 유능한 사람이라도 흔적은 남기기 마련이다. 특히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그 ‘현장’에는 ‘업적’ 못지 않게 ‘과오’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정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듯, 그가 몸 담았던 안기부와 그 조직의 생리를 가장 잘 아는 ‘안기부통’이지만, 역으로 그의 ‘어두운 과거 행적’을 가장 훤히 꿰뚫고 있는 ‘정형근통’은 그가 몸 담았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다. 안기부 시절 그의 흔적들이 국정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말이다.

▲구미유학생 간첩사건(85년) ▲반제동맹 및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86년) ▲문익환·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89년) ▲화가 홍성담 사건(89년)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91년)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92년) ▲김낙중― 손병선 간첩사건(92년) ▲남한조선노동당 및 거물간첩 이선실 사건(92년) ▲구국전위 사건(94년) 등이 국정원에 남아 있는 정형근씨의 ‘업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씨가 수사를 지휘한 이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에서 문익환·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고문·가혹행위나 용공조작 시비가 일었다는 점이다. 정의원 본인은 ‘간첩 잡은 훈장’을 왜 이제 와서 문제삼냐고 항변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언론이 공(功)만 보도했을 뿐 과(過)를 문제삼지 않았을 뿐이다.

‘신동아’가 입수한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에 따르면, 정형근씨의 안기부 재직중 비리나 물의를 빚은 사건의 유형은 크게 ▲정치공작 ▲용공조작 ▲축소은폐 ▲직권남용의 네 가지다.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은 이 네 유형의 대표적 사례로 각각 ▲홍사덕 후보 비방 흑색유인물 살포 사건(92년 3월) ▲서경원 의원 ‘간첩’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87.1) ▲직원을 동원한 사적 업무 수행 등을 들고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홍사덕 의원 ‘흑색유인물’ 살포지시

92년 3월 14대 총선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재임중 강남을 선거구에서 여당인 민자당 김만제 후보와 민주당 홍사덕 후보가 경합하게 되자, 홍사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상부 지시도 없이 당시 수사과장에게 홍사덕 후보의 여성편력 비방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토록 지시하여 ▲당시 수사계장 한기용 등 4명이 홍후보의 축첩 관련 비방유인물을 제작해 3월21일 야간에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에 살포하던 중 홍후보 선거운동원에게 발각되어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혐의(후보자 비방)로 구속되자 ▲부하 직원 한기용이 민자당원인 친구의 부탁으로 행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축소조작 후 직속상관인 소속 과장과 단장을 견책 등 징계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사건 직후 소속 직원들로부터 갹출한 격려금을 자신의 명의로 관련자 한기용 등 4명의 순화 및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활용했는 바 ▲그 결과 유인물 살포를 지시받은 한기용 등 부하 직원 4명은 사법처리(각각 징역 1년6월∼8월, 집행유예 1년6월∼3년)되어 직장을 떠났음에도 ▲정형근 자신은 동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은폐조작 후 충성심을 인정받아 수사차장보로 영전함으로써 직원들로부터 지탄을 받음.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및 가혹행위

89년 6월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 서경원(62)은 85년 4월경 서독 여행중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포섭되어 88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북한 특별기편으로 밀입북한 혐의로 구속되었는 바(서경원은 그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98년 3월 특별사면 때 잔형집행면제로 출소) ▲김일성과 허담 접촉 및 공작금 미화 5만달러를 수수하고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국회와 가톨릭농민회 등을 기반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한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정형근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서경원 간첩사건과 연계시킬 목적으로 ▲직접 조사에 참여하여 주먹과 발로 서경원의 머리, 가슴, 얼굴 등을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신은 채 발등을 짓밟는 등 가혹한 고문을 통해 ▲허담으로부터 받은 5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김대중 총재에게 건네준 사실과 김총재가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통해 김대중 총재에 대한 용공조작을 자행했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 관련 박종철(언어학과 3년)을 연행해 조사시 물고문 등으로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정형근은 ▲1월14일 심야에 당시 광화문에 있는 서린호텔에서 개최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검찰·경찰·청와대 관계자 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그후 수차례 시내 앰버서더호텔(1817호)에서 검찰·경찰·청와대 등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 5공 정권 출범 이래 최대 위기인만큼 사건이 절대 깨져서는 안 되며, 이대로 묻혀야 한다”며 사건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담당검사 안상수에게 고문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등 고문치사사건 은폐 및 축소조작에 개입하였고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음.

