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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2009년 06월 08일

김귀옥 / 한성대, 사회학

 

이 글은 지난 531일 6.15유럽공동위의 강연회에서 발표(연사 김귀옥 교수)된 내용 전문다.

 

국문요약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월남/월북은 적대적이거나 공존하기 어려운 코드로 자

리 잡혀 있었다. 즉 월남가족에게는 ‘반공전사’, 월북가족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

는 낙인이 사회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진행되고 있는 탈냉전의

훈풍 속에서 한반도의 월남과 월북에게 드리워져 있던 반공전사와 빨갱이의 정체

성이 내부적으로나마 조금씩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담론 분석을 토대로 하여 우선 냉전 시대 월남가족 정체성과 월북가

족 정체성이 어떻게 담론되었으며 냉전시대에 월남가족이나 월북가족의 존재 방식

을 살펴보고, 탈냉전시대 남북 이산가족 상봉 과정에서 보이는 이산가족에게 내면

화되어 있던 냉전적 낙인의 변화상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남북에 걸쳐

이산가족의 새로운 공동체, 이산 다문화가족의 형성 가능성을 짚어보았다.

주요어

이산가족 정체성, 반공전사, 빨갱이, 다문화가족, 이산가족 공동체

김귀옥 한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사회학 전공. freeox@hansung.ac.kr

* 이 연구는 2009년도 한성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과제임.

** 이 논문은 2008년 12월 6일, 연세대학교 인문학 특성화사업단 주최 국제회의인 “문화, 정체

성, 디아스포라”에서 발표한 이후 수정·보완을 거쳤다. 부족한 논문에 대해 훌륭한 논평을

해준 이우영 선생님(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박명림 선생님(연세대학교 교수)과 익명의 심

사 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한 꼼꼼하게 읽고 수정하는 데 도움을 준

김아름(동국대학교 박사과정생)씨의 수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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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서구에는 ‘이주’라는 배경을 담은 픽션이 많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자본

주의 시장과 함께 여러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고, 노예 이

주 역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등장하였다. 특히 20세기 양차 대전에는

수많은 난민이 양산되었고 대량의 난민 이주가 있었다. 전후 미국의 부흥기

에 생산된 수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의 매체에는 전쟁과 이주라는 배경

이 깔려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도 기준에 따라서는

이민 문학으로 볼 수 있다. 갱스터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대부」

도 미국 내 이탈리안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민 코드의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선택’이라는 실존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스타이론(W. Styron)의

소설,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76, 1982년 영화 제작)」(W.

Styron, 1992[1979])은 폴란드 이주자의 비극적인 미국 정착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한국에서 큰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으나

1980년대 초 이 영화에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열연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

의 반열에 올랐다. 소피와 같은 난민에게 던져진 선택은 자유의지가 허용되

지 않은 채 그를 한계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 소설은 영화를 넘어 생사

기로의 한계 상황에서의 인간 또는 어머니의 ‘선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 학계에서도 관심을 끌었다.1)

한계 상황에서 소피가 한 선택은 한국의 이산가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산의 당사자들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면 지난 사회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반면, 지난 사회의 것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수 없으며, 결코 두 가지를 동시에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이

건넜거나 건너야 할 이산의 강에는 ‘소피의 선택’이 언급하지 않은 상황이

또 하나 작동하고 있다. 이산의 강 저편과 이편에는 남(한)과 북(한), 좌와

1)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비극을 증명하는 데에 쁘리모 레비의 자살 사건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증언하기 위해 남은 인생을 보내고 1987년 홀연 자살 하였다(서경식, 2006).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33

우, 동과 서라는 거대한 냉전의 세계가 가로놓여 있었다. 1950년대 냉전이

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 난민(refugee)으로서의 상황에서 이산자의 남

과 북의 선택에는 자유로운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산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헤어져 남겨진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산가족은 운명에

맡겨진 존재이며, 자유의지란 거의 박탈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

는 가족이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떠나간 가족을 부인하고, 떠나간

사람을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배제시키고 심지어 국가적 ‘사망’을 신고해야

했다. 설상가상 남아 있는 이산가족이 떠나간 가족을 부인하더라도 그 땅에

서 항상 불안정한 존재, 낙인찍힌 존재, 경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도 이산의 주제나 배경을 담은 수많은 픽션이 있

다. 이산가족의 만남과 결별을 직접적 주제로 담은 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_길소뜸_(1985)은 시기적으로는 1983년 한국방송공사가 획기적인 사업으

로 추진한 “이산가족찾기”운동을 홍보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영화

는 내용면에서는 만남의 고통과 어쩔 수 없는 결별의 당위성을 드러내고

있고, 또한 이산가족의 재회의 기쁨보다 불행이 더 큼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산문제를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산의 코드로서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는 이문열의 _영웅시대_와 _변경_을 꼽을 수 있고, 이 둘은 동전

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체제와 이념을 선택하여 월북한 아버

지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생존 외에는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던 이산가족의

이산 후 이야기이다. 남아 있는 자는 떠난 사람에 대해 침묵했다. 법적 사

망이나 사회적 침묵으로 인해 생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불안해하거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산가족에게 항상적인 불안함이 존재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산가족의 귀환 가능성이고, 그 귀환은 ‘간첩’ 문제와

연결될 소지가 있었다. 간첩으로서의 아버지나 가족의 귀환의 가능성은 이

산가족을 항상적인 국가적 경계의 대상, 또는 비(非)국민으로 만들었고, 연

좌제에 의해 법적인 비가시적 존재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측면은 냉전시대

남이나 북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진행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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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이산가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차츰 가져

다주기 시작했다. 서울, 평양,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개최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불길한 경계[휴전선] 저 너머에 나

의 또 다른 혈연이 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도록 하였다. _간 큰 가족_

(조명남 감독, 2005)이라는 영화는 월남한 아버지와 그가 남녘에서 꾸린

가족들이 극적 과정을 거쳐 북녘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만일 냉전시대라면 북녘의 가족의 입장에서는 월남한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과 그에게 다른 부인과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은 배반이며 반체제이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에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즉 북녘의 딸에

게는 남녘에 아버지의 아내와 함께 배다른 형제가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가족의 지평의 넓어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탈냉전적 이산가

족의 담론, 즉 화해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어쩌면 그 가능성은 월북한

아버지가 또 다시 형성한 북녘 가족과 남녘 가족이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하나의 가족공동체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월남/월북은 적대적이거나 공존하기

어려운 코드로 자리 잡혀 있었다. 즉 월남가족에게는 ‘반공전사’, 월북가족

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사회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한쪽

에서는 그러한 사회적 낙인을 개인이 적극 수용하여야 했고, 또 다른 쪽에

서는 그 낙인을 거부하거나 차라리 망각을 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낙인은 사회적 거울이 되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 정체성으로 공명되었다.

21세기를 전후하여 두 개의 대립적이고 견고할 것 같았던 이산가족의

정체성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또한 이산가족 1세대의 생물학적 규모의

축소도 단단했던 정체성을 희석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많은 전후(戰後)세대2)들은 이산가족을, 금강산에서 벌어지는 이산가족 상

봉행사를 통하여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정체

2) 1953년 7월 27일 전쟁 이후 출생한 세대들로 정의내림.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35

성에서부터 정말 자유로워진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

는 현지 조사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산가족들을 통하여 과연 나이 변수에

따라 견고한 냉전의식이 해체되거나 유사한 변화가 과연 일어나고 있는가

를 종종 의심하게 된다. 약간의 변화라도 왔다면 그건 나이 변수 때문이라

기보다는 변화된 객관적 환경이 나름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세계적 탈냉전과 남북 관계의 탈냉전이 중요한 전환점(critical turning

point)으로 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탈냉전적 질서의 변화는 경계 안에

갇혀 있던 의식으로 하여금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서서히 가져오

는 게 아닐까 싶다.

21세기 진행되고 있는 탈냉전의 훈풍이 한반도에 이르러 냉온을 반복하

고 있지만, 이미 월남과 월북에게 드리워져 있던 반공전사와 빨갱이의 정체

성이 내부적으로나마 해체되어 ___________가고 있다.

이 글에서 이산가족은 이산의 당사자, 즉 월남 당사자와 월북 당사자를

포함한 그들의 남한과 북한의 가족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월남

가족은 월남인과 그의 남한 가족을 가리키고, 월북가족은 월북인이 남겨둔

남한 내 가족을 가리킨다.

또한 이 글은 담론 분석을 토대로 한 글로서 우선 냉전 시대 월남가족

정체성과 월북가족 정체성이 어떻게 담론되었으며 냉전시대에 월남가족이

나 월북가족의 존재 방식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탈냉전시대 이산가족의 새로운 공동체 형성 가능성을 짚어보

고자 한다.

