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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민족의 장래도 큰 의심 없으면 큰 깨달음 없다”

[특별인터뷰]베를린에서 만난 송두율 교수

 2008년 12월 10일 (수)

                                                        ⓒ 민족21, 서유상 기자

 


지난 7월 송두율 교수가 지리한 법정공방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지 한 달 후, 《민족21》이 베를린에서 송 교수를 만났다. 기자는 늦은 밤까지 무려 9시간 넘게 그의 집에 머물면서 긴 대화를 이어갔다. 송 교수와 부인 정정희 여사는 취재진을 위해 정성어린 요리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회한과 아쉬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교차했던 당시의 대화록을 독자 여러분께 공개한다.

한 가지 고백해야겠다. 사실 기자는 그를 인터뷰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독일에 간 이상 송 두율 교수를 만나긴 만나야겠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괜히 잊고 싶은 5년 전의 얘기를 꺼내 그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소심한 기자는 지하철역에서 그를 기다리는 순간까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막상 송 교수를 만나는 순간,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잘 왔다”며 손을 내미는 그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중심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그의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앞서가던 송두율 교수가 초록색 현관문을 열었다. 100년이 넘은 이 4층집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을 풍미했던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는 특이한 건축양식에 속한 건물이다. 부드러운 곡선과 간단한 문양을 살린 이 고풍스러운 건물에는 프러시아제국 말기에 주로 장군들이 살았다고 한다. 송 교수 내외는 20년 이상 이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야만적인 ‘국가보안법’이 우리에게는 벼락이었구나…”

집 안에는 김지하 시인 특유의 난(蘭) 그림, 작고한 이항성 화백의 판화들, 제주에서 활동하는 강요배 화백이 선물한 판화, 오른손 마비로 인해 왼손으로 붓을 잡고 쓰는 특이한 서예기법을 개발한 황욱 선생의 휘호 등이 걸려 있었다. 거실과 서재는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책상은 커다란 창문 바로 앞에 있다. 가끔씩 들리는 새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철학자의 집필공간으로 손색이 없었다. 송 교수 글의 행간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여백도 바로 이 집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집에는 부인 정정희 여사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잘 익은 수박과 직접 만든 허브냉차를 내왔다. 깔끔한 식기, 반듯하게 정리된 실내가 한눈에 봐도 안주인의 살림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송두율 교수는 5년 전에 비해 다소 야윈 듯 했다. 감옥에 있을 때 천식으로 심하게 고생한 이후 독일에 돌아와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지금은 많이 호전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고통도 그들이 겪었던 정신적 충격에 비할 수 있으랴. 정정희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TV를 보니 벼락을 맞고 나서 생긴 후유증으로서 기억상실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오더군요. 그걸 보면서 나도 생각했어요. 아, 한국사회의 그 야만적인 ‘국가보안법’이 우리에게는 벼락이었구나. 그 광란을 겪고 독일로 돌아온 이후, 오래 사용하던 통장 비밀번호며, 전화번호, 차 번호 등,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이른바 ‘송두율 사건’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휩쓸고 지나간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벼락을 맞았던’ 두 사람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정희 여사는 지난해 겨울 30여 년 근무하던 베를린예술대학 전문사서직에서 정년퇴임했고 송 교수 역시 내년 여름학기에 뮌스터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지루한 공방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보수언론이 광분했던 ‘조선로동당 후보위원 김철수 사건’치고는 어이없을 만큼 조용한 결말이었다. 그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은 언론에 단신으로 처리됐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마저도 잊혀지고 있다.

 

지난 7월에 무죄판결 받으셨는데요. 소회가 어떠셨습니까.