위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의 일부는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일 뿐이지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또 이것이 그의 ‘전력’의 전부도 아니다.

이를테면 ▲구미 유학생 간첩사건 ▲반제동맹 및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화가 홍성담 사건 ▲사노맹 사건 ▲김낙중―손병선 간첩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에서 하나같이 고문 및 가혹행위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에는 고문·가혹행위 유형과 사례를 따로 적시하지 않고 있다. 용공조작 유형 사례로 예시한 서경원 간첩사건에서만, 김대중 대통령과의 관련성 때문인지 몰라도 일부 가혹행위를 적시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고문·가혹행위의 경우 당시 정형근 수사국장(단장)의 지휘 아래 가담했던 관련 당사자들이 상당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이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형근 파일’에 담긴 정보는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실 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정원 내부에서 수집한 정보라는 점에서 일단 이를 공개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그 사실 여부를 면밀히 검증해 보았다(물론 정형근 의원에게도 사실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아울러 ‘정형근 파일’에는 없지만 고문·가혹행위를 호소하는 피해자를 취재했다.

   (계속)

잔인한   한나라당  고문범  정형근

<신동아 99년 9월호, 정형근의 서경원 전의원, 박노해 시인 고문광경.>

―생각보다는 건강해 보이십니다.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속으로 곯아서 그렇지』

―유선호의원이 얼마 전 국회에서 서의원 방북사건 때 정형근 당
시 수사국장이 서의원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의 연루사실에 관해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
나 정의원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는데 어느 게 진실입니까.


내가 참, 지난 일이고 인간적으로 창피하기도 해서 말 안하려
고 했습니다만, 신문을 보니까 정의원측에서 「어떻게 국회의원
을 때릴 수 있었겠느냐」고 합디다. 그 말 참 잘했습니다. 그래
요, 어떻게 일개 수사국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원을 때릴
수 있습니까.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나는 아직도
그런 위선이 혹시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말하렵니다』


―조사를 받던 조사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89년 6월 무렵 남산의 안기부 건물 지하 6층인
가 3층에서 조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지하를 빙빙 돌아 3~4평
남짓 되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창문이 없어 햇볕이 안 들어오니까
저녁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어려웠어요. 들어가자 마자 옷을 다
벗으라더니 군복바지와 러닝셔츠 하나만 입으라더군요. 처음
1~2시간은 아무 말도 안 시키고 쥐죽은 듯 침묵을 깔아놔요. 그
러다 갑자기 「잘 생각해봐」로 시작해서 「야, ××자식아」 정
도는 보통이고…. 수사관 7명이 3교대로 돌아가면서 나를 맡아
잠을 안 재우고 몇날 며칠 수사를 계속하는 데 그 사람(정형근의
원)이 가끔 들르더라구요.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요.
가끔 들러서 부하들에게 「뭐 새로운 거 나왔느냐」 하고 묻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 똑바로 다뤄」라고 분위기
를 잡곤 했어요. 난 말 그대로 짐승 취급당한 겁니다』
『때리는 것은 내가 말도 안해요』


―정형근국장으로부터 직접 조사를 받은 것은 언제입니까.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부하 직
원들을 다 내보내고 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어요. 저녁 9시 15분
부터 시작해서 새벽 1시 45분까지 맞았어요. 나는 맨발 벗고 의
자에 앉아 있었는데 정의원이 구두 신은 발로 내 발등 위에 올라
서서 한 바퀴 빙글 돌며 지근지근 밟았어요. 발로 가슴과 어깨를
걷어차기도 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그렇게 때리더라고요. 나중에는
지쳐서 때리지도 못합디다』


―당시 조사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밖으로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나요.