2. 냉전 시대 엇갈리는 정체성

냉전 시대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비(非)국민을 생산했다. 법률적 지위

를 누릴 수 없었던 수많은 반정부 인사, 사회운동가는 말할 것도 없고 연좌

제의 너울에 씌워져 있던 월북가족 역시 비국민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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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권리가 제약되어도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고, 비가시적인 존재로서 살아

야 했던 사람이 바로 비국민이라면 반공전사로 비친 월남가족은 어떤 정체

성을 가지고 살았을까?

1) 반공전사 정체성

요즘 우리 사회에서 월남인은 늙어가는 실향민이자 이산가족 상봉식에서

눈물바다를 이루는 동정어린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반공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 그들은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인 ‘반공전사’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어느 월남 실향민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애절한 실향민으로 동정받기를 거절했다.

고향 떠나온 지 근 반세기가 된 지금 우리 실향민들은 울다가 지쳐 이젠

눈물마저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런 심정을 이쪽 사람들이나 젊은 기자들

이 알 턱이 있겠어요. 그들은 실향민이면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눈

물을 흘리며 비통에 빠져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에는 감격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신문이나 TV에 보도하기 위해 일부

러 연출시키는 것은 실향민들을 깔보는 태도예요. 실향민이라기보다는 망

명객이라는 생각을 더 갖고 있는 우리들은 사소한 것 가지고 울고 웃는

꼭두각시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줬으면 합니다(이대욱, 1995; 강조는 글쓴

이 주).

1995년 방북했던 한 기업인이 북한에서 가져온 흙을 월남인에게 나눠

주는 현장에서, 위 인용문의 주인공은 월남인에게 고향 흙 한 움큼을 받아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연출시켰던 텔레비전 기자에게 위와

같이 호통을 쳤다.

그에 따르면 월남인은 한때 ‘자유 민주질서를 수호’하며 반공 국가 건설

의 주역으로 맹위를 떨쳤던 사람이었고, 월남인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20, 30대 청년시절 애국의 사명을 안고 반공 전선의 맹장으로, 전위대원으

로 나섰다. 1948년 제주 4·3 항쟁 당시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회’(1대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37

위원장 선우기성, 재건 위원장 문봉제 등, 이하 ‘서청’)는 1948년 8월 15일

정부 출범 후, 군소 반공청년단체들과 함께 ‘대한청년단’(이하 한청)으로

흡수되지만 서청의 명성은 식을 줄 몰랐다. 서청은 1945년 8·15 해방

이래로 우세를 점한 좌파와 민족주의 온건파 연합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던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와 매사에서 대결하였다. 반탁운동에 몸

을 던졌고, 1948년 4·3제주항쟁,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 당시에도 정부

당국의 비호 하에 정규 군·경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며 맹렬한 기세로

레드 헌트(red-hunt)에 앞장섰다. 또한 ‘호림부대’와 같은 무장을 갖춘 유격

대로 편성되어 북한지역을 침범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김귀옥, 1999:

222).

(1) 반공전사의 숨겨진 역사

월남인을 조사하면서 다소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월남인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개 그들의 가족도 자신을 반공주의자로 칭한다는 점이다. 지

난 반공 국시 하에서 월남가족이야 말로 반공적 국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월남인 스스로 반공의 화신, 반공전사로 자칭해왔듯 한국 사회에서도 그

들에 대해 투철한 반공전사로 인식되어 왔다. 어쩌면 지난 반공 국시 하에

서 월남가족이야 말로 국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에게 월남가족이 반공전사로 비쳐진 데에는 당사자들이 월남하게 된 동기

와 관련이 있다. 물론 실제로 반공·반북 활동을 하여 월남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이 많다. 한국전쟁 이전에 38선 이북에서는 신의주학생반공의거

(1945. 11. 23)나 오산학생반공의거(1947. 5. 23), 함흥반공의거(1946. 3.

13) 등과 같은 크고 작은 반공·반소시위3)들이 있었다. 반공사건이 생기면

3) 1945, 46년경 북한에서 일어났던 많은 반공 소요사건들은 소련의 불법적인 행동이 계기가

되어 촉발되었다. 함흥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소련군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가

운데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았다. 당시 승전국들은 패전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았던 관례

처럼 피통치국에서 전쟁배상금에 해당하는 물자를 몰수하듯 북한에서도 그러한 범법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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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주모자들은 사건 발발 즉시 월남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혐의가

없는 관련자는 잔류하게 되는데, 북한 공안 당국이나 주변으로부터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함흥 사람 엄대화(가명)가 그런 경우이다. 그는 함흥에서

한국전쟁 전 교원생활을 하였는데, 전쟁이 임박하여 동료교사 간에 감시가

심하여 학교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한국전

쟁이 나고 한국군이 이북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그도 대한청년단에 가입하

여 반공활동을 하다가 1950년 12월 후퇴하는 한국군경과 함께 월남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반공·반북의 정치적인 명분으로 월남했다고 할 수 있는

정황이 뚜렷하다.

그런데 그러한 반공의 월남 동기를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원자탄 투하 소문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피난한 사람들, 원산

이하에 도망가면 살 수 있다고 내려온 사람들, 국군이나 미군, 경찰, 대한청

년단의 후퇴 수송에 동원되어 월남하는지도 모른 채 내려온 사람들, 군경에

의한 집단 소개령에 따라 방향도 모른 채 내려온 사람들, 한 밤 중 유격대원

들의 위협에 신발도 못 신은 채 고향을 떠난 사람들…… 문인협회 부이사

장이었던 김시철도 그런 사람이었다.

“원자폭탄을 피할려면 함흥까진 내려가야 산대!” 이런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눈덮인 국도는 북쪽에서부터 밀어닥치는 군인들과 피난민 행

렬로 새까맣게 불어났다. 한편 성진시가에 이르는 쌍포고개는 그새 국군

들에 의해통행이 제한 받기 시작했고, 나중엔 노약자를 뺀 젊은이들만 통

과가 가능해졌다(김시철, 1995).

전시 월남인 중 상당수를 월남하게 한 비밀은 바로 ‘원자탄’ 투하설

(Cumings, 1997: 290~291; 김귀옥, 1999: 247~249; 박명림, 2002: 719)

이었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 원자탄 투하는 없었지만, 1950년 12월 전후하

여 동아일보에도 만주 등지에 대한 원자탄 투하계획이 집중으로 보도되었

고, 월남민들을 집중적으로 남하 소개하는 데에도 원자탄 투하설은 주효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김귀옥, 1999: 248).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39

여기서 잠깐 이런 궁금함을 품게 된다. 한국인들에게 원자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이다. 1950년 당시만 해도 원자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을 패망시켜 ‘한민족을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킨 촉진제’(정근식·진주,

2005)로 인식되었고, 현재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인에게는 오랫동안 원자탄에 의한 직·간접 피해, 방사능

오염에 따른 원폭피해의 담론은 부재했다.4) 그렇다면 1950년 12월 5월

이후부터 한 달 여의 짧은 기간에 수십만 명이나 되는 월남인들을 교통수단

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피난하도록 만든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바로

영원한 제국일 것이라 생각하였던 일제를 굴복시킨 원자탄에 대한 ‘거대한

공포’였다. 그런 원자탄이 북한 및 만주 지역에 투하된다는 소문이 북한

전역에 퍼지면서 걸을 수 있는 사람들, 특히 ‘씨를 보전해야 할’ 젊은 남자

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그들은 생존의 본능에 따른 피난민이었을 뿐

피난의 반공의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은 반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왜 일까? 그들의 반공 담론은 어떻

게 월남가족들에게 내면화되었을까?

(2) 카인의 후예들과의 대결: 반공이데올로기의 수용 과정

과거 청산은 기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독재 시절은 당대 기억들만 억

압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사의 수많은 기억들

을 억압하고 왜곡시키거나 과장하여 왔다. 따라서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과

거 청산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둬진 기억을 회복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기억의 억압과 변형은 반공 국가의 반공장치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이

나 반공법과 연좌제, 기타 폭력적 반공 규율에 의한 공포를 통하여 일어난

다. 서청 대원들은 반공주의 구현을 제1의 목표로 삼아 ?#________폭력적인 도구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며 반공주의를 선전하였다. 해방 시기 서청

의 일원이었던 임일 등은 “1947년 봄 대전시 목동다리 공방전으로 사생결

4) 나아가 1950년대 당시에는 원폭에 의한 한국인 피해자는 최소 2만여 명이나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140

단의 불길이 올랐고 3.1절의 대전(하)천 좌익집회와 군제제사공장, 대전방

직공장 좌익노조를 깨부수는 것”(이경남, 1989: 132-133)과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다. 그들은 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아 방송과 지면 등 대중매체를

종종 활용하곤 하였다. 임일도 대전방송국에서 이북 실정 폭로방송을 내보

내거나 전북에서는 _전라민보_에 ‘북한 실정 진상기’를 연재하도록 폭력을

행사하였고, 반공계몽강연을 하는 등 문화적 형식을 빈 반공활동에도 주력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방식보다는 학교교육이나 문화적 양식을 매개로

할 때 그 효과는 보다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1960, 70년대 극성기에 달한

반공교육은 반공의 기억을 재생산하는데 보다 효율적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인 7월 10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즈음에 교육태도를 확

립하기 위하여 문교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일선 학교에 하달하였다.

