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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내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2008년 07월 31일 09:49:51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독일로 돌아와 10개월 옥살이 반추하며,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의”

5년 전 한국사회는 ‘민주인사’로 초청돼 귀국한 어느 재독 사회학자에 대한 매카시즘적 광기로 가득했다. 그가 북한 노동당에 몰래 가입했으며,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암약해왔다는 등 죄목은 끝이 없었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는 경계의 이쪽이나 저쪽 어느 한 곳에 안주하면서 과거의 추억 속에 살기보다는 바로 그 경계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경계인’의 길을 걷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말한다. | 후마니타스 제공


송두율. 세계적인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로서 38년 동안 독일 대학강단에서 사회학과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7권의 독일어 저작과 10권의 한국어 저서를 펴낸 저명한 학자인 그의 얼굴에 야당 대표를 비롯한 수구세력들은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란 실로 무시무시한 주홍글씨를 새겨넣었다. 그는 곧 구속수감됐고, 10개월의 옥살이를 한 끝에 2004년 8월 간신히 독일로 되돌아갔다.4년 뒤인 지난 24일. 그는 ‘거물간첩’도 ‘암약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도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법원은 그가 받았던 혐의 대부분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해방 이후 최대간첩’ 운운했던 수구세력들은 물론 진보개혁진영에서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아무리 ‘아니면 말고’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37년 만의 귀향에서 끔찍한 경험을 한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무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한국 특유의 ‘아니면 말고이즘’에 대한 소회는 무엇인지, 돌아가고 싶은, 그러나 자신을 박해했던 고향에 대한 느낌은 어떤지 궁금했다. 인터뷰는 e메일로 진행됐고, 그는 전화통화에서 “경향신문이 질문에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죄가 없어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축하한다’는 표현은 어째 어색한 듯합니다. 그래도 좋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대부분 혐의가 무죄라는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가족들과 동료 친지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지요. 귀국 직후 겪었던 남한사회의 정치적 광풍, 국정원과 검찰의 밀폐된 조사실에서 보낸 그 많은 시간, 전격적인 구속, 재판정에서 보낸 그 지루한 공방의 나날들, 석방,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 탑승, 이렇게 전개된 10개월에 걸친 무거운 서울체험들이 꼭 만 4년 후에야 법적인 의미에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내 문제는 끝나지 않았어요.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는 사회는 앞으로 제2, 제3의 송두율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치소에 있었던 나보다도 바깥에서 오히려 더 시달렸던 아내와 두 아들이 누구보다도 기뻐했습니다. 아내는 38년 만에, 두 아들은 난생 처음 밟은 서울 땅에서 너무 기막힌 일을 당했지요. 국내외의 많은 지지자와 성원자들도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이른바 ‘송두율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대법원과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고법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국가보안법의 제한적 적용을 강조한 대법원의 결정을 고법이 거스를 수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되지요. 하나 거슬리는 것은 판사가 판결의 말미에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사족을 달았더군요. 그 판사는 자신이 하기 싫은 판결을 억지로 내렸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뜻하지 않은 9개월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가신 지 4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혹시 고향에서의 끔찍했던 기억 때문에 가위눌린다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등의 일은 겪지 않으셨는지요.

“독일로 돌아온 직후 동료들과 친지, 그리고 주치의는 나에게 조금 쉴 것을 종용했지만 곧 강의를 시작했지요. 구치소의 경험을 반추하며,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강의를 했지요. 일상으로 곧 돌아가려고 많은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저변에는 아직도 당시의 악몽이 재생하는 분노의 감정이 종종 흐르지만,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애쓰고 있어요.”

-구치소에 수감되셨을 때 천식, 고혈압 등으로 고생하셨다는 보도가 있었는데요.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다행히 좋은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건강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매일 새벽 정기적으로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신 것이 1967년이니 5년 전의 귀국은 무려 37년 만의 귀향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강산이 네 번 바뀐 세월 동안에 마주친 한국은 어떤 사회였습니까. 물론 한국이라는 작지 않은 국가를 두부 모 자르듯 규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것들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요.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와 비교해서 나아졌다고 보십니까.

