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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양장(九折羊腸)

(모젤강 도보 여행기)        2010.9.26. 고랑

올 해의 두번 째 도보여행은 라인강에 이어 모젤강으로 정했다. 1300킬로나 되고, 독일지도와 역사의 중간을 관통하며 도도히 흐르는 독일의 라인강이 „아버지“강이라 불려지고 있다면, 그 강의 지류인 모젤강은 그 길이가 540킬로가 되고, 라인강의 가장 긴 지류이기에 라인강의 „장자 강“이라 일컬어 봄직하다. 더구나 이 강은 중세와 근세에서 각각 독일,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움직였던 두 거대한 석학 (Universalgelehrte)을 배출했으니 과연 독일의 자랑스러운 강이라 할만 하겠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니콜라우스 폰  쿠우스(Nikolaus von Kues, 라틴명은 쿠자누스, 1401-1464, 베른카스텔 쿠우스 (Bernkastel Kues) 출생)와 칼 막스(Karl Marx, 1818-1883, 트리어( Trier) 출생)이다. 전자는 신학, 철학, 기독법학, 고대 그리스- 로마와 아랍문헌학, 수학, 천문학을 섭렵한 중세의 대 학자요, 교황청의 외교관이었으며, 후자는,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철학자, 역사가, 사회학학자요, 과학적사회주의 창시자며,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혁명가였고, 근세의 역사를 변혁 시켰던 큰 인물이다.

모젤강은 5천만년전부터 프랑스의 동북쪽의 포게젠(Vogesen)산맥에서 시작해서, 동북향을 하며 룩셈부르크와 서부독일을 거쳐오다가 코블렌츠에서 라인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으며, 아홉개의 크고 급한 굽이를 도는 사행천(Mäander)형의 강이기에, 그 이름을 „구절양장“의 강이라 불러볼 만도 하다. 이 강은 자기를 가로막는 암반층을 우회해서 아름다운 곡선미를 수많이 그리며 흘러가고 있다. 경사가 급한 비탈지위에 경작한 포도밭들과 울창한 푸른 숲으로 덮혀져있는 강 바깥 쪽 언덕은 강을 푸른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강 안쪽의 좀 완만한 경사를 이룬 동산이나 평지도 역시 푸른 숲이나 포도밭 아니면 조그마한 마을로 덥혀져 있다. U자의 길을 따라서 급한 굽이를  돌며 흐르는 강의 안과 바깥쪽에 자리잡고 앉아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굽돌이마을에는 은은하고 비밀스러운 석판암의 회색빛 지붕일색으로 지어진 집들이 그림처럼 누워있다.  강이 여러번 굽돌이를 돌면서 가느라 생겨진 수 많은 남향이나 남서향의 급경사  언덕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포도밭에는  향과  맛으로 유명한 독일의 세계적 포도주 리스링이 생산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관좋은 강변에서 태어난 두 독일 석학의 생가가  바로 베른카스텔 쿠우스와 트리어에 각각 이웃해 있다. 이런  탓으로 이 강은 해내외 관광객들, 도보여행객들, 사이클리스트들, 포도주 애호가들로 사시장철 붐비는 독일의 일류 관광 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과 룩셈부루크는 1956년에 프랑스의 마아스(Maas), 사온느(Saone), 그리고 로-온(Rhone)강들과 독일 모젤강을 연결해서 프랑스의 지중해와  독일 북해간의 통운의 목적을 꾀하는 모젤강 운하사업계약을 맺었다. 그 공사는 약 20년만에 완성 되었다. 모젤강 상류와 하류의 650미터 높낮이 차이는3미터의 강 깊이와  28개의 보의 설치를 통해서 해결 되었고, 그래서 1500톤급의 운송선이 통과할 수 있는 운하가 만들어진 것이다. 운하공사 때부터 있었던 주민들, 학자들, 언론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룩된 운하공사는 과연 현재 세 나라들간의 화물운송을 가능 시켜주고 있지만,  국민 세금으로  충당시킨 천문학적인 공사비와 운하경영이 가져다주는 하잘 것없는 이익 사이의 메꾸지 못하는 손실격차는 결과적으로 이 운하사업을 국민 세금을 낭비한 실패사업으로 낙인 찍고있는 것이 현재 이들 세 나라들의 일반적인 통론이다. 과연 한 반나절 동안 지켜보는 동안 강에 지나가는 운송선은 고작 서너 척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 세 나라보다도 훨신 적은 면적을 가졌고, 운하공사에 불리한 산악국가요, 3면이 바다라는 이점을 가진 점 때문에 이 명박정권의 애당초의 남한 운하사업이 국민들의 세찬 반발에 의해서 일단 거부는 되었지만, 그러나 만약에 현재 이 정권이 여전히 „4대강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강깊이 6미터 이상의 거대한 보를 파는 실질적인 운하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독일의 실패작들인 라인강, 모젤강 운하사업의 시행착오를 전혀 배우려 하지도 않고, 국민의 의견을 참작하고 토론도 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밟지도 않은 채, 성급히 일사천리로 밀어부치는 어리석고 무식한 한국식 만행과 저돌적 오만 행위가 아닐가?  나아가서 심지어는 천인공노할 부정과  불의의 의혹과 혐의에서도 벗어날 수없는 역사적 조작과 오류를 혹시 범하는 짓은 아닐가?  독일인도 인간의 어리석음에서는 자유스러울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인들 보다는 이성적이기에 이들은 굴곡많은 모젤강의 물굽이들도 한국사람들 처럼 „통쾌하게“ 확 트고 일직선화 시키면서 자연법칙을 마구 어기는 우를 범하지 않는 덕분으로, 이 강은 무척이도 아름다운 자연의 곡선미와 좋은 경관과  파괴되지 않는 풍성한 생태계를 그대로 보전 하면서 그들의 후세들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까지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욕심같아서는 강의 아홉 굽돌이를 모두 다 돌아보았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제한된 도보일정때문에 칼몬트( Calmont), 트라벤 트라박하(Traben-Trarbach), 베른카스텔 쿠우스(Bernkastel Kues), 그리고 트리어(Trier) 네 곳만 보기로했다.