(……)이 시점이야말로 진정한 반공교육이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절감되

므로 다음에 따라 확고한 신면으로 지도에 만전을 기할 것(……) 사회질

서 문란과 반공사상의 해이가 예상되는 바, 학생과 지역사회 주민선도에

힘쓸 것(김진경, 1998).

이러한 지침에 따라 일상적인 반공교육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문학

적 형식을 빌인 국어교과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반공교육이 이루어졌다

(김동환, 2008). 또한 6·25날이면 부르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

을……”과 같은 노래를 반복하여 합창하고 반공글짓기대회와 반공웅변대

회, 반공연사초청회 등은 의례적인 행사가 되풀이 되었다. 반공 강사로 학

교나 교회, 사회단체를 방문했던 김신조와 같은 전향간첩 또는 귀순용사는

반공에 대한 신념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아가 1970년대 마치 어른들

이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을 벌이듯 같은 시기 어린이들은 전국적으로 간

첩잡기놀이를 ___________했다.5)

5) 손정연과 김혜영의 구술은 2006~2007년에 진행된 “희망제작소”의 여러 가지 프로젝트 중

하나인 ‘하나된 평화의 나라’ 프로젝트(미간행)의 내용임.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41

우리가 간첩 잡기 놀이를 했어요. 그러니까 뒤에 야산들이 많으니까

학교 이제 일찍 좀 마치고 나면 초등학교 때에는 보통은 인제 뭐 곤충채집

이렇게 하면 몇 명이 독특했던 애들이 뭐 곤충채집이냐 간첩 잡으러 가자,

좀 더 멀리 들어가 보면 있다,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그 다음에 뭐 버스 요금 모르는 사람, 그 다음에 말투가

뭐 이상한 사람, 옷을 계절에 맞지 않게 입은 사람 뭐 몇 가지 유형을

펼쳐 놓은 게 굉장히 많았어요. 이런 사람이 있으면 신고합시다, 열 가지

유형 쫙 붙여놓고, 그거를 떼 가지고 우리가 들고 다니면서 간첩 잡으면

포상금 얼마다, 이러니까 간첩 잡기 놀이를 하자, 이래서 주로 우리가 여

자 애들이 좀 성격이 좀 별로 여자애 같지 않아가지고 주로 산에 봄이

되면 나물 캐러 많이 가거든요(손정연, 가명, 1964년생, 부산출신, 강조는

인용자).

그 시대 어린이 치고 간첩놀이 하지 않았으면 ‘간첩’이거나 너무도 얌전

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구술자인 김혜영(가

명, 1963년생, 서울 출생)은 “나쁜 놈은 괴뢰군이구, 도둑놈도 함께. 그게

거부감 없이 당연히, 그게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반공의 생체화에는 소설이나 문학적 양식의 반공물들도 앞장섰고,

특히 월남 작가들의 활동이 눈부셨다. 월남(평남 대동군 출신)한 순수예술

주의 작가로서 한국문단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황순원의 _카인의

후예_(1954)는 월남인의 반공 통념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근 문학가들은 황순원의 _카인의 후예_를 ‘좌익인물에 대한 하나의 고정

관념을 만든 출발’로 삼기도 한다(서은주, 2002; 김주현, 1997). 최인훈의

_광장_(1960)이나 남정현의 _분지_(1965), 김원일의 _노을_(1978), 황석

영의 _무기의 그늘_(1987)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쟁 소설들은 반공이데

올로기라는 자기검열장치에 의거하여 작성되어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반

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유임하, 2007).

반공주의 ___________이념을 확산시키고 일반 민중들에게 내재화시키는 데에 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만큼 효과적인 체계는 없었다.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될

때 먼저 발을 내딛은 곳이 이북지역이고, 과거 유명한 기독인의 대부분이

142

이북출신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인철, 2003).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서 월남한 월남인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현대 한국 기독교

의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경직 목사는 한국 반공 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심인물로 우뚝 서있다.

월남인 1세대들이 만든 교회 중 한경직 목사로 대표되는 영락교회는 자

신의 50년 역사는 탈애굽과 반공정신·반공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락교회 창립50주년기념사업 역사분과위원회 엮음, 1998). 1940, 50년

대 한경직 목사의 설교집을 보면 많은 설교문에서 유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악마화가 그치지 않는다. 반면 미국우월주의, 기독교중심주의로

가득차 있고 불교나 유교에 대해서는 부패한 봉건종교로서 타자화시키고

있다. 한편 탈북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생활의 계승’,

탈애굽으로 견주고 있어 월남 실향민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심지

어 월남 피난민들에게 “돈을 쓰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선이 아닙니다. 의무

라는 것은 아니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영락교회창립 25주년기념사업위원

회 엮음, 1971)이라고 설교하였다. 또한 1948년 ‘여수·순천반란사건’때에

그는 지리산 일대에서 구국 전도 운동을 펼치면서 반공운동을 ‘십자군 운동’

으로 비유하여 이교도 ‘악마’, ‘카인의 후예’, 즉 좌익세력을 소멸시키는 일

로 비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월남가족들은 반공 대한민국의 어느 층보다도 반

공의식으로 잘 무장한 사람들로 형성되어 갔다. 그 한 예를 1972년 7·4남

북공동성명을 앞두고 정부가 실시한 “통일문제에 관한 이산가족의 의견조

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산가족의 대부분이 월남가족인 이 결과보고서에

서 일반국민들에 대한 통일의식 조사 결과에 비해 뚜렷한 반공의식을 보이

고 있다. 특히 통일방안에 대한 여러 조사 결과를 비교하면 이산가족이

무력통일을 ___________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북교류도 ‘북괴의

무력포기까지는 안된다’는 의견이 과반수(51.1%, 일반국민은 19.9%)를 점

하였다(국토통일원, 1972). 일반 국민도 반공주의에 동원된 것은 마찬가지

일지라도 보다 많은 월남가족이 뚜렷한 반공의식을 보이게 되는 것은 왜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43

일까?

(3) 생존의 버팀목: 반공의 조건 확보를 위하여

반공운동에 매진해온 월남인을 중심으로 보면 월남인=반공전사라는 등

식은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반공이라는 정치경제적 동기에 따른 월남의

기원이 석연치 않은 월남인들도 수많이 발견되고, 특히 한국전쟁 당시 피난

월남인들의 상당수는 반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 시기 반공=선, 비(非)반공=악이 될 수밖

에 없던 상황에서 그저 피난이 월남으로 이어진 비반공적 월남의 기원을

가진 월남가족들은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았을까? 또한 대다수의 월

남인들은 그들의 가족에게도 비반공적인 월남의 동기를 고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정작 월남인의 상당수는 북한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웠거나

불만족스럽지는 않았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월남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시기 경험과 함께 피난 시절의

경험은 반공주의라는 코드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기억으로 주조

되기를 강요당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반공은 의식의 창조(invention of

anti-communism)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피난민증을 가져

야 했다. 전시는 계엄령상태였으므로 신분증이 없다는 것은 언제 비명횡사

할는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은 필히 ‘피난민’으로서의 신분

을 입증 받아야 했다. 피난민의 신분을 획득하려면, 피난민 증명서를 받아

야 했고,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간첩’이나 북한 체제 동조자가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반공의 담론을 동물적

으로 체득하였고, 좌익으로 간주될 수 있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부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6)

6) 피난민증이 있어야만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식량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피난민증은 물리

적 생명줄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144

그런데 피난민증의 획득은 반공의 조건일지 몰라도 그 자체가 반공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획득 과정에서 북한에서의 기억들을

지우고 반공을 고백하는 일은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사

와 직결된 문제가 바로 국민방위군과 같은 제2국민병이나 군노무자(KSC)

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당시 제2국민병이나 군노무자란 가난한 사람들이

동원된 ‘총알받이’ ‘지게부대’로 인식되었다(김병곤, 1991). “돈 없고, 빽 없

는 사람만 군대간다”는 소문은 군 내부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백마부대

대장이었던 김운기(정의, 1991)는 “각종 전투를 하면서 부를 누리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식이 군에 들어왔다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습

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국회(국회사무처, 1951)에도

여러 차례 탄원서가 보내졌지만 여전히 “잡혀 간다”는 인식을 없앨 수는

없었다. 전쟁 후에도 특권계급에 의해 병무행정이 어지럽혀지는 마찬가지

였다. 1951년에서 1956년 말까지 유학간 3,769명 중(미국 유학 91% 3,424

명) 중 입대자는 1957년 2월말 현재 한 명도 없었다(윤종현, 1957: 185)고

할 지경이다.