“37년 만에 귀국해서 경험한 세상이 결국 구치소뿐이었지요. 구치소는 그러나 그 사회의 축소판이니, 그곳에서 나는 한국사회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 인간형을 만나 본 셈입니다.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회 변화의 속도가 그동안 내가 직접 경험한 어떤 사회보다도 빠르다는 점을 느꼈어요. 빠른 것도 좋지만, 그러나 너무 속도를 내다보니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없다는 것이 서울에 대한 나의 인상이었지요. 그래서 종종 나는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며 ‘느림의 미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해 펴내신 저서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에서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만, 책을 읽지 않은 경향신문 독자들을 위해 여쭙겠습니다. 2003년 당시 무슨 생각으로 귀국하셨습니까.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실도 이미 알고 계셨는데요. 조사와 구속, 재판 등 험한 일을 겪으시리라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또 당시 한국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고는 귀국 직전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초청자로부터 1)베를린, 2) 귀국시 공항, 3) 체류하는 호텔에서 약간의 조사가 있을 수 있다는 언질을 받았지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초청자 측의 두 사람이 나를 동행코자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당시 나는 ‘예우를 갖춘 조건에서’ 하는 조사 정도로 생각했어요. 또 귀국 직후 독일 대사관 측도 ‘변호사의 입회 아래’라는 건을 분명히 달았지요. 그러나 귀국 후 어느것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구속, 재판 등을 계산에 넣었다면 어떻게 인천행 비행기에 경솔하게 몸을 실었겠습니까. 구명을 위해 서울에 온 동료교수는 구치소 면회 때, 마르크스와 하이네도 조국으로부터 여러번 추방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추방 형식으로라도 자유를 택할 것을 종용했지요. 그러나 나는 유신독재 시절부터 투쟁해온 나의 삶이 깡그리 부정되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설 각오를 했습니다.”

-선생님이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신 ‘경계인’이란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의 귀국과 함께 이 말이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어떤 경계의 이쪽이나 저쪽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면서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뿌리를 관습적 본능적으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사이의 경계에서 제3의 무엇을 구한다면 아무도 밟지 못한 미래의 고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유토피아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미래의 고향이 선에서 면적으로, 면적에서 공간으로 변화하며 넓어질 때 그 안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경계인’이지요. 그런데 당시 한국에서는 이를 남북에 양다리를 걸친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쯤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정원이나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그리고 재판을 받을 때도 나는 이 말의 진정한 뜻을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전부 허사였습니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목도하셨던 한국 검찰과 사법부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주위에도 역시 검사나 판사 출신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독일에서도 판사나 변호사들을 만나보면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형을 발견하는데, 무엇보다도 사물을 보는 시야가 협소하다는 점입니다. 하물며 교양과 인성교육은 다 제쳐놓고 대학입학 직후부터 법전들고 씨름한 성과물로써 얻은 한국의 법관직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나는 서울에서 직접 경험했어요. 그래서 나는 로스쿨 제도의 도입을 처음부터 찬성했습니다. 법도 정치, 경제, 문화나 종교처럼 전체 사회의 한 하위체제로서 존재하지만, 이들과 복잡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더 열린 태도를 요구합니다.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법은 결코 자기도취적이거나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법관양성제도의 문제점은 분명합니다.”

ㆍ여론 오도하는 ‘지식’이 사회를 멍청하게 만들어
ㆍ李정부 들어 유신때 감시 다시 이뤄지고 있다
ㆍ외로운 망향의 삶, 다시 한국에 갈 수 있을지…


“내년 퇴임…38년간 한번도 중복된 강의 해본적 없어”

-책을 보면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다소 무책임하게 선생님의 입국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노동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밝힌 후엔 기념사업회 측 인사가 ‘구속 수사에 찬성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념사업회 측에 섭섭하셨던 적은 없습니까.