아무도 없고 소리쳐 봐야 저만 불쌍한 놈이 되죠. 바닥엔 카펫
이 깔려 있고 벽에는 방음장치가 다 돼 있는데다가 지하인데 소
리쳐봐야 어디 들리기나 하겠어요? 욕실이 하나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막 쏟아지니까 재떨이로 하나 받
아내고, 양재기로 한번 받아내고 바가지로 받아내고 모두 세 그
릇을 받아냈어요. 아이고, 때리는 것은 내가 말 안 합니다. 솔직
히 남자끼리 때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피를 세 바가지나 받아낸
것은 때린 정도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양반(정형근 국장) 당시엔
아주 몸이 좋았어요. 가벼운 옷만 입고 내려왔었는데 마음껏 때
렸어요. 그런 사람이 지금 신성한 의회에 가 있다는 게 역사의
현주소라는 생각을 해보면 인간적으로 허탈감, 배신감을 느낍니
다. 정의원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떠나서 말입니다』


―누가 피를 받아냈다는 말입니까.

정의원이 갖다 대더라고요』

―무조건 때리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처음엔 느닷없이 종로사건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당시 내가 이
해찬(李海瓚)의원 그리고 농민들과 같이 행진하다가 돌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어요. 당시 내가 일부 농민의 과격행위를 말리러
갔다가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져 고려병원에 이송됐는데 정의원
은 「이 ××, 왜 너 우리 경찰이 하지도 않은 일을, 경찰이 돌
을 던져 찢어졌다고 해서 경찰을 골탕먹이느냐고 해요.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그런 얘기를 꺼냈어요』


―방북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떤 심문을 받았습니까.

『먼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야, 서경원, 나하고 같이 살
자. 나 좀 살려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살려주는 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북한 3번 갔다 온 것
다 안다. 자백하라」는 거예요』


―3번이라고요?

『예, 나는 한 번밖에 갖다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내가
「근거가 있으면 대라. 나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왔다」고 얘기했
어요. 그랬더니 「이 ××, 근거가 있다는데 건방지게 누구한테
대라 말라 하느냐」면서 그때부터 주먹이 날아오기 시작한 거죠.
그 다음에는 「너는 김대중이 꼬붕이니까 사실대로 안 불면 내
손에 죽는다」면서 「방북 전에 김대중이가 시킨 것과 갔다 와서
김일성이가 전해주라고 한 것, 그리고 가져와서 전해준 것, 즉
지령을 밝히라」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진술했습니까.

『그런 것 없다고 했죠. 난 사흘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
앞에 가서 간첩남파 중단과, 대남 과격방송의 금지, 88 올림픽에
대한 북한측 참가 등을 요구했다고 그대로 진술했어요. 그랬더니
정의원은 「이 ×× 거짓말한다. 묻는 말에나 답변하라. 넌 분명
평양에 3번 갔다. 김대중이 (사전에) 지시한 문서내용이 뭐냐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말 안하고 갔다 왔다」고 다시 말했죠.


그랬더니 말도 점점 거칠어졌어요. 이 자리에서 내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자식아」 정도는 준수해요. 난 그렇습니
다. 그래도 잘났든 못났든 간에 국민이 직접 뽑아준 국회의원인
데, 존대말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그래도 박세직씨가 안기부장 할 때는 그렇게 심하게 안
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안기부장이 바
뀌고 나서 아주 심해진 겁니다. 아마 박세직씨가 제대로 조이지
않는다고 (안기부장을) 바꾼 것 같아요. 현역의원이 이 정도로
당했다면 일반 국민들이야 어땠겠어요』


『내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리 못할 것』

―사실 그때 서의원이 소속된 평민당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이었
는데 총재에게 아무런 보고 없이 갔다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갈 때나 올 때 당과 일절 연계없이 갔어요. 안기부나 검
찰에서도 핵심적인 쟁점이 그것이었어요. 그래서 모 언론에서는
나를 또라이나, 소영웅주의자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서의원께서 북한의 돈(5만 달러)을 받아서 김대중총재에
게 (1만 달러를)전달했느냐 여부도 큰 쟁점이었죠.