그래서 월남인들도 군대 징집되지 않기 위한 비상 방법을 강구해야 했

다. 그것이 바로 피난민증의 나이 조작이었다. 남한에는 월남인 개인에 관

한 인적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월남인의 상당수가 ‘피난민증’이나 ‘거류민

증’을 만들 때 나이를 조작했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남편의 나이에

맞춰 자신의 나이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철저한 ‘자기 검열’ 의식이

작동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역설이 존재했다. 생존의 확보로서 피난과 반공을 택하

였고, 또한 비반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징집 기피를 택함으로서 오히려

징집 기피의 면죄부를 받기 위하여 무조건 정부를 지지하거나 순종적으로

동원되는 반공의 길을 택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비반공적 월남가족들의

상당수는 반공과 비반공의 정체성 혼동을 겪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

으로 그들은 정부와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김귀옥,

1999: 283). 이런 점이 반공전사로서 강력한 정체성을 갖춘 엘리트층 월남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45

인과 일반 월남인들과의 중요한 차이로 여겨질 수 있다. 아무튼 이런 과정

을 통하여 반공주의자로서의 월남가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2) 월북가족 정체성

지난 냉전시대, 한국 사회에서 월북인하면 바로 빨갱이로 호명되었고,

월북인을 둔 가족, 즉 월북가족 역시 ‘빨갱이 가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반공 국시의 사회에서 빨갱이 가족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

만 해도 숨 막히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7)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의 표상

은 연좌제와 직결되었다. 연좌제의 너울이 씌워져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들로는 월북가족뿐만 아니라, 월남가족의 상당수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또한 전시 또는 전후 피랍 가족8) 역시 연좌제의 너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외 석방된 (전향수 포함)간첩, 정치범이나 반체제사범, 한국전쟁 당시

피학살 유족 등 그 범위가 꽤 넓었고, 종류도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층이 월북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9년도

현재 정확한 월북 당사자 수를 알 수 없으며 월북가족의 규모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북한에서는 월북 당사자(소위 ‘의거입북자’)를 30만명으로

보고 있다는 점과 남측 여러 전문가들 역시 10~30만명으로 추론하고 있다

는 점을 고려하여 30만명 내외로 추정할 뿐이다.9) 이러한 월북 당사자의

규모에 월북가족을 최소화하여 5배를 곱할 경우 50~150만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수십만 명에서 백 수십만여 명의 사람들이 비(非)국민으로서

살아야 했다.

이제 자신의 활동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월북가족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7) 물론 북한에 있어서는 반대의 이러한 유사 개념인 ‘복잡성분’이 존재하며, 냉전시대 외에도

경제난 속에서 사람들의 구분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8) 전후 피랍 미귀환자들은 정부에 의해 ‘관리대상’이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아 수시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했다.

9) 예외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은 소설가 김원일 선생이다. 김원일은 해방 이후부터

전시까지 대략 150만명이 월북했다고 보고 있다(신준영, 1998).

146

(1) 빨갱이 가족 정체성

월북가족 개인에게 월북인은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월북가족도 없다. 그

러나 국가에겐 월북인은 말할 것도 없고 월북가족마저 관리의 대상으로서

집단적 개념으로 존재했다. 즉 ‘빨갱이 가족’으로서.

국가에게 집단적 관리의 대상이었던 월북인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필수코

스로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1955년 인구census가 있긴 하지만 공식

적으로 월남/월북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10) 그러한 인구조사를 통해 월북

인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아래와 같은 문건을 통해 나름

대로 월북가족 동태 파악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강화군 양도면의 요징집자 명부

* 인용: 김귀옥(2007: 11).

위 자료는 과거 내무부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1923~25년생에 해당하는 남성에 대해 해당 지역 관할서에서

면장, 이장 등을 동원하여 조사된 자료로 추정된다. 또한 사진 파일의 해상

도가 낮아서 글씨가 분별되지 않으나 원 자료에는 분명하게 ‘월북’이라 기재

되어 있다. 비록 수기(手記)로 작성된 것임에도 이 문서는 공문서적인 성격

을 띠고 있다. 또한 요징집자 명부의 정확한 성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자료에는 20대 초반, 중반의 남성들의 동태를 세세하게 기록

10) 원적지 조사를 함으로써, 휴전선 이북에 고향을 둔, 즉 월남인의 규모를 449,929명으로

파악하였음(김귀옥, 1999: 68).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47

함으로써 개개인이나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정보자료집으로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월북 당사자와 월북가족은

국가의 손안에 놓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수 십 년 동안 국가는 월북가족을 성실하게 관리하였다. 정전 이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소위 ‘요시찰인 동태’ 범주에 그들은 포함되었

다. 서중석(797)에 따르면 1957년 당시 갑요시찰인11) 가운데 ‘월북도피자’

는 1만 7,858명에 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요시찰동태감시는 관할 경찰서에

서 담당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감시 경우에는 경찰보다 월북가족과 한 동네

에서 살았던 가장 가까운 동장, 이장, 지역 유지들이 담당했고, 그들은 요시

찰인에 대해 초안 형태의 동태 조사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북가족

들은 특이한 사항에 대해서는 관할 경찰서에 모두 보고되었고, 선거철이나

시국이 어수선한 철, 간첩이 내려왔다는 소식이 돌 때면 밀착감시를 받았다

(강화 교동 유현과 의철 등의 구술, 2007년 1월 현지조사). 국가 권력 앞에

서 월북가족은 항상 발가벗은 듯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월북가족 자신에게는 월북인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한 마디로

사라진 존재였다. ‘사라짐’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게 집안의 족보이다.

<그림 2> 강화군 송해면 어느 집안의 족보

11) 요시찰인은 특수요시찰인 또는 특요시찰인과 보통요시찰인 또는 갑 요시찰인, 을 요시찰인

등으로 나뉘었다. 여기에 야당세력을 포함하여 정부 비판자는 ‘시찰 요하는 자’로 광범위하

게 대상화되었다(서중석, 1999: 796~797).

148

위의 족보는 강화군 송해면 어느 김 씨와 인터뷰 하던 중에 접하게 된

그 집안의 족보이다. 족보에는 간간이 ‘실종’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있는

데, 김 씨에 따르면, ‘실종’은 대개 월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집안에 적지

않은 실종자가 보이고 위의 사례는 ‘학규’라는 사람이 그의 배우자와 장남인

중기와 함께 동반 월북한 사례로 파악된다. 학규에게 자식이 몇 명 있는지

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막내쯤으로 보이는 형기만 남겨져 있다. 월북가족인

형기에게 학규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또한 자기 자신은 어떻게 인식되

고 있을까? 어찌되었던 이런 사례는 어쩌면 대단히 양호한지도 모르겠다.

많은 집안에서 월북자의 상당수는 족보에 오르지도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또한 적지 않은 월북가족은 월북당사자들을 사망 처리하였다. 그들은 일

차적으로 월북 당사자들과의 사회적 인연을 끊을 수만 있다면 끊어버리고

자 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호적을 정정하면서 인우보증을 세우면 사망신

고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많은 월북가족들은 __________인우보증을 세우기 어려워 실

종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호적을 정리하도록 정부에서

허용하였으나 뒤늦은 사망 신고를 하기에는 더욱 어려웠다. 적어도 2인의

인우보증이 필요한데, 수 십 년이 지나, 월북인을 누가 인우보증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사망신고도 못한 월북가족은 월북인과의 사회적 인연을 끊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는 길이었다. 1950년대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25%나 되는 도시화율을 기록하는데 월북가족들도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행여 월북인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납북’되었다

고 말하였다. 냉전의 세월, 반공 국시 하에서 월북가족은 월북인과의 사회

적 인연을 끊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했다. 설령 사망신고가 안 되었더라도

많은 월북가족들은 월북인이 60살이 넘으면서부터 제사를 지낸 경우가 많

아졌다. 월북인에 대한 애도는 사실 자기 연민 또는 자기 위로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정말 월북인을 잊고 싶었을까?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49

(2) 한 월북가족의 망각 저편의 기억

한 월북가족의 경험을 통하여 월북가족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한다. 월북

인 유가족 모녀, 김연옥(가명, 1928년생, 경기 안성 출생)과 김민정(가명,

1944년생, 경기 안성 출생)을 두 차례 만났다. 처음 그 모녀를 만난 것은

2006년 3월 23일에 있었던 제13차 이산가족 상봉식이 있었던 금강산에서

였다.