1.칼몬트 언덕

첫날 우리가 간 곳은 칼몬트 언덕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진(65-70도) 언덕에 심겨져 자라는 포도밭으로 유명하고, 그 경사진 포도밭과 바윗길 위로 만들어진 좁은 알프스식 암벽등산로가 모험심 좋아하는 등산객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물론 알프스 등반로처럼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지만, 높은 산 없는 중부나 북부 독일인들에게는 제법 짜릿 짜릿한 위험감을 맛보게 해주는 곳이다. 우리들 동반자중에는 난생 처음 „생사의 기로 길“을 걸었노라며 나중에 고백하는 분도 있었고, 발아래 낭떠러지를  보다가 고공증으로 애를 먹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비슷 비슷한 지루한 도보여행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특별한 경험이 되어 줄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보다도 우리를 더 감탄시켜준 것은 이 곳의 숨 막힐만한 경관과 그 곳에 자라는 강인한 포도나무의 생리였다.

300-400미터나 높고 급경사진 언덕을 땀을 흘리며 숨가쁘게 올라온 등산객들이 받은 보상은 보기 드물게  빼어난 이곳의 경관이었다. 산 정상에서 발밑 낭떠러지 아래로 바라보면 서쪽에서  서서히 흘러오던 강이 발아래의 암벽에 부딪혀서 급한 굽돌이를 하며 돌다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동쪽으로 조용히 흘러간다. 강 좌우로는 포도밭과 숲으로 덮힌 언덕들이 강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고, 강변을 따라서는 조그마한 동네들이 마치 낮잠이나 자고있는 듯이 조용히 누워 있다. 집들은 한결같이 이 지역에 수없이 깔려있는 회색빛  석판암으로 지붕을 해 입혔다. 어둡고 짙은 은이나 금속성 회색은 울굿불굿한 색의 지붕들 보다는 눈에 잘 띄지않고 은근하고 겸손해서 고상하고 비밀 스럽다. 졸부들이 현란한 색갈로 자신을 치장을 하기 일수라면, 실속과 염치가 있는 속부자들은 자신을 숨기고 조용히 있는 것과 같은 생리가 아닐가?

이 휘어진 굽돌이 강 경관은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카메라 대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굽돌이 언덕 높은 곳의 의자에 앉아서 멀리서 왔다가 다시 먼 곳으로 흘러가는 강을 육안으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 속 깊히 잠자던 사색의 눈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강이란 모든 계곡의 물을 다 모아담는 포용성이 있고, 더러운 것도 싫다하지 않고 받아들인 후, 한 곳에 정지해서 썩지않고 늘 유동하면서 정화와 변화작용을 한다. 그러기에 힌두교 교인들은 그 더러운 간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면서도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와 구원을 받았다는 영혼의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가?