 

2심 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2004년 7월21일 석방된 송두율 교수가 서울구치소 앞으로 마중나온 지인들에게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강윤중기자>

“ 얼마 전 뉴욕에 갔다 만난 어떤 분은 기념사업회가 나를 데려와서 국정원에 넘겨 주었다고까지 말하며 분개하더군요. 물론 의도적으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거죠. 국고로부터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기념사업회가 안고 있는 조건 때문에 설사 자유스럽지 못했더라도 당시 좀더 ‘인간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지요. 또 지난해 9월 기념사업회가 베를린에서 한국민주화운동의 20년 성과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공동주최자였던 베를린 소재 ‘코레아협의회’ 측에 나를 배제하라고 지시하고, 행사를 비밀리에 준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내가 참석하지 못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투명치 못한 이유로 나를 배제시켰던 기념사업회의 사업방식을 문제삼았지요. 나의 석방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던 함세웅 이사장님으로부터 나중에 실무진의 실수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 문제로 인해 기념사업회가 타격을 많이 입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재정문제 때문에 기념사업회가 집권세력의 눈치나 살피다 보면, 결국 민주화운동의 ‘기록물’을 ‘보존’하는 창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니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골동품’이나 ‘기념비’로서의 ‘민주화’가 아니라, ‘삶’을 위한 그러한 ‘민주화’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되지 않겠어요.”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선생님이 노동당 입당 등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노동당 입당 사실을 입국 전에 만천하에 고지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당시 내 주위에도 있었고, 또 이들 중에는 그 후 알게 모르게 후원과 연대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요. 30년 전 입북 당시 - 그것도 살벌했던 ‘유신체제’ 아래서 - 밟았던 절차의 하나를 마치 송두율의 모든 것인 양 확대해석하고, 나를 도덕적으로까지 심하게 매도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앙금이 남아있습니다. 또 내 입국이 다 죽은 국가보안법을 살려 놓았다고 하면서 정작 싸울 대상인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 하거나, 말을 아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재판 중에 혹은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오신 후에, 기념사업회 측이나 선생님을 비난했던 진보개혁 인사 중에 사과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괜히 와서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해놓고 돌아갔다는 질타성의 이야기는 가끔 들리지만….”

-진보·보수를 떠나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아쉬웠던 점은 없으십니까. 학문과 신념이 법정에서 난도질당하는 사태에 대해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오히려 사정당국을 거들었던 것은 본연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식인의 상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가끔 이른바 언론을 잘 탄다는 지식인들이 당시 언론에 쏟아 냈던 발언의 기록을 가끔 다시 들추어보면서 ‘지식이 사회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역설을 자주 떠올립니다. 매일 여론을 오도하는 글재주나 말재주를 ‘지식’으로 포장해서 사회의 일반적 자정(自淨) 기능까지 마비시키는 ‘시론’ ‘칼럼’ ‘논단‘이 얼마나 많은지… 무엇보다도 지적 성실성과 사회적 책임성이 지식인이 견지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법 형식이 아니라 ‘체제(regime)’라고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송두율 사건’의 본질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한번 국가보안법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이뤄졌다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악법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이 법이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조롱거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민주화’의 성과를 치켜세우다가도 이 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불가의 화두처럼 ‘송두율 사건’보다는 국가보안법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 법은 알게 모르게 생활세계 속에서 여전히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도 민주화의 성과만을 쉽게 이야기하는 바탕에는 일종의 체질화된 ‘레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바로 그 국가보안법이 정작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든지 콤플렉스는 모두 다 인간이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지요.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사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행정부 권력과 과반의 의회권력을 갖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한계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역시 ‘레드 콤플렉스’ 때문입니다. ‘빨갱이’로 몰리면 당도 국회의원 자리도 모두 다 끝이라는 공포와 불안이지요.”

-파기환송심 선고 이후에 발표하신 성명서에서 최근 주독 한국대사관의 국정원 파견 직원인 김형수 참사가 선생님의 석방을 도운 ‘코레아 협의회’를 조사했다고 밝히셨습니다. 국정원이 여전히, 그것도 독일에서까지 선생님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평소에도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가 있었습니까. 김형수 참사 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실 계획인지요.