<그림 3> 만남에서 헤어짐으로

* 촬영: 제13차 이산가족 상봉식(김씨 가족의 동의하에 촬영, 2006년 2월 23일과 25일)

그들은 한국전쟁 때 소위 ‘납북’당했다고 믿어온 아버지를 만나러 고모

2명과 함께 왔다. 첫 상봉의 자리에서 그들은 예상했던 만남을 했고, 아버

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딸 김민정은 긴장한 탓인지, 그리 격정적이

지 않았다. 그러나 2박 3일간의 만남 후 헤어지던 자리에서 딸은 “아버지

가지마, 아버지 가지마”를 한없이 외쳤다. 그녀는 한평생 못다 울은 눈물을

흘리며 설움에 복받쳐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참여관찰자의 입장에서 가장 관심이 끌렸던 사람은 부인이었다. 부인 김

연옥은 남편 김씨와의 55년만의 만나는 자리에서 시종일관 울지도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남편을 원망하기는커녕, 세월 탓으로만 돌렸다. 김연

옥은 마치 영화를 보듯 관조적으로 보며, 헤어질 때조차도 눈물만 비쳤을

뿐, 소리쳐 울지도,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2006년 12월 11일, 두 모녀의 상봉을 벼루다가 재회하게 되었다. 그들을

150

만나기 위해 수원으로 갔다. 수원 집은 김연옥의 외손녀이자, 김민정의 딸

의 집이었고, 4대가 같이 살고 있었다. 김연옥과 김민정은 원래 안양의 임

대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맞벌이인 김민정의 딸 부부의 두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머물고 있다. 그게 그들의 주 수입원이다. 김

연옥은 ‘국민기초생활연금수급자’로 지정되어 아껴 쓰면 한 달 생활은 할

만하지만, 그나마 실업자가 된 사위와 딸 내외를 도움을 줘야 한다. 게다가

그녀는 2005년 대장암 수술을 하여 손녀딸에게 큰 돈을 빚지고 있는 게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김연옥과 김민정의 삶 속에 깊숙이 내장되어 있는 이산의 코드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남편과의 마지막 술잔: 작별의 기억

김연옥은 일제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성노예로 공출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만 16살에 결혼을 했다. 남편 김**(1924년생)은 빈곤

한 소작농 집안이었다.

결혼을 하고서 이제 가서 보니께는, 재산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 땅도 하

나도 없고. 이제 옛날에 저기 안성 박**이라는 이네가 부자니께, (……)

거기 땅들을 얻어가지고서 인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인제 그거를 다 털어

가지고 인제 땅 값[소작료]을 치르고. (……) 농사를 지을려면 비가 안

와가지고, 논에다가 메물(메밀)들을 많이 갈았어요. 그래가지고서는 그걸

인제 맷돌에다가 타가지고 가루에다 쑥 썩어서 인저 그걸로 먹고. 그래

이모네 집에를 저기 나를 데려간 새댁이라고 데려갔는데 쑥 저 메물부침

개를 해주더라고. 쌀이 없고 그라니께(김귀옥, 2007가: 72).

가난한 살림에 말수도 적은 남편을 둔 김연옥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안일

로 날을 샜다. 그나마 시어머니는 자신이 첫 아이를 가진 해에 늦둥이를

가져, 큰 아이와 막내 시누이를 김연옥이 같이 키워야 했다. 그에게는 해방

의 기억도 전쟁의 기억도 모두 흐릿한 것이었다. 그에게 6·25는 동네 빨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51

갱이들이 집안을 들랑날랑하고, 남편은 어디엔가 피신했는지 집에 들어오

지 않고 하는 낯선 상황의 연속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는

생전 들어오지 않던 남편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우리 신랑이 날더러 술을 달려, 술을 달라고 그라믄서 잔 하나를 놓으니께

는 하나 더 놓으라고 그려, 그래서 “왜?” 그러니께 “둘이 한 잔씩 먹읍시

다.” 그려. 그래서 내가 “술 먹나? 술을 먹어, 술을 입에도 대보지도 않은

사람을 무슨 술을 먹느냐”니께, 나하고 한 잔씩 먹자고 자꾸 그려. (……)

“당신 저기 어머니 아버지 잘 모시고 계시라, 나 가서, 쪼끔 있다가 한,

한달쯤이나 있다 올테니께. 가서 부모님들 잘 모시고 애들 잘 길르고 그라

고 있으라” (……) 그래, 그라더니 어디가서 싹 다 없는거여(김귀옥, 2007

가: 74).

남편이 대작을 제안했던 날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1950년

‘9·28수복’이고, 북한의 입장에서는 ‘9·28후퇴’의 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날 남편 동네의 좌익과 그 협력자들은 동네를 떠나지만, 정확하게 어디로

떠났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소처럼 일하며, 남편은 떠나도 계속되는 시집살이

1951년 1·4후퇴 때에도 남편이 돌아올까 봐 피난가지도 못했다. 친정

언니는 그를 개가시키려고 했으나, 친정아버지는 개가를 절대 반대하여 언

니는 아버지와 옥신각신하였으나 “천벌을 받는다”는 아버지 말씀에 마음을

접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시부모님의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아들)보내놓고 나서는 우리 시어머니는, 그냥 저기가 되니께. 아들 언제

돌아오나 점 해러 댕기느라고 맨날 울고 불고 댕기시고, 두 노인네들이

그냥, 약주만 좋아해서 술 잡수고 맨날 논두렁에 가서 울고 그라면 가서

모셔오고. 그냥 노인네들이 그 난리를 치고, 이렇카고 하고 농사짓는 것도

내가 그냥 댕기면서 뭐 남자들하고 뭐 품앗이 해고, 했어도 내가 먼저

해놓고 (품앗이)일 댕기고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를 먼저 데려가고 그냥

152

이랬어(김귀옥, 2007가: 76).

그는 그냥 소처럼 일하기로 작정했다. 열심히 소작일을 하고, 품앗이를

하다 보니, 곱던 새색시는 사라졌다. 그 사이 첫째 딸은 병으로 죽고 막내

시동생과 둘째 딸을 포함하여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품팔이만

해서는 생활비가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낭구(나무) 장사를 안

했나, 빗자락(빗자루)을 메고 안 팔았나, 뭐 별 짓 다하고 살았어”라고 말하

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빚을 내서라도 부모님 환갑잔치는

반듯하게 해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시아버지 환갑도 혼자의 힘으로 치렀다.

이 사진을 언젠가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면 보여주리라 생각하며 곱게

간직했다. 그는 시부모님의 외로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술을 사드렸고, 시어

머니는 며느리에게 낮에는 호된 일로 괴롭혀 쉴 사이 없이 만들었지만, 담

배를 권하여 며느리의 고독을 달래주려고 했다.

그의 유일한 낙은 둘째 딸이 자라나는 모습이었다. 첫딸을 잃고 나자

잘 키우겠다는 의지는 컸지만, 둘째 딸은 없는 형편에 중학교를 마친 후

공장에 나가 노동을 했고, 역시 가난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이게

다 아버지 없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없이 치른 환갑잔치

정전이 되어도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도 고향을 등지고

중소도시로 이주했다. 아버지를 사망신고 하려고 했으나 인후보증을 해 줄

사람이 없어 아버지는 실종 신고 되었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아, 호적에는

아버지 김**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김민정은 아버지 생

일을 기억했다가, 아버지 환갑날 아버지 마을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했다. 그 직후부터 작게나마 음식을 차려 아버지 제사를 지냈다.