애집트의 나일강,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인도의 간지스강, 중국의 황하강들은, 비록 인간에게 이따금 씩 살인적인 폭력행사를 할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인간에게 식수, 농업, 어업, 교통, 전력, 생태계의 서식처등을 제공하면서 경제적 부와  생활의 윤택함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해주던 인류문화의 요람지였다. 또한 미국의 콜로라도 강은 가장 기묘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야생미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강은 인간들에게 적대심보다는 오히려 이타심을 더 많이 제공하는 성스럽고 고마운 자연으로 늘 존경되어 왔었다. 강은 강한 의지와 힘과 영원성을 소유한지라 자신을 지질의 모든 악조건들에게 적응 시키거나, 아니면 그들을 이겨내면서 자기 목적지인 바다로 일사분란하게 흘러 내려가는 특성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강과 물은 자신을 아래로 낮추는 겸손성, 포용성, 적응성, 무한한 유동성, 미래를 향한 목적지향성, 그리고 친인간적인 이타성과같은 그들의 좋은 특성들 때문에 인류의 철학과 종교, 그 중 특히 불교의 원리들인  진리 지향성, 진리의 유동변화와 영원성, 윤회설, 영혼의 정화와 해탈과 구원성등을 암시해주고 가르쳐주는 스승노릇을 해왔고, 또 시인이나 화가, 음악가들에게는,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우유를 주 듯, 시적 감동과 예술적 상상력과 영감을 제공해주는  예술적인 어머니의 품도 되어 주었다.

대체적으로 높고 우람찬 산들이 인간에게 남성적인 기백과 용기와 도전심을 제공해 준다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곡선의 미를 그으며 조용히 흐르는 강은 인간에게 여성적인 지혜와 현명, 겸손과 인내, 조화와 평화를 상징해주는 듯하다. 노자가  일찍 그의 도덕경 역성(易性)편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면서 강과 물을 최선의 도라고 높이 평가하고 칭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라고 강조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기에 이런 강들이 위대한 인물들도 잉태하고 키워준다고 주장을 한다면 지나친 억설이요  잠꼬대같은 소리일가?

독일 고전시대 작가요 미학자인 칼 필빕 모리츠(1756-1793)는 원근법이 유한성을 극복한다면, 곡선은 원으로 상징화된 무한하고 총체적인 신의 선견지명을 역동과 생산적인 형태로 재현시켜 준다고 했다. 모젤강도, 마치 알파로 시작한 그리스어의 끝 자모인 오메가처럼, 원을 아홉번 씩이나 그리려 하다가60도 각을 마저 채우지 못하고 남겨둔 채 실패한 것은 우리가 아래에서 엿보게 될  니콜라우스 쿠우스가 주장한 무지의 지라는 경지에 있는 신, 즉 알 듯 하다가도 모르는 신의 존재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듯 하다. 원은 흔히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완성, 영원, 절대적 존재, 신같은 것을 암시하는 여러 종교들의 상징적 표식으로 사용된다. 강이란  원래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기에, 서양의 문명을 직선으로 표현 한다면, 동양의 자연은 단연코 원을 닮아가는 곡선으로 봄직하다. 그러기에 성급함, 완강한, 강박감, 그래서 단절되기 쉬운 일직선이 아니고, 여유와 인내, 완만 함과 연면 함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아홉번이나 긋고 우회해가며 흐르는 모젤강은 우리에게 동양의 철학을 연상시켜 준다. 모젤강이 독일 최대의  관광지중의 하나로 사랑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자연, 인간, 예술, 문화, 문명, 종교, 신에 대한 사고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제공해주는 이유가 그가 소유한 동양적 철학성과 미학성 때문이라 주장하면, 그것은 동양에서 온 어느 어리석은 이방인이 하는 웃기는 견강부회 일런가?

