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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望鄕)의 종착역?

(조 성형의 영화 „Endstation der Sehnsucht“을 보고)

2009년 12월 16일

김 원 호      

 

독일에서 살다가 정년퇴직한 늙은 한독부부 세 쌍이 독일에서 보다도 더 행복한 생의 만년을 지내보겠다는 의도로 한국의 남쪽해안에 있는 남해 시의 독일마을에 입주해서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다.

이 마을은 한국의 지방정부가 30-40년간 독일에서 고생한 한국 간호사 들과 그들의 독일 남편 들에게 남은 여생동안 조그마한 행복을 제공해주겠다는 선의의 목적 이외도 이 지역 관광개발의 목적으로도 기획한 특수 거주지이다.

산해수려한 해안에 자리잡은 이색적이고 색다른 독일식 주택 들, 정원 들, 가구 들, 독일 수목 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담도 파란눈의 „코쟁이“들과, 독일말을 하고 독일식 생활을 하는 한국여인 들, 그 자체가 벌써 원근의 주민 들에게는 대단한 관광의 매력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이 작은 마을에는 수십 수백명의 관광객 들이 차를타고 몰려와서 길을 막고있고, 주인의 허락없이 정원이며 주택내부로도 침입해서 멋진 주택 들과 정원을 배경으로하고 기념사진도 찍고, 요란한 감탄성도 지르며, 이 마을을 점령한다.

독일의 신성불가침한 주말의 고요함, 휴식, 영혼의 안정과 재충전의 시간만 박탈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신성시되는 성역인 개인의 공간과 소유물이, 나와 남의 분명한 구별과 경계를 모르고, 또 집단공동체를 개인공간보다 우월시하는 한국의 사고방식에의해서 여지없이 침범 파괴 당한다.

이러한 문화와 사고의 차이를 미리 예상못한 이들 부부 들은 창문 뒤에서서 충격감과 분노와 한숨 속에 쌓인 채 속수무책으로 바깥의 관광무리 들을 내려다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부터 그들이 찾으려는 새 고향의 목가적인 이상향이 잔인한 현실과 충돌하고 현격한 격차를 내기 시작함을  느끼기 된다.

독일 집주인이 주택의 나즈막한 정문의 빗장을 가까스로 잠그면서 자신의 개인공간이요, 목가적인 정원과 이상향을, 실의에 차면서도, 그래도 지키겠노라고 안간힘을 쓰는 영화장면은 관객의 동정심마저 불러 일으키게 해준다.

이집 주인는 다행스럽게도 세명의 부인 들 중 가장 독일어를 잘 구사하고, 서양에서 배운 서양 식 남녀동등권을 주장 하면서도, 자기 남편을 동양 식으로 잘 배려해주고, 대화도 가장 많이 해주는 아내를 가졌다.

불교사찰도 방문하고, 등에 아픈 죽비 세례까지도 받으면서, 한국문화에 적응 동화하려는 노력을 많이하고 있고, 심지어 전통적인 황토식 한증막(Sauna)까지도 즐기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아내와 나누는 대화의 한 장면은 그의 Integration(적응, 동화, 융화)의 한계성을 폭로 시켜준다. 아내가 기분좋은 한증욕을 하면서 „바로 여기가 낙원이 아니겠어요?“ 하며 자신의 성공한 귀향과 행복을 확인하며 말하자, 그는 „당신에게는 낙원이지만, 나에게는 아니라오!“라고 대꾸를 한다.

그는 독일마을 프로젝트를 한인들이, 철저한 독일인 들과는 달리, 시종일관 수행하지 않고 용두사미화 시켰다고 불평과 실망을 토로하면서, 한인 들의 신뢰감 부족을 지적도 한다. 그는 한국사회와 문화에 비교적 많은 접촉을 하면서도, 그의 머리 속은, 그가 위험한 운전을 하는 한국여성 운전사 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있다고 하면서, 그의 50년전 독일의 사고방식인 남성위주사상에 대한 향수로 가득차있다.