당연히 아버지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김연옥의 딸 김민정에게 아버지는 사진도 한 장 없는 상상속의 존재였

다. 6살에 헤어졌으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다. 2001년,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53

큰고모의 독촉으로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지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소

문으로는 “북한으로 간 사람들, 그 쪽에서 잘 살고 뭐 좀 특이한 사람 외에

는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여 기대감이 적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아

버지 쪽의 상봉 신청으로 김연옥 모자는 상봉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2006년 3월 23일, 기적처럼 아버지를 금강산에서 상봉했을 때, 속으로

실망했다고 했다. 어려서 김민정은 할머니의 말씀으로 아버지가 무척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게 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 모습이 키도 크고, 생각에 쫌 허여멀끔하고 막 이렇게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는데. 키도 작고, 노인네가 그냥 저기신거 같아서, 실제

우리 아버진가 이런 생각이 났었거던. (……) 인제 집에 와서는 내가 위안

을, 삼은 게 뭐냐면. 인제 그쪽에 자식이 많이 있으니까. 막, 그냥 무슨

이, 혼자 계신 거 보다는, 자식들이 있으니까. 돌아가셔도 잘 해서 돌아가

시겠지. 그러니까 그런 거는 마음에 위안이 되는데, 딱 저기, 가시는 거

보니깐 이렇게 걸음 걷는 게 아마 얼굴은 안 늙으셨어도 힘이 하나도 없으

신 거 같애. 병- 인제 좀 있으신 거 같고, 아 갔다 와서 그런 모습은, 마음

속 상하고 마음이, 생각하면 막 눈물 나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어(김귀옥,

2007가: 102).

김민정은 이산상봉을 하고 온 후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고,

3녀 1남의 북녘 동생들이 무척 궁금해졌다. 사진 속 형제자매들과 북쪽

어머니도 예쁘게 생겼더라고 자랑을 했다. 비록 가난한 형편에 딸에게 빚을

내어 아버지를 방문하고 왔지만, 기회가 되면 아버지와 북녘 형제들을 계속

만나 서로 형제자매로서 소식을 나누고 나중에는 부모 제사도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3) 냉전시대 월남/월북가족이 사는 법

냉전은 월남가족과 월북가족을 반공과 빨갱이라는 용어의 대립적인 존재

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서 싸운 적도, 대립한 적도 없었다. 월

154

남가족은 반공 국가에 의해 반공적 호명을 당했고, 월북가족은 빨갱이가족

으로 호명당하므로써 대조적이면서도 상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가족이

건 월북가족이건 일부 엘리트층 출신의 경우는 기득권층에 합류될 수 있었

고, 반공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월남가족의 경우 더 유리한 지점을 갖고

있었고, 이북5도청이나 월남 실향 단체들과 같은 든든한 조직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월북가족은 조직화는커녕, 성공한 경우에도 월북

가족은 비가시적 존재양식을 취하고자 했다.

하물며 ‘돈 없고, 빽 없는’ 일반 월남가족이나 월북가족의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리? 냉전시절 그들에게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위험 중 하나는 월남

인의 북측 가족이나 월북인이 간첩(대남공작원)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심지어 월남가족이나 월북가족이 간첩(대북공작원)이 되기도 했다12).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살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가 펴낸 _과거와 대화 미

래의 성찰-학원·간첩편(VI)_에 따르면 1951년 이후 1996년까지 북한에

의해 직파되었거나 일본으로 우회했거나 납북귀환어부 등을 통한 남파공작

원 또는 남파간첩 사건의 공식 통계는 4,495건(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살규

명을통한발전위원회, 2007: 263)이다. 그런데 1950년대 반공검사로 이름

을 떨친 오제도 검사에 따르면 검거율이 60%라고 하니, 검거되지 않은 남

파간첩을 포함시키면 최소한 7,500명으로 추론할 수 있다. 2000년 11월

7일 국회의원 김원웅은 국방부 자료를 인용하여 1950년 이래로 1999년까

지 총 남파공작원은 6,446명이며, 그중 생포자(生捕者) 3,177명, 사살자

1,644명, 자수자 275명임을 밝혔다.13)

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침투시킨 북파간첩(공작원)은 정보사 요원만 보

더라도 생환자를 포함하여 11,273명이다. 물론 남한에서는 정보사 소속이

가장 많이 북파되었지만, 정보사 이외에도 중앙정보부, 보안사, 또는 미군

12) 남파공작원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1970년대 양산되었고, 10년대 가장 유명한 영화로

는 _쉬리_(강제규 감독, 1999)를 들 수 있다. 2000년 전후하여 _간첩 리철진_(1999)을

비롯한 다양한 버전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반면 북파공작원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드문 편인데, 월북가족이 북파공작원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로는 실화에

바탕을 둔 _실미도_(강우석 감독, 2003)를 들 수 있다.

13) _동아일보_ 2000.11.8일자.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55

첩보기관 등이 보낸 북파공작원이나 휴전선 부근의 일반부대에서도 적지

않은 공작원을 북한 지역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남한이 파견한

북파공작원의 숫자는 11,273명보다 훨씬 많을 것(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

살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2007: 247)이라 한다.

그런데 수많은 간첩사건에는 월남-납남 포함-이건 월북-납북 포함-이건

이산가족 문제가 연루되어 있다. 북한이 침투시킨 남파간첩을 보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대남침투공작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연고선을 이용한 공작이었다. 분단 직후 또는 한국전쟁 중

에 월북한 사람들이 아직 젊었고, 이들이 월북한 시간도 많이 경과하지

않아 남쪽 사회의 변화도 그 폭이 적었기 때문이다(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

명을통한발전위원회, 2007: 272).

즉 1950년대 남파간첩의 대다수는 월북인이었다고 한다. 역으로 남한-미

군 포함-이 침투시킨 북파간첩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파공작원의 대명사라

고 할 KLO부대, 즉 켈로부대도 1950년대에는 전원이 북한 지역 출신자로

구성되었다(강준만, 2004: 126). 즉 월남인이 이북 지역을 잘 안다는 이유

로 발탁되어 간첩으로 투입되었다. 실제로 이산가족을 조사한 지역마다 대

개 간첩 이야기를 접하곤 하였다. 양양, 속초에서 그랬듯이 강화 교동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속초, 양양 인근에서 거의 한 해에 한 번 꼴로 간첩사건이

일어났다. 이번 조사에서 그런 가족 중 한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강원도

양양 출신인 최O립(1925년생)은 최□집의 5남14) 2녀 중 막내아들로서 해

방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강원도 인민위원회 간부로 있었고 결

과적으로 ‘월북’한 셈이 되었다. 1963년경 그는 남파되어 양양에 있던 누나

14) 한국전쟁 당시 오 형제 모두 월북하였다. 그런데 최O립의 경우에 전쟁 무렵 평양에서

대학을 마치고 인민군장교 재직중이었고, 전후 그냥 북한에 남은 것이어서 월북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 강릉 최씨의 족보가 말하듯 ‘북한에 남았다’는 뜻의 ‘재북’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156

를 비롯한 가족들을 만났다. 대학을 다니다 휴학하여 ___________현역군인으로 있던

그의 조카 ‘진구’(1938년생, 남)는 군대 생활 중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월북했던 삼촌 최O립이 간첩으로 남파되어 어머니, 고모, 큰어머니들을

만났다. 그 결과 친인척 8명이 불고지죄로 체포되었고, 그 자신도 군사재판

에 회부되어 반공법에 따라 4개월 형을 치렀다. 당시 일가족간첩단 사건으

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는 수형생활 후 연좌제15)로 인해 학교를 다닐 학업

을 마칠 희망도 포기하고 말았다. 동네마다 정보요원들이 몇 명씩 있어서

늘 감시하고 동네 소소한 일까지 간섭하고 그러니 고향에 돌아와 사는 것도

염증이 났다. 심지어 그에게 북파공작원이 되라는 요구 때문에 HID부대에

서 5개월여 특수공작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결혼한 후 그는 트럭운전수가

되어 1998년까지 전국을 떠돌았다. 10년 전부터 고향에 정착하여 석방된

간첩 외삼촌, 최O립을 모시고 살았다.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감과 함께

친척들이 교도소에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던 것에 섭섭해 하였다. 그렇게

간첩 외삼촌과 분단은 그의 꿈을 모조리 앗아갔다. 그는 지금도 피곤한

날이면 트럭을 타고 정처 없이 어느 산길, 국도를 달린다. 뿌리 뽑힌 사람처

럼.

진구가 월북가족으로서 간첩으로 엮인 경우라면 ‘정기’(1950년생, 남)는

갓난아이 시절 부모님을 따라 월남하여 속초에 정착한 월남가족이다. 그는

아버지 같은 가난한 어부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가난을 탈출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돈을 벌어 작은 가게를 열기 위해 아버지가

고용되어 있던 회사 배에 어부로 승선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배가

월선 조업하여 북한에 1년간 억류된 이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덕분

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의 고통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

운 끈질긴 시작이었다.