칼몬트의 어느 중간지점 쯤해서 „4대호수 보는 곳“에 다달아 내려다보니, 강 굽이의 각도와 숲과 언덕이 잘 배치되어 과연 강이 4개의 호수로 잘라져 보였다. 원을 그리려다가 실패한 모젤강이 보여준 그의 안간힘의 기적같은 흔적이다. 바쁜 길을 계속 걸어서 끝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서 오는 길은 이제  갑자기 위험한 알프스식 등반길로 변했다. 우리들은 포도주 재배인들이 높은 급경사의 바위언덕을 깍고 파고 돌담을 세워서 힘들게 만든 포도밭들 사이를 겨우 조심스럽게 가로 질러서 걸어가야만 했고, 포도밭이 없는 가파른 암벽위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있는 등반로가 나 있으며, 그 곳에는 다행이도 군데 군데마다 위험한 곳에 철 사다리와  철 밧줄을 설치해 놓아서 우리들은, 그래도 안심은 하면서도, 난생 처음으로 하는 공중 곡예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가 바위를 미끄럽고 위험하게도 만들었지만, 우리들은 각자가 모두 자신의 생명을 애끼고 중시 여긴 탓으로 사고없이 다시 출발점으로 무사히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 곳의 포도밭은 얇은 석판암과 조개류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서, 비가오면 물이 모이지않고 잘 빠지기 때문에 포도나무의 뿌리가 땅 속으로 깊이 뻗을 수가 있으며, 그래서 이 곳 리스링포도주는 세계에서 보기드문 강한 향기와 여러 광물성 맛을 제공해준다. 부드럽고 연하지 않고 강철같이 단단하고 근엄한 맛을 가진 프랑스의 샤블리 포도주에 보다 더 폭 넓은 광물성 맛과 짙은 향이 가미된 포도주라고 상상을 하면 될 것 같다.  라인강 뤼데스하임 근처의 땅은 두꺼운 바위로 되어있는 탓으로 비가 오면 물이 고이고 진흙으로 변해서 곧잘 아래로 떠내려 가버리기 때문에 포도뿌리가 땅 속으로 깊이 뻗을 수가 없어서 같은 리스링이지만 이 곳 모젤강 리스링처럼 그렇게 깊은 향과 맛은 없다고 평들을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주 감정가 휴 죤손은 이 곳 중류모젤강과 모젤강의 지류들인 자르 강(Saar)과 루버 강(Ruwer)에서 일광량이 높은 해에 생산되는 리스링을, 물론 해없는 여름에 생산되는 최하 질의 포도주를 제외한다면, 세계최고의 백포도주로 평가하고 최대의  높은 점수를 매겨주고 있다.

지금은 군데 군데 설치한 치차운반선로를 이용하긴 하지만, 과거에는 가을 수확철 때 포도재배농부들이 몇십킬로그람이나 되는 포도를 등에 지고 그 비탈진 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렸다고 하니 이렇게 공 들여 만든 포도주가 맛이 없을 수가 있으랴?

우리는 보다 낳은 우리네 인생살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열악한 지역에서 바위를 뚫고 깊은 땅 속에 숨어있는 맛의 보고속으로 깊히 파고 들어가서 온 갖 맛들을 빨아드리는 강인한 리스링 포도나무의 집념도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강물이 간직한 겸손과 무용의 도처럼 꼭같이 중요시하면서 둘 다 함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칼몬트를 떠났다.  

2. 베른카스텔 쿠우스

굴곡이 많아서 교통이 불편하고, 정해놓은 숙소, 차량 정차소, 제한된 시간, 그리고 낯선 곳 오리엔테이션등으로 처음부터 계획했던 트라벤 트라르박흐 주위의 강변도보여행은 하는 수없이 포기하고, 그 대신 저녁 식사 후 이 작은 마을 트라벤 트라박하의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이차대전 중 라인강보다는 적게 파손 된 이 곳 마을에는 백여년 전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많이 보존 되어있다. 특히 두 마을을 잇는 다리 주변은 과거 독일의 고전적인 맛을 많이 풍겨주고 있는 건물들이 모여 있어서 현대의 콘크리트건물에 식상한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마을을 벗어나서 산 비탈의 포도밭 한 가운데에 있는 자가 양조 직매소(Straußwirtschaft)를 물어서 찾아 올라갔다. 과연 길을 물어본 독일인의 말대로 유명한 포도주 마이스터가 만든 술 답게 맛이 있어서 두 병을 사서 저녁교양시간에 몸과 마음과 정신교양의 활력제로 삼고 즐겁게 마셨다. 오늘 저녁의 주제는 니콜라우스 쿠우스에 관한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15세기에서 16세기, 즉, 중세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전환기에 살았으며, 신학, 철학, 법학, 수학, 천문학, 고대문헌학등 총체적 인문학에 박학다식했던 독일 최초의 인문주의자(Humanist) 였었고, 코펠니커스의 지동설을 이미 100년전에 벌써 착상을 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위대한 학자였었다. 그는 또한 콘스탄틴대제가 330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설립한 동로마제국(일명 비잔틴제국)이 1453년에 망할  직전의 순간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고,  분리된 두 동서로마제국의 종교들인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을 마지막으로 통합하려다 실패한 역사적인 시도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서 중재와  통합역활을 잘 해내었던 교황청의 외교적 수완가요, 추기경이었으며, 그의 능력과 수완과 실적때문에 다음 교황의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한 독일의 유능한 인물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문을 닦고, 이태리 파두아에서 학위를 한 그는 모젤강 주변과 독일 전역에서 사제와 교수직을 수행하다가 독일 첫 추기경으로 임명을 받았다.  만년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 교황청에서 두 교회의 통합임무를 받고 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서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요한8세와 협상을 시도해서 간신히 성공을 시켰으나, 동로마제국은 결국 지금의 터키의 오스만제국에 의해서 완전 패망 되어 버렸다.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으로 기독교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수도 콘스탄타노플에 중심교구를 둔 동방정교,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정교는, 예수의 사도들의 대부분이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등에 교회를 세워서 사역한 이유를 들어 사도계승권을 내세우고 카톨릭교회의 정통권(Orthodoxie)을 주장하면서 로마교회와 오늘까지도 정통성 쟁취를 위한 대결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1453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동방정교는 그 중심교구를 그동안 선교해왔었던 모스크바로 옮기고, 그 곳을 제 3의 로마, 제 3의 예루살렘으로 명명했고, 1589년에는 드디어 러시아정교로 공식 명칭한 후, 키릴(Kyrill) 문자를 사용하는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해서 신봉되어져 왔었고, 현재 러시아정교 교회는 세계 여러 각국에 전파되고 있고, 그리고 한국에도 존재한다.