“이 사실도 한국민주화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신정권이나 군부가 집권했을 때는 항상 있었던 일이었지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다시 일어나는 일이라 나도 심상치 않게 받아들이고 대응책도 강구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정보기관이 독일법에 의하여 인가된 기관이나 독일인을 감시하고 협박하는 행위는 독일에서는 당연히 위법행위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현재 이 분야의 전문 변호사와 상의 중이고 금명간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따를 것입니다.”

-성명에서는 또 대사관 측의 이 같은 행태는 국내의 정치상황, 즉 왜 평화적인 촛불시위가 두 달 넘게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자기반성 대신에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공안정국을 형성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국내에서도 여러 학자들이 촛불시위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선생님은 촛불시위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두 달 이상 자발적 평화적 시위가 계속될 수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정당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거리의 민주주의’는 당연히 발현되게 마련입니다. 오히려 무력해진 민주주의에 동력과 활력을 주지요. 두 달 이상 지속된 자발적인 시위는 현재 한국의 정당민주주의의 결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새로운 시위문화를 발양시키고 있는 점도 ‘거리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함께 높이고 사회적 동의도 많이 끌어낼 수 있는 요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촛불시위가 남긴 것 가운데 하나가 흔히 ‘조·중·동’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보수언론이 자신들의 실체를 일반 대중들에게도 남김없이 알렸다는 사실입니다. 4년 전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면서 선생님은 “썩은 냄새 나는 ‘조·중·동’이 있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에 희망은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는지요. 그리고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요.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사회를 멍청하게 만드는’ 지식의 첫 번째 자리를 아직도 이른바 ‘조·중·동’으로 표현되는 언론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돈으로부터 독립해서 사회적 진실을 밝히고, 시대와 호흡하며 동시에 이를 선도하는 책임감을 지닌 언론을 나는 그립니다.”

-선생님의 혐의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은 다음날인 25일 아침 서울에서 발간되는 종합 일간지 가운데 1면과 사회면 등을 통해 그 사실과 의미를 제대로 전달한 신문은 경향신문이 유일했습니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몰고갔는데 간첩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면 어떤 식으로라도 보도했어야 하는데도 모두들 침묵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진보개혁진영조차 교수님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또는 일부러 덮어버린 까닭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렇지요. 대부분 ‘판결’에 대한 단순 보도에 그쳤습니다. 이 사건이 애초부터 국가보안법 때문에 발생했기에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군요. 조·중·동도 마지 못해 보도를 했는데, 오마이뉴스와 더불어 진보적인 인터넷 매체의 쌍벽을 이룬다는 어느 매체는 아예 한 줄도 보도하지 않더군요. 이번 판결에 대해서 아예 무관심하거나 불편해하는 ‘진보매체’가 있다는 사실에 좀 씁쓸해집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6자회담이 진척되면서 북·미 관계는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는 반면에 남북 관계는 대화 채널조차 실종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일종의 ‘부정(否定)의 정의(定義):definitio ex negativo’만을 아는 것 같이 보입니다. ‘햇볕정책’을 정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단선적인 사고방식이 결국 동북아를 둘러싼 새로운 국제정치적 흐름까지도 놓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금강산 관광객의 피격 사건도 과거의 남북관계 정도라면 그동안 해명도 되고,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항상 공존해 왔는데 너무 서둘러 불연속성과 단절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대승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충분히 현안을 해결할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현재의 대북정책으로는 북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를 결코 쥘 수 없다고 생각하며, 특별한 상황변화 없이는 현재의 남북긴장이 꽤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도 바꿀 수도 있으니 현재 조성된 위기를 전향적으로 처리하려는 의지를 먼저 분명히 해야겠지요.”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는 진보 개혁세력이 살아남으려면 ‘민주 대 반민주’와 같은 낡은 프레임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의제의 설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진보개혁 세력의 의제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진보세력이 추구하는 보편적 과제는 물론 과거의 것들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시기에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이 - 계급적 갈등의 해소나 분단극복과 통일- 모두 불필요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큰 이야기’와 생태계 문제, 양성평등의 과제, 이주자 문제와 같은 이른바 ‘작은 이야기’를 서로 잘 ‘짜깁기하는(patchwork)’ 과제에 대해서 늘 이야기해 왔습니다. 한국의 비판적 지성계가 자신의 폭을 확장하고 이론과 실천의 질을 높일 때 이 과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윤이상이라는 이름과 결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을 듯합니다. 한국 출신으로 독일에 와서 각각 학문과 음악에서 대단한 업적과 명성을 쌓았는데도 정작 고향에서는 핍박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루이제 린저의 표현을 빌린다면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쯤이 될까요. 실제로 두 분은 오랫동안 각별한 관계를 맺으셨고, 윤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위원장을 맡으시지 않았습니까.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분의 친교관계나 윤이상 선생의 면모를 말씀해주십시오.