15) 1967년 당시만 해도 연좌제에 묶여 있던 사람이 5만1백65명이었다고 함(_경향신문_

1967.1.26; 김성환, 1967: 91).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57

북한에 갔다 온 사람들이 국가에서, 어- 자기 (XXX) 그- 이익에 맞춰서,

결국은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서 요리가 되니까, 결국은, 어- 북한에 북에

북에 어쨌든, 자의든 타의든 갔다 온 사람의 흔적만 있으면은, 자기네가

필요한데로 요리를 해 먹었다는 거에요. 그 중에, 그 케이스 중에 내가

하나가 인제, 어떤 그- 어 간첩으로, 조작돼가지고 결국은 제가, 재판에서

무죄석방이 돼서 나오긴 나왔지만은, 삼개월 동안에 이근안이한테 제가,

아- 고문, 받고, (…) 너가 이런- 이러한 어떤 그- 뭐 간첩을, 행동을 한

사실이 있냐가 아니라, 이것을 쓰겠어 안 쓰겠어에요. 전 어처구니가 없드

라구. 그럼 저거를 쓰면 간첩이 되는데, 그거를 세 살 먹은 애가 아니고

인제 그 정도 성인이라믄 그 쓸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러고, 우리나라가,

아- 이- 어 참 뭐, 이북하고의 공산국가하고 적대시, 있는 나라고, 뭐, 반-

공을 국시로 삼는 나라로서, 내가 간첩이라 그러면 내가 설 땅이 어딨습니

까? 우리 가족이 설 땅이 어딨습니까? 연좌제 그게, 전부 옭매여가지고,

내 스스로 하나가 사라져 버리는 게 낫지(정기의 구술-김귀옥, 2008가:

157~158).

그는 김근태 고문 형사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팀으로부터 3개월 여 고문

수사를 받고 간첩이 되기를 거절하였고, 마침내 무죄로 풀려 났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몸이 망가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처와도 이혼하며 가족

해체를 겪어야 했다. 그는 현재도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는 다소 의혹찬 시선과 연민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냉전시대 담론 수준에서 반공전사와 빨갱이가족은 대조적인 개념임은 부

언할 필요가 없다. 또한 정체성의 동학에 있어서 반공전사는 ‘반공’을 기억

하고, 반공을 목소리 높여 외쳐야 했다면, 빨갱이가족은 ‘월북’이라는 사실

과 사람을 지우며 망각의 길을 찾아야 했다. 두 개념은 서로를 배제하고,

경원하며 공존의 여지를 지웠다.

그러나 월남과 월북에 작동하고 있는 기억과 망각의 역설 속에는 비(非)

국민의 가능성이 동시에 자리 잡혀 있었고, 연좌제의 너울은 넓게 월남과

월북의 가족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산가족의 간첩으로서의 귀환(이나 그

158

가능성)은 두 집단 모두에게 있어서 불길하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

다.

또한 월북가족에게는 월북 외에도 또 다른 담론을 하나 갖고 있었다.

바로 ‘납북’이었다. 위의 김민정의 사례에서 보듯 수많은 월북가족은 ‘월북’

을 ‘납북’으로 대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납북가족과 월북

가족 중 누가 한국에서 살기에 좀 더 안전했을까? 냉전의 잣대로 말하면

납북가족은 정부에 의해 보호받아야 존재들이다. 그러나 전후 납북자 480

여명은 모두 당국의 관리대상이었고, 그에 따라 납북가족 역시 관리대상이

었다16). 납북가족에게는 납북자는 원망의 대상이었고, 남한 당국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납북가족은 납북자에 대한 원망과 정부에 대한 공포감을 북한

을 향해 발화하였다. 납치의 원인 제공을 북한이 하였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따라서 냉전시대 월남가족이건 납북을 포함한 월북가족이건 누구

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국가적 수준에서는 비국민적 존재였고, 개인적 수

준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해야 했거나 없애야 했다.

3. 탈냉전시대 월남/월북 정체성의 동요와 새로운 가족의 형성

가능성

월북가족에게 탈냉전의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15 남

북공동선언이었던 것 같다. 6·15선언에 의해 시작된 2000년 8·15 제1회

이산가족 상봉 당시까지만 해도 월북가족들의 상당수는 이산가족정보통합

센터에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적지

않은 월북가족들에게 월북인과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때, ‘가슴 철렁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월북인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거나 이미 사망신고를 해둔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많은

16) 납북피해자지원단이 발간한 _납북피해자 업무편람_(2008)을 통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짐

작할 수 있다.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59

월북가족들 사이에 전통의 복고 현상, 즉 족보 재정리 사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후 이산가족 상봉식이 계속되면서 월북가족들 중에도 상봉신청을

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잠시 정부당국간의 이산가족 상봉행사 현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표 1> 당국 수준의 대면상봉과 화상상봉 현황

구분 남 북 계

대면상봉(16회) 1,683가족(10,673명) 1,695가족(5,539명) 3,378가족(16,212명)

화상상봉(7회) 279가족(2,257명) 278가족(1,491명) 557가족(3,748명)

계 1,962가족(12,930명) 1,973가족(7,030명) 3,935가족(19,960명)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2000년 8·15 제1회로부터

2007년 16회까지 개최되면서 수많은 일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월남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월북가족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2000년 6·15 이전에도 민간 주도의 이산가족 교류가 있었다. 그래서 전체

적으로 볼 때, 대면(對面)상봉(방남, 방북, 제3국 상봉) 총 건수 5,088건

중 당국차원의 대면 상봉 3,444건(67.7%), 민간차원 대면상봉 1,644건

(32.3%)으로 이루어져 당국차원의 대면 상봉이 배에 이른다. 화상상봉은

전적으로 당국 주도로 이루어졌다(김귀옥, 2008: 340-342).

정부 당국에 의해 추진된 16회의 이산가족상봉행사는 10년간의 남북관

계의 변화와 함께 월남/월북가족의 정체성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해 의도적으로 ‘반공’을 과장했어야 했던 반공전사 정체성과 빨갱이

라는 낙인을 없애야할 정체성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훈풍이 분

것은 월남가족이었다. 1980년대까지 월남=반공이라는 일괴암적 전설이 수

립되어 있었다면 1990년대 전후하여 월남=피난의 새로운 등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도 원자탄 소동과 함께 새롭게 해

석되기 시작하였다. 강정구(1996)의 연구에서부터 제기된 문제가 김귀옥

(1999)의 연구에서 진실로 규명되었다.

한편 월남가족의 ‘반공전사’라는 굳건한 정체성에 내부적으로 균열이 생

160

겼다. 이북5도청에서는 ‘반공’을 사시로 내세웠던 정체성을 스스로 문제제

기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월남인 스스로도 이북5도청을 더 이상 망명정부

로 인식하지 않고, 대신 친목단체로 이미 인식하기 시작하였다(김귀옥,

1999: 349).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이북5도청이 반공수구극우세력을

대변하였고 1992년 선거에서는 김영삼 대통령후보를 지지하였으나 1997년

과 2002년 선거에서는 중도적인 입장으로의 선회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일반 국민들에게 월남가족이 가족과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인식이 _간 큰 가족_과 같은 영화의

등장이었다. 아직 극소수 강경한 반공적 입장을 가진 월남인 1세대나 ___________2세

대가 있다하더라고 일반 월남가족들은 그러한 반공적 입장에 그리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글로벌 시대 이념이 해체되어 온 객관 환경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월남가족 속에서 과장되게 반공전사로서 목소리를 높

여야할 이유가 약화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나 사회 수준에서 ‘월북인’을 이산가족으

로 호명하는 데에 인색했거나 그러한 코드는 부재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산가족을 지칭할 때는 월남인이나 납북인 뿐이었다(대한적십자

사, 1986). 2000년 8·15까지 월북인은 비가시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6차례의 이산가족 상봉행사 과정과 남북 환경의 변화에 의해 월북

가족은 빨갱이 가족이 아니라 ‘이산가족’으로 사회적 ‘명함’을 획득하게 되

었다.

에피소드로서 글쓴이는 2006년 13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관인 자격

-명목상 대한적십자사 자원봉사요원-으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김

귀옥, 2006). 통상대로 1진이 주로 월남가족들로 구성되어 북측에 남아 있

는 가족들과 상봉하는 일정이라면, 2진은 주로 남측의 월북가족들로 구성

되어 북측 월북인을 상봉하는 일정이었다. 글쓴이는 2진 모니터요원으로

합류하였는데, 전체 100가족 중 부부가 상봉하는 사례는 2가족이고, 대부

분 형제자매의 상봉이었고, 더러 삼촌조카의 상봉도 있었다. 동승한 한 버

스에는 대략 다섯 가족이 타고 있었는데 최씨 성의 두 가족, 김씨, 민씨,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61

황씨네 가족으로 이루어졌다. 금강산을 향하는 잠시 동안 가족들은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한 회고와 고통을 계속 얘기하였다. 어느 여성분은 “이번에

만나면, 17, 18 나이에 뭘 알아서 올라갔느냐고 물어봐야지”, “필시 우리

오빠는 게네들한테 끌려(납북되어) 갔을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행사가

이틀째 되던 저녁, 글쓴이를 포함한 다섯 가족들이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같은 버스에 탔던 친분이 있어서 북측 가족들을 만났던 감회를 쏟아

냈다. 북측 월북인 형님을 만났던 남동생이 운을 뗐다.