“어느 나라든지 불법적 현실이 있고 모든 법에는 이상과 현실의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일제의 법을 해방 직후 그대로 베낀 것이죠. 지구상에 이런 법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어요. 그 후 60년이 지나는 동안 남북관계와 국제정치가 얼마나 많이 변했습니까. 집행유예를 선고한 고등법원도 내가 독일여권으로 방북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죄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그런 기준이라면 외국인들도 다 처벌해야죠. 뉴욕 필하모니를 인솔해 평양을 방문한 지휘자 로린 마젤도 음악으로 북 체제를 찬양한 셈이니 처벌받아야 되겠지요.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내 사건에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데 신중해야 된다는 취지인 것 같아요. 이 판결은 어떤 의미에서 법을 현실변화에 맞게끔 해석하려고 하는 조그만 계기는 됐다고 봅니다.”

송 교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독일에 돌아온 직후, 그의 주치의는 억울한 일 뒤에는 항상 증오의 감정이 따르기 마련이라며 한번 정신과 전문의 상담을 받아 볼 것을 권했다.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도대체 ‘증오’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막상 만나 본 송 교수는 부드러웠고 간간이 웃었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인상 그대로였다. 인터뷰가 무려 대여섯 시간 가량 계속되었음에도 단 한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나는 기자이기 이전에 고향에서 온 ‘반가운 손님’이었다. 가장 먼저 그에게서 느껴진 이미지도 ‘따뜻함’이었다.

송 교수 투쟁 때 언론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이미지가 강했던 정 여사는 실제 만나보니 쾌활한 사람이었다. 밝았던 그녀의 표정은, 그러나 대화가 깊어질수록 어두워졌다.

“세월이 상처를 아물게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가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보여요. 아, 아직도 이렇게 피가 흐르고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 상처는 말로 표현 못해요.”

그녀는 전문의와 상담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독일 심리상담자 중에 그녀의 경험을, 한국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5년 전 두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옥중에 있던 송 교수와 밖에 있던 정 여사의 경험은 또 다르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가했던 정신적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사람은 오히려 부인 쪽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항상 주변을 살펴야 되고 늘 긴장을 해야만 했어요. 어느 날은 이쪽에 앉은 사람이 날 빤히 쳐다보더니 ‘송두율 교수 부인이군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곧 ‘아닌데요’ 했더니, 조금 더 있다가 ‘맞는데’하면서 똑바로 쳐다보는 거예요. 불길한 생각이 들어 얼른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어요.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지요.”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두 아들이 받은 상처였다. 두 아들은 난생 처음 밟은 부모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간첩 혐의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10여 년 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가서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신변문제가 걱정스러웠던 송 교수 부부는 아들들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부모가 난 땅을 밟으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던 자식들을 보면서 송 교수 부부의 가슴은 쓰라렸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송 교수의 사건을 담은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송 교수가 독일로 돌아간 다음 우리 모두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건으로부터 다들 떠나버린 것이다. 관련된 모든 활동과 논의는 종결되었다. 그 어떤 비판적 성찰이나 평가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 사건을 ‘송두율 개인의 사건’으로 간주했지 ‘한국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5년 후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시대의 업(業)’

5년 뒤,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부활을 다시금 목도하고 있다. 오세철 교수 사건을 비롯해 최근의 실천연대 간부들 구속까지 ‘촛불 화풀이’로 시작된 공안탄압의 칼춤은 적당히 멈출 기세가 아니다. 우리가 풀지 못한 시대의 업(業)은 그렇게 다시 돌고 돌아왔다.

이번 사건이 송두율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됐지 한국 사회의 성찰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한국을 떠남으로써 이번 일이 마치 없던 것처럼 돼버렸지요.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 심지어 북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조차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정부 비판세력은 다 뿌리를 뽑겠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누구라도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일반적 상식을 가진 세계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것처럼 야만적이고 기형적인 법이 없지요. 국가보안법 체제가 있는 한 한국은 결코 민주화된 나라로 인식될 수 없어요.”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접한 송 교수는 한동안 한국의 인터넷을 보지 않았다. 글도 쓰지 않았다. 당시 그는 깊은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요즘에도 한국이 왜 저런 체제를 택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물론 프랑스도 ‘건달’같은 사르코지를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전반적으로 유럽은 좌우익의 상호견제력이 강하고, 또 지식인 사회도 쉽게 휘둘리지 않지요. 적어도 여기 우파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어요. 돈이나 친미면 만사형통이라는, 한국 특유의 천박한 보수주의와는 다릅니다. 유럽은 점차 하나로 되고 있어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인데 지금 정부는 아직도 속 좁게 언론통제나 할 생각을 하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르고 있으니 한심하지요.”