우리가 오늘 날 중세의 학자 니콜라우스를 구태어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수많이 집필한 저서에 내세운 철학과 신학의 여러 이론과 주장과 실천들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것은 진선미의 통합체요, 우주의 제 일 원인이라 할  „하나“에서 정신, 세계영혼, 개체영혼, 물질등이 유출(Emanation)된다는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첫째로, 창조주요, 영원과 절대적 존재인 신과, 그의  피창조물이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참다운 인식이 그의 학문의 주 관심사였었다. 우선 그는 신이란 파악하기도 명명하기도 불가능한 존재임을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신의 개념을, 마치 노자의 무와  도의 개념처럼, 매우 애매 모호한 것으로 정의 하고 있다. 다만 그는 그가 상상하는 신이란 우주만물의 수렴체(Einfaltung )요, 우주만물은 신의 전개물(Entfaltung )이라고만 겨우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우주만물적인 것과 신적인 것, 즉 가시성과 불가시성, 물질과 정신, 시간과 영원, 최저치와 최대치, 다양성과 유일성, 다수와 하나같은 서로 상반되는 양극들은 서로끼리의 모순이 아니고, 서로 상호교류하는 독립적인 특수성을 지녔으며, 그래서 이 양극들의 합일(Koinzidenz)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의 주저“De docta ignorantia“에서 설명한 부정을 통한 긍정, 무지를 통한 지라는 철학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신으로의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가능케 만드는 신적인 이성이 이미 우리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제야 비로소 신적인 진리에로 근접할 수가 있고 , 그래서 인간은 제 2의 신이라고도 그는 주장했다. 이 것은 그가 죽고 난 후 곧 시작되었고, 또 그가 영향을 준 여러 딴 인문주의자들, 특히 브루노와 라이프니츠 들과 더불어 바로 그도 함께 열어 놓았던, 인간을 중시하는,  서양 인문주의시대의 효시적 발상 중의 하나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의 자연철학은 고대의 프톨로메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적인 사고가 아니고, 세상 만물은 각자 모두가 독립되어 있고, 또 항상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코펠니커스의 지동설의 직접적인 스승은 아니었지만, 그 길을 이미 걸어갔던 선험자요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코란을 읽고 연구할 만 큼 타종교, 타문화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포용성도 소유했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아랍문화의 수많은 숨은 서적들을 서양으로 운송해 갔었다. 독일고전시대의 작가 렛싱(G.E. Lessing 1729-1781)이 종교간의 화해, 통합, 평화를 다룬 드라마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도 바로 그의 포용적인 자세가 후세에 수확 되어진 열매라 할 수가 있겠다. 오늘 날 서로 다른 종교, 문화, 정치, 이념, 인종차별로 극열하게 대립하고 싸우는 우매한 현대의 지구촌 입주자들인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화해와 평화로 늘 촉구하고있는 인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그의 생가에는 일본어 저서도 나열되어 있었으나, 한국어 저서는 유감 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젤강의 중심에 자리잡은 관광과 포도주의 중심지요, 독일의 첫 인문주의자의 생가, 도서관, 재단들을 자랑하는 문화도시이면서도,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주위의 경치가 함께 어울어진 주옥같이 아름다운 작은 마을인 이 베른카스텔쿠우스를 구경한 후, 다시 포도밭과 숲으로 덮혀있고 간간히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새김 질하는 소들이 누워있는 목가적인 산길고개를 넘어서 우리를 다시 다음 목적지로 이동 시켜 줄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되 돌아 갔었다.    