그의 타민족 문화와 사회속으로의 융화작업은 긍정과 부정의 상반감정의 대립(Ambivalenz)과 회의와 실망감에 충만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융화작업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두번 째 부부의 남편은 독일의 하층 계급의 Handwerker(수공업자)출신이요, 65세가 넘었지만, 세명 중 가장 젊고 활동적이다. 그는 독일인 들의 특성 들인 Perfektionismus(완벽주의), Sicherheitswahn(안전광기),  Ordnungsliebe(질서 규칙 준수심), Besserwisserei(현학주의), Schulmeisterei(접장의 훈시벽)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겸비한 전형적인 독일인의 상징적 인물이다.

이국 땅에 살면서 독일 소세지, 작은 빵을 직접 만들어 먹고, 또 팔기도하고, 영구불멸하는 구식 독일제 시멘트 기계로 집도 짓고 수리도 하며, 축제 때에는 그릴 소세지도 구워 팔기도 한다. 친지 들을 모아 가정 음악회도 개최하면서, 타국 속에서도 자신의 독일 문화와 전통과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간직 보존 시키면서 살고있다.

그 뿐이랴? 그는,독일여인 들보다도 더 독일화가 되었고, 또 자신의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엄격하고 정확성 사랑하는 „독일“(한국)아내와 함께 살면서 독일생활을 철저히 재현 시키며 살고있다. 그가 한번은 50그람 짜리 독일 작고 둥근 빵(Brötchen)의 반죽을 자를 때, 그가, 독일의 정확성에서 약간 해이해지게 되었는지, 반죽을 2-3그람 더하거나 모자라게 빚자, 그의 아내는 기어코 50그람 을 채우면서 그에게 불통같은 화를 내고 무섭게 나무라 준다.

그래서 그는 잠시 동안이라도 자기의 옛 고향 문화의 테두리에서 한 치조차 헤어 나올수 없는 독일의 완벽성과 철저성에 선고와 저주를 받고 살고 있는 것이다.

또 한번은 그가 가정음악회를 위한 합창연습 시간에 아내의 화성법 지식을 전혀 무시하고, 자신의 지식을 아내에게 선생티를 내며 과시하고 강요를 하다가, 아내에게서 곤욕을 크게 당할 만큼, 그의 머리 속에는 독일의 우월의식이 깊히 각인되어져 있어 조금도 변화하지도 않고, 또 변화시킬 의도나 필요성 조차도 없이 살고있다.

그는 자기의 집 건물 수리 보존을 할때에도, 99%의 안전성에 만족하기 보다는, 1%의 손상 가능성의 확율에 더 전전긍긍하고 불안해 하면서, 편안한 잠을 잘 수도없는 독일의 안전광기에 노예가 되어 살고도 있다.

이 두 부부는 독일마을이라는 목가적인 전원의 섬 속에서 외부인 들과 하등의 접촉없이,  고립된 채 살고있는 외로운 섬 사람 들이며, 그들의 과거의 고향 독일에 대한 애착과 향수와 망향이라는 달팽이 집 속에서, 외롭지만, 그러나 그들 자신 들은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고있는 달팽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물론 오늘날 온 지구를 장악하고있는 획일적인 단일 지배문화에 감염

종속되지않고, 자신의 특이한 고유한 전통문화를 주장하면서,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창조적인 복합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꼭같은 논리로서, 그들은 그들 문화와 꼭같히 복합문화애 속하고,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그 가치가  존중되어져야 할 한국문화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가 몹시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자기문화와 타문화와의 병행, 공존, 조화없이, 과거지향적이고 고립적인 자기문화의 우월주의, 독선주의라는 망상에 현혹되어 외롭게 살아가지않을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타국 속에서의 이상적인 새고향 건설작업은 그 의미를 완전히 잃게되며, 그들의 목가적인 독일마을은 그들 자신이 파놓고 그 속에 빠져서 사는 쥐덫(Mausefalle)이 아니고 무엇이랴?

물론 그들의 몸과 의식주는 이 독일마을에서 그들의  망향의 종착역을 찾은 듯해서,  만족하고 행복된 삶을 향유하면서 살고있는 있는 인상을 주기는 한다.