돈은 내가 통일사업을 위해 (북한측에) 달라고 했어요. 그 부
분은 당시 내가 모두 진술했고 다 조사받았어요. 안기부측은 7월
17일 이를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으로 발표해버렸어요. 그러
더니 검찰로 송치된 뒤 재판과정에서 검찰측이 느닷없이 「그 가
운데 1만 달러가 김대중씨에게 전달됐다」고 나왔어요. 검찰에서
사나흘 동안 그 문제로 얼마나 나를 조여대고 비서관들을 다 죽
일 정도로 몰아치는지, 검찰조사에서는 내가 일단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주었다는 검찰측 요구대로 자백했어요. 그랬다가 재
판에서는 이를 전면부인한 거죠』


―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전달한 것은 사실입니까. 혹시 선물이
라도….
『일절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려면 5만 달러 다 주지
치사하게 왜 1만 달러만 주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


―안기부에서는 1만 달러 전달 여부를 추궁받지 않았습니까

『안기부에선 그냥 공작금 5만 달러 받았다는 진술만 받아낸 거
지. 그러나 정형근씨가 「김대중의 지시」 등을 자백하라고 어찌
나 두들겨 팼는지 다음날 아침 거울에 내 얼굴을 비쳐보니 기자
양반 양복처럼 (멍이 들어) 까만 색이 돼버렸더라고. 고문 앞에
는 천하장사가 없어요. 내가 하고픈 말을 하기라도 하면 즉각 주
먹이 날아오니까. 설사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우선 숨을 쉴 수 없으니까 일단 숨은 쉬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
에 굳이 더 버틸 생각도 안 들어요. 내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고 평양을 갔던 것도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위해, 북
한에 갔다 왔는지는 살아서 얘기해야겠다는 생각뿐이더라구요.


다음날부터 의사가 와서 상주하면서 매일 아침 약을 먹이는데,
내가 안 먹으면 강제로 먹이곤 했어요. 안 먹을 수 없는 공포분
위기였어요. 나중에 검찰로 넘어가서 내가 「강제로 약을 먹었다
」고 했는데 신문을 보니까 당시 안기부장이 「소화가 안 되서
소화제를 주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더라고. 허허』

서 전의원은 지금도 날씨가 궂으면 머리와 가슴 등이 쑤시고 아
프다고 호소했다. 서 전의원은 『제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렇게는
못하는 겁니다. 문제는 서경원 개인을 때린 것이 아니고 통일운
동 세력에 대해 매질을 한 그 사람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면서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때 가혹하게 군 사람이 정의원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됐
습니까.


『90년엔가 그 이듬해인가 내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때에
어느 신문에서 정형근씨가 무슨 큰 대공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
는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데 이번에 풀려나와 보니까 국회의원이 돼 있더라고요. 법적으로
는 몰라도 고문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아주 긴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법 이전에 역사의 심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끔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이 당했다는 가혹행위 상황을 털어놓
은 서 전의원은 최근 정국의 뜨거운 쟁점이 된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과 관련한 고문논란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
혔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아마 고문했다는 증거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아요. 고문은 없어져야 하고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야 합니
다. 이것은 내가 어느 쪽과 인연이 있었느냐와는 상관없어요. 반
(反)인간적 행위는 없어져야 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합
니다』

서 전의원이 자신의 사건과 관련해 무엇보다 분노를 느끼는 대목
은 『서울법대와 검사 출신의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을 때리고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낼 수가 있느냐』는 것
이었다. 또한 『정의원이 나름대로 국가안위를 위해 직무에 충실
하다 보니 생긴 불상사 아니겠느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국가
안위가 달린 문제일수록 철저하고 증거 위주로 처리하는 것이 직
업인의 윤리 아니냐』고 반문했다. 헌법과 법률이 있고 3권분립
이 있는데 공권력이 고문을 해서 사건을 두드려 맞추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부분적 인용 ..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지난 8·15특사로 풀려난 노동
자 시인 박노해씨는 정의원에 관해 서 전의원과는 또 다른 차원
의 기억을 갖고 있다. 91년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씨가
안기부에 검거돼 남산 안기부 청사로 끌려간 것은 그해 3월12일.
50여명의 수사관들이 24시간 3교대로 심문했다. 옆방에서는 심문
사항을 감청하다가 진술중 어떤 단서가 나오면 요원들이 즉시 현
장으로 뛰어가곤 했다. 조사현장에는 절대로 안기부 직원을 혼자
놔두는 법이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3명 이상이 따라 붙었
다.