3. 트리어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트리어는 모젤강의 최대 도시요, 최대 관광지며, 로마인들이 세운 독일 최초의 도시이다. 그래서 적어도 반년 전에 미리 숙소예약을 하지 못한 우리들은 트리어에서 약 20키로 떨어졌고, 모젤의 지류인 자아르강에 위치한 작은 마을 자르부르크에 숙소를 정했다. 저녁에는 마을 중심에 약 10여미터 길이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있는 곳의 어느 식당에서 구운 송어와 이 지역 포도주를 즐긴 후 우리는 교양시간으로 내일 관광을 할 트리어시가 낳은 칼 막스에 대한 강의와 담론에 들어갔다.

칼 막스는 1818년에 트리어에서 출생하고 1883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유대 랍비가정 출신이요, 부유한 변호사였으며,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 신봉자였던 그의 부친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신교로 개종했다. 막스는 베르린과 예나에서 철학, 역사학, 정치학을 수학하고 예나에서 학위를 했었다. 특히 그는 베르린에서 헤겔을 존경하고 연구했으나, 바우어 형제, 포이어박하, 엥겔스등 신 좌 헤겔파들과 함께 헤겔에 반기를 들고, 추상적인 의식세계, 정신세계, 관념철학, 이념, 절대정신, 영원성, 종교성등을 주장하는 헤겔과 그의 이론을 비판하고 그들을 거꾸로 세우면서, 물질, 몸, 삶의 실존, 구체적 사회조건과 상황, 현실비판, 현실개혁, 역사유물론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류사회와 역사는 이념과 정신이 물질을 변화 시키지않고, 물질이 이념과 정신을, 그리고 물질적 삶의 조건과 경제가 사회와 역사를 변화 시키되, 그러나 물질과 정신, 존재와 의식, 필연과 자유는 상호 변증법적으로 작용해서 유물론적인 역사발전에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고 주장했다.

유태인 태생에서, 기독교적 성장, 무신론적인 교육과 공산주의 사상가로의 그의 삶의 변천적 전개의 철학적인 동력이 되어준 것 중의 하나는 포이어박하가 그에게 심어 준 무신론적인 종교비판이다. 인간의식의 생산물로서의 종교, 도착된 환상의 반영인 종교, 인간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고통과 한 숨에  속수무책하고 외면하는 종교는 인간에게서 인간과 사회를 분석, 비판, 저항, 개혁하는 의식을 빼앗고, 그대신 현실도피와 내세로의 몽상과 위로만을 제공하는„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했다고 그는 비판했다.

보수 경찰국가 프로이센이 그의 좌향성 사상을 이유로 그에게 교수직을 거절하자, 그는 쾰른에서 루게와 헤르벡, 그리고 엥겔스 등 좌파 지성인들과 함께 라이니쉐 신문의 편집장으로서 노동자와 농부들의 불평등한 사회적 정치문제등을 다루며 언론을 통한 정치활동을 하다가, 그 마저도 금지 당하고, 1843년에 파리로 가서 그의 망명인생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전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인 생 시몽, 바쿠닌, 프루동(„사유물은 도둑질이다“라 주장), 블랑키, 엥겔스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사상은 개혁이 아닌 혁명, 사회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쪽으로 점차 발전 심화되기 시작 하였고, 그의 „정치 경제론“, „역사적 유물론“등의 이론들도 형성되었다. 프로이센정부의 집요한 추적으로 그는 벨기로 다시 망명한 후,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체“를 형성하고, 1848에 그의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작성했다. 다시 그는 마지막  망명지인 런던으로 완전히 이주한 후, 그의 사상과 활동을 국제적인 차원으로 발전 시켰고, „정치 경제 비판론“ (1859)에 이어, 그의 주저인 „자본론“(1867)을 저술했으며, 1864년에는 국제노동자연맹을 조직 했었다.