교수님 말씀처럼 최근 북미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가 심상치 않은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분명한 것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앞으로 더욱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든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영향력에 의해 남북관계가 촉진될 수도, 정체될 수도 있습니다. 남북이 이런 중국의 객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지요. 남북관계는 수사적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상생과 공영을 지향하는 길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해 중국이 오히려 걱정할 정도니 사태는 심각합니다. 금강산 문제만 해도 그래요. 기본적인 상호 신뢰만 있으면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겠지요.
6·15공동선언이나 10·4 선언 같은 중대한 약속마저 묵살해버리니 신뢰가 생길 수 있겠어요? 또 안타까운 것은 남쪽 사회에서 미국을 향해 한반도 문제를 악화시키지 말라,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약속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시행하라고 주장해야 하는데, 그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군요.”


6자회담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큰 틀에서 동북아 평화체제 문제가 점차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6자회담이 앞으로 동북아 통합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독일 통일은 유럽의 통합과 통일 없이는 불가능했어요. 마찬가지로 한반도 통일도 동북아 통합과 통일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동방정책을 펼쳤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유럽의 화해와 안정을 위해 미국에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보수우익의 거물이었던 바바리아주의 슈트라우스(Strauss) 주지사가 제일 먼저 동독의 호네커(Honnecker) 서기장과 이야기했어요. 그는 브란트의 최대 적수였지만 대의를 위해 같은 배를 탄 것이지요.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군요. 또 동북아 문제를 얘기할 때 보통 남쪽 문제만을 생각하는데 이제는 남북을 아우르는 발상을 가져야 해요. 이명박 정부가 실용을 얘기하는데 미래의 청사진을 담는 철학이 없는 실용은 실용도 무엇도 아닙니다. 앞으로는 동북아를 국경이 아닌 지평선으로 보려는 노력도 절대 필요해요. 지평선적 사고는 처음엔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이 선이 끝없이 확장되면서 그 안에 남과 북을, 한반도와 대륙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동북아 문제를 새롭게 사고해야 합니다.”

내년 여름이면 정년퇴임인데 퇴임 후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평소 친분이 있던 은퇴한 정신과 교수 내외가 미국에서 얼마 전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그 분은 나에게 자서전 격의 책을 집필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더군요. 한 경계인의 지적 편력이랄까. 그래서 요즘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요. 은퇴 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생기니까. 동북아가 급히 돌아가는데 남북 간의 긴장은 또 어떻게 해야할지. 큰 비전을 찾는 사람들과 만나서 할 일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남·북·해외 한자리에 모여 ‘통일의 일구(一句)’ 찾고파

최근 출간한 책에서 남·북·해외 학자들과 함께 모여서 민족의 장래를 토론하고 싶다는 바램을 밝히기도 하셨는데요.