고문은 15일 정도 이어졌다. 나중에는 입이 마르고 침 대신 피가
나왔다. 날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장엔 하얀 방음벽이 덮여
있고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책상 위엔 고무판이 깔려 있었다.

죽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동맥 그어
보름쯤 됐을까. 헛소리가 다 나왔다. 조사는 1초의 생각할 시간
도 주지 않고 계속됐다. 일제 CASIO 전자수첩에 나온 전화연락
번호의 당사자들을 대라는 대목에서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있었다. 보름쯤 되던 날 오른팔로 거울을 깨서 왼팔 동맥을 그었
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 7바늘이나
꿰맸다. 지금도 그 흉터는 남아 있다. 피를 흘리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그날 이후 거울이 사라졌다. 자살
기도를 막기 위해서다.

상처를 수술하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수사관들이 긴장하기 시작
했다. 수사를 할 수 있는 시한이 구속된 뒤 20일간인데 조사가
기대했던 만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평화롭게 서류나 꾸미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럴 무렵 군대 사령관이 사열 나오듯 수사관들이 긴장했다. 조사
현장을 지휘하던 남자까지 기립한 가운데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라는 사실을 박씨가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정국장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 조사실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사노맹의 최고책임자가 누구냐?』
『나와 백태웅이 실질적인 공동대표입니다』

순간 정국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쾌하다는 투였다.
『조직이나 권력에 수뇌가 둘일 수 있는가. 너는 대학도 못 나왔
고 너의 시나 글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
모든 수사관들이 기립해 있는 가운데 정국장은 권위를 잃지 않으
려는 듯 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톤을 낮추었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
느냐. 다 남들이 써준 거지』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젖은 출세주의자의 눈에는 「공돌이」
가 조직을 이끈다는 것이 이해될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박씨의 머리를 스쳤다. 박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쏘아 붙였다.
『그럼 이 나라에 미국유학을 갔다 온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왜
육사출신 밑에서 밥을 빌어 먹고 있습니까』

이 말에 화가 치민 듯 정국장은 『임마, 나도 육사출신이야』라
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조사실을 나가 버렸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숨죽이고 지켜보던 수사관들은 안 됐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끝났다. 마지막 얘기에서 처신을 잘 했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이젠 사형이다』 『사장님(정국장을 지칭) 말처럼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카이사르끼리는 얘기가 통할 수 있지
만』 『너는 설령 사형을 면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국장은 운동권 출신이라도 자신의 출신
학교인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는 것
이다. 그러나 박씨가 스파르타쿠스와 카이사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나서였다.
정국장의 엘리트주의 계급주의 기준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스파르타쿠스가 바로 「공돌이 박노해」였다는 것을.

야간고를 겨우 나온 「무지렁이」가 이대 출신 명문가 여인과 결
혼하고, 명문장의 시도 쓰고 이념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사회적
파문까지 일으키니, 이런 놈은 정국장의 기준에서 볼 때는 죽어
야 마땅했다는 것을. 구속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조사실을 나서게
된 박씨는 수사관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 고문의 기억을 역사에 남기고 싶지만 감정은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박씨의 경우 정형근의원으로부터 직접 가혹행위를 당한 일은 없
다. 다만 정의원은 이미 고문을 당해 심신이 피폐해진 박씨에 대
해 인간적 모멸감을 주어 심리적인 자포자기를 유도하려 했다는게
박씨 나름의 분석이다.

인명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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