옛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토파네스도 „내가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 곳에  나의 고향이 있다.“고 하며,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고향의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는가?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서 자신의 행복을 자기 나름대로 느낄 수있는 고향을 찾고 또 만들어 가기 때문에 고향이란 매우 주관적 개념이다. 따라서 이들 부부들을 이러쿵 저러쿵 비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행복이란 몸과 물질만이 아니고, 마음과 생각과  정신이 함께 동반되어져야 참다운 행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으랴?

아마도 그들의 마음은 그래서 밤마다 그들의 과거의 꿈과 추억과 행복이 보존된 옛 고향에 대한 향수로 잠 못자며, 다시 그 옛 고향으로 달리는 기차여행을 매일 밤 하지 않을지 자못 궁금하다.

어찌 되었던, 그들은 세 부부 들 중 가장 타 사회와 문화 속으로의 융합이 되지않은, 아니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부부임엔 틀림이 없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세번 째 부부에게 눈을 돌려보자.

이 영화가 그 첫 머리에 등장시키고, 그에게 가장 많은 장면을 할애한 이 독일인은 70을 넘긴 전형적인 독일의 정년퇴직자 상을 보여주고있다. 생의 의욕도 생동감도 없는 텅 빈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느린동작의 소유자인 그는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배우 Buster Keaton을 연상 시켜준다. 관객은 이 말도 표정도 없고 오히려 멜랑콜릭한 그의 얼굴에서 벌써 그가 제 2의 고향에서 가장 실망을하고, 옛 독일고향을 향한  향수 속에서만 젖어서 사는 사람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더구나 그는 30여년을 독일에서 살았지만, 한국에 귀향한 후로는, 그녀의 약한 독일어 구사력 때문인지 혹은 의도적인지 모르지만, 독일어를 전혀 쓰지않고 한국어로만 이야기를 하며, 남편과 식사를 할 때에는 무언으로나 의중짐작으로만 서로 상통하고, 한국 식의 식탁예의로만 대하는 지나치게 한국적으로만 사는 한국 아내를 가졌다.

따라서 자연히 그의 한국어 실력은 불고기, 쌈, 물, 개고기, 어제, 오늘, 내일같은 보잘것 없는 단어 들에만 제한되어 아주 빈약하기 짝이없다.

그가 남해 시의 시장과 시 직원 들과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며 대화하는 장면은 그의 빈곤한 한국어 실력을 여지없이 폭로 시켜준다. 시장이 그에게, 한국아내를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필요한 기본 한국어를배우고 구사할 줄 알아야하며, 그래야만 독일마을 속의 새 고향의 생활이 의미가 있지 않느냐하고 외교적이지만, 약간은 비난조의 제안을 해주었으나, 그는 이해부족 때문인지 아무런 반응없는 마이동풍격의 무표정한 얼굴만 하고있다.

한국어를 배울 의도와 의욕이 없는지,혹은 능력이 없는지,전혀 알 수가 없지만, 이 장면에서 곤혹스러운 사람은 관객 들이지, 그 자신은 아닌 듯, 그는 사뭇 태연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첫 부부의 남편은 자기 사위와 대화를 할 때, 손 과 발, 영어단어 조각들을 모두 동원해서 서로 상통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도, 여전 불만 스러워지자, 그 역시도 나중에는 “이 따위를  대화라고 하며 나누다니....!“하고 혀를 차며  자신에게 곤혹감과 자조의 쓴 웃음을 지으며 한탄 했었다.

이 세째 부부는 언어부재 속에서 살고있다. 그 아내가 한번은 유일하게 자기 남편을 보며 독일어로  „세상 남자들은 모두 Dickkopf(고집통)들이야!.“ 라고 핀잔을 준 장면은 그들 부부간의 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며, 그것이 언어상실의 원인인지,혹은 그 반대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어찌되었던 그들은 언어없이 서로 살고있다.