나는 1진에서 북한이 야단______을 해서 우리는 금강산에 못 오게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어. 그런데 여기 와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납북’인지 모르겠더

라고. 내가 보기엔 납북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간 사람들도 많아

보이데(김귀옥, 2006).

하루 만에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미 그들에게는 ‘강제월북’이나 ‘자진월북’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빨갱이 가족이 아닌 한 사람의 이산가족이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두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들을 서울로 집으로 돌아와 북에서 가져온 선물

꾸러미, 사진들을 가지고 가족들이 만나 뒤풀이를 하였고, 김씨 집의 경우

에는 고향 친구들까지 불러 크게 잔치를 벌였다. 이미 사회적으로 ‘사망’신

고를 했던 아버지와 형제들을 복원하였고, 북의 가족이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은근히 자긍심마저 생겼다.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은 그야말로 박탈된 존재, 스스로 이름을 지워야 했던 비가시

적 존재에게 고통을 치유하는 단초를 마련해 주었다. 크게 보면 탈냉전의

시대 60년간 사무쳤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고, 반공이나 빨갱이

의 정체성을 탈피해 나가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남북분단 상황에도 당국에 의한 열 여섯 차례 이산가족상

봉행사가 진행되고, 서신 교환이나 동영상 상봉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물론 2000년 이전 1980~90년대에도 민간단체를 통한 이산가족 상봉이 간

헐적이나마 지속되었다. 서신왕래나 제3국(주로 중국)에서 상봉, 북한 방문

162

등이 있었다. 특히 재미동포 가운데 북한을 고향을 둔 이산가족의 방문이

많았다(김귀옥, 2004; 김남식, 1982).

그런 과정에 종래 찾아보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자녀가

남한의 아버지 재산 상속권을 인정해 달라고 재산분할소송(_한겨레신문_

2007. 6. 22)을 했다. 이에 남한 법원은 북한 주민도 상속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01년엔 호적에도 올릴 수 있다고 판결했다(_조선일보_

2009. 2. 25).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맞춰 2007년도에는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을 실행하기 위한 ‘제1차 남북관계발전기본계획’(2008∼2012년)

을 수립하여 ‘남측 이산가족이 통일 이전이라도 북측의 가족에게 재산을

증여하거나 상속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표명하기

도 했다(_연합뉴스_ 2007. 11. 22).

이러한 사회적 변화 배경에는 남북 이산가족의 저변의 정서나 정체성이

깔려 있다. 60년의 남북분단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의식에는 분단이 일

어나지 않은 것이다. 월남가족이나 월북가족 모두 북한의 가족도 ‘가족’이

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을 한 후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 집에 모두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제사나 경조사

를 같이 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사회적으로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다문화가족을 둘러싼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한국인

들은 다문화 사회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다문화가족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과거

에 비하면 상당히 개방적으로 변화되고 있다(황정미 외, 2007).

분단 65년 동안 남북의 문화적 이질성이나 남북 가족 문화의 이질성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속에서도 남북 모두 가족에 대한 강력한 연대의

식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17) 북한에서는 1990년대 최

악의 경제난 속에서도 가족이야말로 개인의 삶을 보장하는 최소 공동체가

되었다(박현선, 2006). 탈북자들은 남한에 정착한 이후에도 북한의 두고온

17) 그러나 실제로 이산가족이 어떤 가족의 연대감을 갖고 있는가는 알기 어렵고 이 방면의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63

가족들에게 송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또한 탈북에 의해 이산된

가족과 재결합하기 위해 막대한 탈북비용을 탈북브로커 조직에게 주기도

한다. 분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남과 북에 가족을 분산시키는 고통을 주었지

만, 이산가족에 의해 분단과 통일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룬 경우도 생겼다.

하나의 예로서 현지조사에서 만났던 속초의 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월남

가족과 월북가족의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그 가족 속에는 월북인 아버지와

월남인 아버지가 공존하고 있었고, 두 가족들이 함께 각각의 아버지의 제사

를 지내며, 다른 성씨를 가졌으나 형제 자매로서 살아가고 있다(김귀옥,

1998). 설령 우리가 다시 만들 가족공동체가 한 지붕을 한 생활 공동체는

아닐지라도 연대의 공동체로서 남과 북 가족이 이어질 가능성을 이산가족

들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가능성은 현실적인 변화 속에서 짚어

볼 수 있다. 이를 남북 이산 다문화가족형태로 볼 수 있으며, 해외 이산가족

까지 포함시킨다면 글로벌 이산 다문화가족형태라고 할 수 있다.

4. 나가며

사회과학적으로 글로벌시대는 자본주의의 지구화이며, 초국적 자본이 국

경 없는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국가 내에서

의 양극화가 아니라 국경을 넘은 세계적 양극화의 시대를 의미한다. 반면에

시민사회 수준에서 글로벌시대는 반세계화를 향한 의식을 공감하고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 시대이기도 하다. 한편 글로벌시대는 이산가족에게 탈

냉전과 탈이념에 의한 억압적 정체성으로부터의 자유와 새로운 이산가족공

동체의 형성, 즉 이산의 다문화가족 형성의 가능성을 던지고 있다.

첫째 냉전시대 월남/월북가족은 과도한 억압적 정체성에 덧씌워져 있었

다. 월남가족은 의도적으로 ‘반공’의 의미를 과장되게 내세워서라도 존재성

을 확보해야 했고, 월북가족은 ‘빨갱이’의미를 최소화 또는 무화시키기 위하

164

여 월북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끊어내는 구체적 과정을

겪어야 했다. 2000년 전후 시기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한반도의 탈냉전적

환경은 이들에게 과장이나 비가시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억압적 정체성으로부터 일정 정도 자유롭게 이산가족이자 한반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시민성, 국민성을 회복하고 있다.

둘째 과거 _길소뜸_은 화합할 수 없는 이산가족을 보여주었다면, _간

큰 가족_은 치유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 이산가족의 상봉

은 재결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이산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족

내, 또는 가족 간 비밀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고, 가능하다면 분리된 공간

속에서도 부모의 재산마저도 공유할 수 있으며, 부모의 성씨를 공유함으로

‘한 가족’이라는 ‘연대 의식’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강력한 ‘가족주의’는 수많은 기러기가족을 만들어 내어

도 일부 가족을 제외한 세계적 범위에서의 가족 연대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할 만큼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월북가족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다. ‘언제 남북관계

가 잘못될 지도 모르는데’라는 의구심이 체질화되어 있었고, 그들에게는

2008년 2월 이래로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10년 전 시계로 되감기

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산 다문화 가족 형성의 가능성을 주장하기에는 아직도 조심스

럽다. 이산가족들 사이에서는 가능성의 싹이 트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객관

적 조건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렵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은 이산가족들에게는 연대의식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국가에 의한 ‘퍼주기’논쟁, 색깔론 논쟁을 우회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으며,

사람의 통일을 가장 강력하게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글로

벌 시대 이산가족은 탈냉전시대 글로벌 이산가족 연대 공동체의 가능성,

남북 이산 다문화가족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김귀옥 / 글로벌 시대 한국 이산가족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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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Korean Dispersed Families in the Global Era: their

identity and the new possibility

Kim, Gwi-Ok

For a long time, the words, Wolnam/Wolbuk, have been

recognized as mutually antagonistic or incompatible with each other

in Korean society. While Wolnam family was strongly branded as

an anticommunists, Wolbuk family was deeply stigmatized as Reds.

But in the warm breezes of post-Cold War, these stigmas are being

gradually and internally dissolved out.

First of all, this paper examines the identities and survival ways

of Wolnam and Wolbuk families in the Cold War area by discoursive

analysis of texts concerning dispersed families. And it tries to find

how their identities and stigmas have been undergoing a change

since the 16 occasions of exchange visits of the dispersed families

in the post-Cold War. Lastly, it looks into whether there is a

possibility for a new type of alternative family to arise across

dispersed families of North and South Koreas.

Key Words:

dispersed family identity, anticommunist, red, multi-cultural family,

dispersed family community__

 

 

6.15유럽공동위

 

 


615 유럽공동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