그는 자본가가 자본을 이용해서 노동임금을 착취하고, 잉여가치와 이익을 사취 축적해서 사적 소유물화 시키는 부르죠아계급에 대항해서 착취 당하고 소외되는 노동자 계급인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뭉쳐서 혁명을 통해 계급투쟁을 한다면, 그의 유물사관적인 철학에 의거해서, 자본주의는 몰락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무계급사회가 지배하고, 개인이 각자 스스로 능동적으로 참여, 건설, 향유하는 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 세계가  필연코 등장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으며, 또 그것을 그의 사상과 삶의 최종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오늘 날 그의 수 많은 이론들, 즉 예를 들면, 혁명을 통한 노동자들의 프로레 타리아화와 그들의 독재는 역사적으로 성공 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고,  그의 잉여가치론은 원시적인 정통 막스주의에서는 통용되나, 현대 경제이론가들은 이론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의 계급투쟁론은 복잡한 현대의 사회계층들 간의 예외 들, 즉 예를 든다면, 부유한 프로레 타리아나, 또는 농부와 수공업자같은 과거의 중산계급들 때문에, 단순하고 모순되는 이론으로 간주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무신론적인 종교관, 즉 종교는 인간 의식의 산물이라는 명제도 지나치게 단순 편협한 표현으로 수많은 이론제기를 받고 있다. 또한 냉전이 종식된 오늘 날의 동구 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막스가 혐오한 개인의 사유재산과 개인의 행복 추구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긴 하다. 나아가서 교황이 되기 이 전 보수 신학자 라찡어가 교황청 중심부에서 그의 적수로 제거 시켰던 현대 신학자 한스 큉은 사회주의자도 기독자가 될 수있고, 기독자도 사회주의자가 될 수있음을 확신하고 있고, 라쌀이나, 번스타인의 주장처럼, 서구, 특히 독일의 사민당같은 자유민주주의적 사회주의도 일종의 변형된 오늘 날의 공산주의체제라  인정받고 있으며, 철학자 이링 페춰도 병든 사회의 변혁  구제나 인간해방과 같은 휴머니즘이라는 공통분모적 정신 위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선의의 경쟁도 할 수있다고  주장을 하고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 개인의 사적 소유물, 노동임금, 노동과 노동자의 소외, 물신사상, 공산주의, 헤겔의 변증법등의 제반 문제들을 혁신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연구하면서 인류역사는 이상적 사회주의가 아닌 과학적인 사회주의가  만들어 간다는 그의 학문적인 방법론은 현재까지도 제반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 부문에서 되 돌릴 수없는 필수적이고 공통적인 방법론으로 엄연히 자리잡고 인정도 받고있다. 그의 역사적인 공로이다. 또한 그의 공산주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오늘날 까지도 노동운동에 필수불가결의 핵심적인 이론으로 적용되어 오고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류의 장래를 위협하는 오늘 날의 자연공해가 그가 연구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악의 결과임을 확신하는 인식도 그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150여년 전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레닌이 실현시킨 마지막 실천국인 쏘련의 붕괴(1922-1991)로 우선은 일단락을 그은 듯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준 독재형의 공산주의 체제가, 북조선에서는 중세의 봉건적 세습 독재형 공산주의 체제가 막스의 공산주의의 맥을 잇고 있는 듯하다. 막스가 보고 웃을런지 울런지 매우 궁금하다.

막스의 공산주의 체제를 수용한 북조선이 우연히도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의 국가이면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신봉하는 남한과 서로 적대국이 되어서 반세기가 넘도록 분열과 전쟁, 적대감과 민족애, 모순과 갈등, 긴장과 알륵, 분단과 통일, 희망과 절망감이 서로 교체하는 고통을 함께 안고 살아오고 있는 한반도의 비극적인 운명의 원인이 과연 막스에게 있는 것일가? 그러나 막스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래도 그것이 그가 말하는 역사의 영원한 발전과 변화의 한 과정이라 한다면 또 어쩔가?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오매간의 염원인 통일을 눈앞에 두고도 아직도 분단과 이념전쟁의 지루한 마지막 여울 속에서 미몽과 우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기 주장과 이익에만 급급 하고있는 개전의 여지가 없는 우리의  남북 정치자들과 우리 민족 자신 위에 그 책임이 무겁게 눌려지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 때가 된 줄 안다.