“음악도, 또 학문의 세계도 사실 정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민족적 현실에 대한 우려는 작곡가인 윤 선생님과 철학전공의 나를 하나되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비록 전문분야는 달랐어도 민족문제에 따른 정치적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나 분석에서 우리의 결론은 거의 같았습니다. 모든 문제에 극히 열정적이었던 윤 선생님과 함께 나눈 시간은 항상 예술, 철학 그리고 민족문제의 핵심을 다루었던, 정말로 귀중한 자산입니다. 윤 선생님의 고향인 경남 통영이나, 내 부모님 고향이어서 어릴 때 자주 놀러 갔던 제주도나 모두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둘 다 생선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곳은 싱싱한 횟감을 구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도 내가 윤 선생님 댁에 들를 때마다 늘 맛있는 생선회를 내 놓으셨지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쏟은 학자이신데,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운 ‘투사’라는 무거운 이미지가 더 강한 듯합니다. 이런 이미지 탓에 생활에 불편을 겪으시거나, 한국인들을 만날 때 심리적으로 위축된 경우가 있었습니까.

“듣던 이미지와 실제인물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소리를 종종 듣지요. 이미 40년 넘게 사는 이 땅을 무시한 나의 생활세계는 어차피 성립 불가능합니다. 이곳에서 내가 접하는 한국세계는 제한되어 있지만, 이래저래 국내외에서 지인들도 가끔 들리고, 이곳의 유학생들도 찾아 옵니다.”

-요즘 하고 계신 연구나 최근의 관심사를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곧 정년퇴임이시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퇴임 이후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마지막 강의가 될 내년 여름학기의 강의록을 제출하라는 통지를 오늘 받고 사실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1971년 겨울학기부터 시작해서 - 서울에서 구속되었기 때문에 강의하지 못한 두 학기를 빼고 - 꼭 38년간 섰던 대학강단을 떠나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한번도 중복된 강의를 하지 않았던 것을 내심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내년 가을에 출간될, 나의 학문적 편력을 유럽의 지성사적 흐름 속에 비추어보는 일종의 자서전인 ‘한 경계인의 지적 방랑(Die intellektuellen Wanderjahre eines Grenzgaengers)’을 현재 집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에 돌아오실 계획은 있습니까.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한국에 갈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살고 있는 땅이 그곳이지만, 아직은 구체적인 방문계획이 없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 있는 선생님의 지인이나 ‘팬’들에게 인사말씀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정말 어려울 때 나와 내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펴준 그 많은 분들 덕택에 이번의 법적인 승리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귓가를 맴도는, 용기와 희망을 준 그때의 다정한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망향의 외로움도 달랩니다.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때까지 각자가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ㆍ유학중 在獨 반유신단체 결성 입국금지
ㆍ37년만인 2003년 방한, 北 방문혐의 구속

◇ 송두율은 누구인가

 

 

‘ 경계인’ 송두율 교수(64)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72년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74년 재독 반유신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부가 그를 ‘반정부 인사’로 분류, 입국을 금지시킨 탓이다. 91년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로 초청되는 등 귀국할 기회가 몇차례 있었으나 같은 이유로 모두 무산됐다. 독일로 떠난 지 37년 만인 2003년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다가 73년 북한을 방문했던 혐의 등으로 검찰에 구속기소됐다. 2004년 7월 항소심 재판에서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24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 선고로 송 교수 사건은 5년여 만에 종료됐다. 송 교수는 71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사회학·사회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내년 여름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한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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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기환송심>의 선고를 듣고 2330-2407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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