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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가는 길이 곧 역사였다

[DJ의 일생] '한반도의 미래' 개척한 평화의 지도자

 2009년 08월 20일

프레시안 2009-08-18  황준호 기자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 자리를 잡으면 올 가을부터 본격적인 북미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오바마 신정부에 큰 기대를 걸었던 전 대통령 김대중은 5월 21일을 기점으로 북미 대화의 구체적인 시점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화해를 위해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대중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우선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월 21일이면 당시 방한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지 3일 후가 되는 날이었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관련 소식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는 북미가 뉴욕 채널을 통해 여기자 석방 문제를 논의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뉴욕에서의 북미 접촉은 마침내 8월 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미로 이어졌다. 그 후 미국은 대북 제재에서 대화로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그저 정보 몇 개를 모아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보는 건 맞지 않다. 오바마 행정부의 기본 성향, 미국의 새 정부가 대북정책을 검토하는데 통상 걸리는 시간, 오바마 대통령이 중시하는 내년 5월 NPT(핵확산금지조약) 검토회의까지 남은 시간 등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 나온 전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고 김대중이 정세의 흐름에 올라타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정세를 정확히 읽기도 했지만, 다음 단계의 국면을 스스로 만들었고, 그게 모여 역사가 되게 했다. 클린턴을 만나 북한 방문을 권함으로써 정말로 그렇게 하도록 했고, 주변 참모들은 물론 국내외 각종 인맥을 움직여 북미 대화를 위한 군불을 땠다.

특히 김대중이 방향을 설정하면 그의 '철학적 자장'에 있는 정책 결정자들이 각국 정부의 요소요소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효과는 그 어떤 영향력보다 위력적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방향이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통일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지난 5월 서울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북한 방문을 권했다. ⓒ연합뉴스


■ "햇볕정책이 무슨 죄냐"…노무현의 중심을 잡아준 한마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고 감지하고 스스로 정세를 만드는 김대중의 힘은 대통령 재임 시절에 꽃을 피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권력이 없던 야당 시절과 대통령 퇴임 후에 더욱 빛을 발했다. 그때 발휘된 힘이 어쩌면 김대중의 진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김대중은 핵실험 당일 "이 마당에 포용정책만 계속 주장하기는 어렵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격분, "핵실험은 부시 행정부의 핵 정책 실패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핵실험 다음날 청와대 전직 대통령 오찬 모임에 다녀온 김대중은 그날 밤 노무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햇볕정책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강하게 따졌다. 그리고 다음날 전남대 강연에서 "햇볕정책이 실패했다는 해괴한 이론이 돌아다닌다"며 "(북한은) 미국이 못 살게 굴어서, 살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핵을 개발한다고 그런다"고 일갈했다.

김대중은 가능한 많은 외신기자들을 동교동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똑같은 메시지를 반복해 말했다. 그처럼 맹렬한 여론전이 이어지자 노 대통령도 결국 다시 중심을 잡았고, "평화적 해결"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등 대북 제재·압박으로 나가야 한다는 정부 일각의 의견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김대중은 핵실험이 있기 보름 전 이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한반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네오콘을 향한 김대중의 비판은 핵실험 후 더욱 날이 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핵실험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돼 북한과 만나 6자회담 재개를 합의하게 된다. 그리고는 6자회담 재개, 2.13 합의로 이어지는 긴장 완화 국면이 펼쳐졌다.

김대중이 이 모든 과정을 만들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대북 제재·압박 참여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고, 북한이 6자회담으로 돌아오는 국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김대중은 그렇게 대결과 갈등으로 가는 역사의 물길을 대화와 타협 쪽으로 돌리곤 했다.

■ '빨갱이' 김대중의 제안, 민정당 정부에서 현실이 되고

야당 지도자 시절 김대중의 힘이 빛났던 때는 크게 두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1994년 5월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했던 연설. 김대중은 이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이른바 '패키지 딜'(일괄타결)을 주장하면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제안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카터는 6월 중순 실제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이 그 카드를 받아들이면서 북핵 문제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한반도의 위기 국면은 해소됐다. 그해 10월에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됐는데, 그 골자는 바로 김대중이 제시했던 '패키지 딜'이었다.