동양불교에서 말하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고차원의 철학사상을 내포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부나 대인관계에서 필요한 언어습득과 언어교환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타국에 온 이주자 들에게는 새로운 고향 속으로의 건전한 적응과 융합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일 옛 프로이센의 정치가요, 베르린 대학 창시자며, 언어학자인 Wilhelm von Humboldt 는 „진정한 고향은 언어에 있다“라고 말 했고, 독일 철학자 Karl Jaspers도 „나의 고향은 내가 이해를 하고, 또 이해가 되어지는 곳에 있다.“라고 말 한것처럼, 언어란 고향의 개념정의에 중요한 몫을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부부, 그 중에도 특히 남편의 이 곳의 삶이 영화관객 들에게는 안타갑고 비참한 삶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우리를 가장 당황시키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의 부부, 그 중 특히 그가, 딴 부부들에 비해서 새 고향을 형식적으로나마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내 역시 자기의 원래의 제 1고향에 귀향을 했고, 또 한국어만 사용 하면서도, 가끔식은 그녀의 제2의 고향인 독일에 대한 향수와 갈망이 병존한다고 고백을 하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일찍부터 죽은 후에 그들이 묻힐 „영원한 고향“을 독일의 보리수 밑의 수목장 무덤으로 정해 놓을 만큼, 그들의 현재의 새 고향을 그들의 망향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보고 온전히 수용하고 있다.

독일 남편도 매일하는 산책길에서 어느 집에 걸린 우체통이 몇년 전 부터 반듯하지 않고 늘 비스듬히 걸려있는 에서 문화의 차이를 보면서, 독일의 질서와 완벽성에 대한 향수를 느끼긴 하지만, 그러나 그 이외는 이 곳 독일마을의 새 고향은 „Alles in Ordnung“(모든 것이 다 좋다)이라고 긍정적으로 인정을 한다.  그리고 그는 덫붙혀서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이 곳 독일마을의 경치와 좋은 주택과 넉넉한 생활조건은  그와같은 서민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기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도 한다.

그는 그 지역 어느 축제 때에 공연될 여성무용단에 유일한 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남성복장을 한 여성무용가 들 가운데 끼어서 그 역시도 우스꽝 스러운 남자복장을 하고 유일한 군계일학으로, 더구나 외국인으로서, 열심히 자기 여성 파트너와 함께 짝을 지어 춤을 춘다. 이 장면은 희극적인 요소 들이 많은 이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자아내게하는 장면이다.

그의 희극성은 우선 여성 일색의 동질 무리와는 대조가 되는 이색적이고 차별적인 그의 존재자체에서, 그리고 세련되고 날렵하게 춤추는 젊은 여성 무희 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그의 굼뜨고 느린 동작에서 오며, 둘째는 즐거운 민속 춤에 그는 말과 감정표시와 의식을 전혀 동반시키지 않은 채, 무표정하지만, 그러나 독일적인 정직성과 진지한 자세로, 꼭두각시처럼 흉내만  내며 추는 춤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작가 Heinrich von  Kleist는 그의 유명한 곡예단의 곰춤 장면에서, 그 곰은 의식을 동반하지 않고, 의식에 방해됨 없이,  자연스럽게 춤을 추기 때문에 그의 춤은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미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독일인의 의식없이 추는 춤은 우아함은 커녕 희극과 웃음 효과만 내는 서툴고 굼뜬 흉내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고 저녁늦게 귀향하는 버스가 갑자기 디스크장으로 변해서 모두가 춤을 출때, 그도 늙은 나이로서 젊은 여자 들과 어울려서 역시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고고 춤을 추고 있지만, 관객에는 곤혹스럽고 안쓰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켜준다. 그의 나이에 걸맞지않는 정열적인 춤은 언어와 소통없이 막히고 축적이된 그의 고립감의  폭발이고, 외로움에서 해방되고자하는  그의 영혼의 안간힘이다.

그는 언어를 통한 내면적인 이해와 인식과 감정과 영혼의 참여없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흉내만내는 몸만의 동일화가 과연 이상적인 동일화요, 바람직한 융화일가하는 의문을 강하게 불러 일으켜주게하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타 문화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자신 들의 고향을 찾고있는 세 쌍 부부 들의 융화작업의 모습 들을 살펴 보았다. 두번 째 쌍은 자신을 열어서 타 문화를 이해 인정 수용하지 않는 모델이었고, 세번 째 쌍은 타 문화를 형식적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자신과 자기 문화와의 정신적인 융화와 조화의 작업이 없는 피상적인 융화를 하고있는 모델이고, 첫번 째 쌍은 타 문화를 인정하고 자신을 열려는 노력은 하지만, 결국은 회의에 빠져서 융화를 스스로 포기하는 모델이었다.