“우리가 통상 사회발전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사회가 무엇을 추구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현실성과 당위성의 문제는 한반도의 미래사회에도 등장할 것입니다. 통일사회의 미래를 이른바 ‘통일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얽매인 논의나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를 전제한 섣부른 시나리오를 보면서 더욱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도 통일문제의 현실성과 당위성을 묶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통일된 남북사회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하나의 말로 규정하는 숙제입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일구(一句)이지요. 그래서 남·북·해외가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 건설할 통일된 미래사회의 일구를 찾는 거지요. 참석자가 반드시 학자일 필요는 없고, 정치인·경제인·예술가도 참가하지만 효과적 토론을 위해 많은 참가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20명 정도, 논문 발표가 아니라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통일된 조국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해보는 것이지요. 분절된 상이한 경험세계로부터 하나의 미래지평을 함께 찾는 과제가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이상을 세울 수 있는 어떤 가치척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를 ‘아름다움’이라고 항상 이야기해 왔습니다. 사람마다 이 가치척도를 서로 달리 이야기하리라 믿습니다. 꼭 합의를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과정설명이 더 중요하지요. 5년 전 한국 방문이 남긴 깊은 상처로 인해 이 계획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벗어날 수 없는 내 평생의 업(嶪)

 ▶교수님께 상처만 준 나라인데 이제 그만 훌훌 털고 싶다, 잊고 싶다 그런 생각은 안 드십니까?

“가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어쩔 땐 너무 정 떨어질 때도 있지요. 그러나 업(業)이라는 게 있잖아요. 해탈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면 잊을 수도 있겠지만 분단된 땅에서 태어난 내게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한일회담 반대하고 도망다니기도 하면서 내 역사성과 사회성이 이미 만들어졌어요. 유학시절 박정희 정권의 유신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또 달라졌겠지요. 한국을 떠날 때 부친이 너는 이제 한국을 잊고 세계인으로 살라고 하셨는데 독일에 와서도 나는 한국인으로 살아온 셈이지요. 모든 인간은 헤어날 수 없는 각자의 업이 있는가 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 들어갔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건강도 좋지 못한 상황에서 너덧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댔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서둘러 녹음기를 끄고 인터뷰 사진을 마저 찍었다.

한참 동안 부엌에서 분주하게 일하던 정정희 여사가 다가와 물었다.

“해물스파게티 괜찮아요?”

송 교수가 ‘우리집 18번 요리’라며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루 종일 빵조각 하나로 끼니를 때운 터라 위장이 용트림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도 부인과 함께 부지런히 부엌과 식당을 오가며 음식을 날랐다. 철학자 송두율이 아닌 ‘남편 송두율’을 재발견하는 재미는 색달랐다. 샐러드 드레싱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 그의 18번 요리는 갈비찜. 결혼식 때도 하객으로 온 30여 명의 한국 친지들을 위해 손수 갈비찜을 준비했다고 한다.

정 여사가 내놓은 해물스파게티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녀가 직접 만든 토마토 소스와 고소한 해물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완벽한 맛을 냈다. 거뜬히 한 접시를 먹어치우자 송 교수가 다시 그만큼의 스파게티를 접시에 덜어 준다. 그가 준비한 이태리 와인은 플로렌스가 위치하고 있는 토스카나 지방의 바롤로(Borolo). 이 지방은 산세가 부드럽고 완곡해서 꼭 한국의 산등성이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밟을 수 없는 고향 땅 대신 마시는 ‘위로주’인 셈이다.


잘 숙성된 와인처럼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도 무르익어 갔다. 부부는 이미 20대에 학위를 마친 두 아들 얘기를 많이 했다. 첫째아들 준(儁)은 화학자로 독일에 있는 세계 최대 화학기업의 연구원으로, 둘째아들 린(麟)은 미국에서 소아과 전문의로서, 또 전염병 전문가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제3세계 오지를 찾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겪은 충격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두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숙소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두 부부와 함께 집을 나서는 찰나, 거실에 걸린 ‘大疑之下 必有大悟(대의지하 필유대오)’라는 글귀가 가슴을 쳤다. 큰 의심이 없으면 큰 깨달음도 없다. 민족의 업을 푸는 방편이 혹시 저 글귀에 담긴 것은 아닐까.

국가보안법 체제, 분단체제를 근본적으로 회의하지 않고서 끝없는 분열과 고통의 수레바퀴를 과연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시대의 업을 온몸으로 짊어졌던 한 철학자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 민족21 (http://www.minjog21.com) , 서유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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