▲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연설 장면. 김대중은 이때 '4대국 보장론'과 3단계 통일방안이라는 획기적인 비전을 내놨다. ⓒ연합뉴스


한반도 문제를 푸는 김대중의 해법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이론적 토대가 구축됐다. 박정희에 맞서 야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 김대중은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 보장'을 주장하고,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 상황에서 볼 때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는데, 박정희가 이듬해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하며 긴장 완화를 꾀했던 것은 결국 김대중의 제시한 평화통일의 원칙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1년 '4대국 보장론'과 94년의 일괄타결론은 모두 당시의 국제정세를 직시하고 남북이 그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70년대 초 미중화해와 데탕트, 그리고 90년대 초 탈냉전 상황에서도 여전히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 그곳에서 계속되는 긴장과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DJ의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김대중은 66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미 72년부터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했으며, 80년대 중반에는 '공화국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들은 당시의 이념 지형을 뒤흔드는 것이었던 까닭에 김대중은 '용공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 주장들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이 정권을 잡았던 노태우 정부 시절 모조리 현실이 되었다.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할슈타인 원칙은 북방정책으로 대체되었다. 이홍구 통일원 장관은 89년 국회에서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김대중의 공화국연방제 방안에 있는 내용을 참고하고 수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중에게 들씌워진 '빨갱이' 굴레는 선각자로서의 DJ를 두려워한 독재정권의 음해에 불과했던 것이다.

■ 6·15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햇볕정책이 있었다. 김대중은 98년부터 2003년 초까지 대통령으로서 실권을 가지고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의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98년 금강산 관광 개시 - 99년 페리 프로세스 - 2000년 베를린선언·남북정상회담(6.15공동선언)·북미공동코뮈니케 - 2002년 북핵/남북관계 병행론까지. 햇볕정책은 이 과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이었고 그 성취는 통째로 한반도의 새 역사가 됐다.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선언 채택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98년 11월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키지 않았더라면 6·15라는 열매가 맺힐 수 있었을까?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으로 하여금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과 수차례 만나도록 함으로써 '페리 보고서'를 '임동원 보고서'로 바뀌게 하지 않았더라면?

남북 정상회담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기회가 아니었다. 김대중이 대통령 취임 후 2년 반 동안 치밀하게 밀고 나간 평화만들기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6.15 선언은 남북 화해·협력의 미래를 밝혔다.

그 후 김대중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던 북미관계 정상화 작업은 비록 북한의 실기(失機)와 부시 정부의 탄생 때문에 무산됐지만, 미래의 역사를 위한 예행연습으로의 값어치는 충분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그 길을 개척한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겼다.

▲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연합뉴스


■ 80년대 서독의 보수보다 못한 한국 보수, 그리고 DJ의 절망

김대중이 정치적 핍박과 좌절 속에서도 역사를 만드는 평화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과 평화의 철학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의 김대중과 정세를 논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세상을 큰 틀에서 보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낙관론자였다."

하지만 그런 DJ가 7월 10일 생애 마지막으로 했던 <BBC> 인터뷰에는 낙관보다는 슬픔과 절망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금은 제2의 냉전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슬픕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속에 많은 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계승됐던 햇볕정책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폐기됐다. 빌리 브란트 사민당 정권의 동방정책은 헬무트 콜 기민당 정부에서도 계승됐지만, 21세기 한국의 보수 세력은 80년대 초 서독의 보수주의자들에도 못 미치는 낡은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마지막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는 지금 악몽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평화의 지도자 김대중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도의 몸짓을 보냈다. 그가 꿈꿨던 화해와 평화의 한반도는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숙제가 됐다.

▲ DJ의 햇볕정책과 그를 계승한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은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 됐다. 2005년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조연설을 듣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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