그들은 서로 각각 다른 모델 들이지만, 그들 세 쌍 모두가 간직한  공통적인 분모는 타 문화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접근을 시도하려는 정신적인 모험이 부재하고, 자기 문화와 타 문화의 공존, 조화라는 참다운 이상향에 대한 망향과 건설작업의 의도가 전혀 결핍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국 땅에서 이국인 들과 문화에 대해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장벽을 치면서, 보호하고  지키려는 그들의 독일마을은 바로 18-19세기, 특히 독일 왕정복고주의 시대 때,  독일의 작가 Jean Paul이 묘사하는 소시민들의 꿈인, 그러나 지금은 Kitsch(편협하고 고루한 통속물)인 Gartenzwerge(독일 정원에 전시해 놓은 작은 꼬마 인형들)적인  Idylle( 목가적인 전원 ) 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왕이나 제후 들에게는 충성스럽고, 자신 들은 근면과 충실과 정직과 질서와 규칙을 최대의 생활 신조로 여기면서, 세상과는 등을진 채, 아늑하고 평화스러운 자기의 집과 정원과 가족 속에서만  행복을 찾고  누리려는, 전형적인  독일 보수 소 시민의 이상적인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세 쌍 들은 그들의 독일마을이 그들의 새 고향에 대한 망향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몸은 종착역에 도착 했으나, 마음은 항상 과거의 자기 고향 독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보다 더 행복스럽고  더 낳은 이상향으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갈아 탈 줄도 모르는, 행복하지만, 그러나  역시 불행한 사람 들이다.

이 이상향은 남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항상 찾고 만들어 가야하는 고향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이 고향은 지구상에는 어는 곳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와 그 세 쌍 부부 들의 이야기는 다시 이 영화의 관객이고, 이 곳 독일을, 원턴 원치않턴, 새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있는 우리 교포 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해준다.

우리들도 그 세 모델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해서 살고 있지는 않을가?

교포 사회 속에는 자신을 낳아 주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 친숙한 자연, 사랑스런 가족 친척 들이 살고있는 자기의 과거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망향에만  빠져서 사는 이들도 많고, 그 반면에 독일을 자기의 새 고향으로 삼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열고 동질화 시켜서 사는 독일화된 사람도 있고, 또는 옛 고향과 새 고향, 절망과 희망의 중간 지역에서 늘 방황하며 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와 남, 나의 문화와 남의 문화를 꼭같히 존중하며, 나쁜 점은 취사선택하고, 좋은 점은 상호 보충하며 사는, 열린 이주자, 조국과 타국을 꼭같이 자기나라로 여기며 사는 이방인, 그리고 과거지향적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의 더 낳은 고향을 만들어가는 이중 문화 속의 창조적인 교포가 되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교포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떠나온 우리의 고향이 현재 처해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어려움을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무관하게 제쳐두지 않고, 고향에 살고있는 한국인 들과 함께, 통일되고 평화스러운, 보다 더 낳은 한반도의 건설을 위해서 꼭같히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참여하는 한민족 해외 동포 들이 되어야 하는 임무감이다.

 

끝으로 선악이나 긍정 부정의 주관적인 잣대로 다루지않고,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루면서, 관객 스스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하지만, 그러나 상징적이고, 희극적이며 풍자적인 장면구성을 통해서 타국에서 사는  이주자들의 실수와 잘못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조 감독의 예술적 표현의도를 높히 평가하고, 동시에 우리 교포 자신들도 고향에관한 문제를 적어도 한번, 아니 항상, 사색하고 고민하면서 창조적으로 살아가도록 영화를 통해서 암시 시켜주는 조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 하며, 그의 장래의 성공을 빈다.

2009.12.12. 프랑크푸르트에서  김 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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