이상이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과 오늘의 우리라는 제목으로 토론하고 담론한 오늘저녁 교양강좌 내용을 짧게 요약한 글이다. 우리의 막스이론에 대한 인식수준은 그 무서웠던 반공법때문에 눈을 감았던 장님이나, 또는 떠도는 풍월을 어슬프게 흉내내어 보는 서당개, 혹은 남 몰래 훔쳐서 읽어 본 도둑 들의 하잘것 없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강좌의 초보생같은 우리와는 달리 오늘 강의를 맡았던 강연자는 반 평생을 막스이론연구와 그 실천에 대해서 온 정열을 바치며 고민하고 살아온 고급반 학생같은 사람이다. 제목 자체도 그렇커니와 강연 내용도 어려워서 한편 약간 지루하긴 했었지만, 그러나 달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흐름에 관한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를 이제서야 약간은 깨닫게 되었다는 자긍심 때문에 기쁘기도 했었다.

몇년 전 월 스트리트에서 발생해서 전 지구촌을 뒤 흔든 증시자본의 폭락과 세계경제위기는 막스의 자본주의에관한 예언을 입증했고, 앞으로도 예상되는 자본주의의 몰락현상은 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럽의 막스 주의자들이요 미래를 점치는 지성인들의 입을 다시 열어서  막스 주의에로의 복귀를 외치게 하기도 한다. 그들은 한낱 이념을 떠나서 보다 더 낳은 인간이 사는 사회를 끈질기게 꿈꾸는 사람들이고, 또 그 꿈이 언젠가는 실현되는 것을 믿고 인내하는 낙관적인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속박 속에서 물신과 재신의 노예가 된채 무딘 신경을 하고 제 살길만 찾아서 하루 하루 연명해가는 우리같은 졸속 소비대중들에게는 존경심을 일으키게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들도 오늘 날 지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악순환들, 즉, 빈부의 격차, 인간소외, 이윤과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주체성 상실,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경제공황, 자연파괴, 환경오염, 공해 등을 날카롭게 관찰, 분석, 지적, 저항할 줄 아는 개몽된 시민이 되어야 할 줄 안다. 동시에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일방적인 치우침없는 현명한 조화 속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남과 북, 종교와 무신론, 기독교와 공산주의,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배자와 피지배자들이 적대감 없이 서로 존경하고 화해하면서 폭력과 전쟁없이  평화롭게 손을 맞잡고 분단을 결별한 통일된 한반도와 보다 더 낳은 미래 사회와 세계를 건설할 수가 있을가 하고 고민도 하고 실천하는 것도 배워야 하리라 믿는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절망과 나태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이고 비판적이며 실천할 줄 아는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시민이 되어야 할 줄 안다. 이런 다짐들을 마음 속으로 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남은 여생의 숙제로 삼으면서, 우리들은 잠자리로 되 돌아 왔지만, 청한 잠은 고사하고 정신만  말똥거리는 밤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날은 오전 내내 트리어 시내에서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3-4세기에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에는 아직도 남은 유적이 많이 있다. 유명한 검은 성문(porta nigra)은 온전히,  원형극장, 궁중 목욕탕들은 그 유형만 남아있고, 그리고 12세기에 지은 카톨릭 대성당은 쾰른과 마인츠의 성당과 함께 독일 3대 성당으로 불릴 만큼 거대했으며, 막스의 생가도 방문하고 그의 삶과 행적을 요약해 놓은 설명판을 통해서 잠시 훑어도 보았다. 몇년 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줄을 지어 방문 했다고 알고 있는데, 주 중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중국인들이 그 사이 막스 보다는 돈을 더 존경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 안다니는 보행자 전용길을 마치 주인이라도 된듯 마음 껏 휘 젓고 다니다가 주린 배를 다시 간식으로 채우면서 우리는 우리의 잊지 못할 모젤강 도보여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지금 까지 도보로 모젤강도 여행했고, 또 같은 모젤강을 끼고 서로 이웃하는 도시에서 각각 서로 다른 시대에 출생했고, 또 서로 다른 학문을 연구했던 두 석학에 대한 인물답사 여행도 잠시 했다. 독일의 이 두 석학들은 각각 극과 극의 서로 다른 학문분야, 즉 한 사람은 신, 정신, 영혼,  영원 등 형이상학문제를 다루는 신학에서, 딴 사람은 물질, 현실, 경제, 정치, 사회를 다루는 사회학 분야에서 출발을 했지만, 종국에는 휴마니즘의 땅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과 학문을 이어주는 공통점은, 첫째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이었고,  둘째는 어떻게 하면 인류에게 미래의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인류사회를 건설 할 수 있을가 하고  늘 고민하고, 연구하고, 고심참담하면서 꿈꾸던  희망의 꿈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독일의 두 석학을 낳았고, 번쩍이는 철학적, 미적 영감도 주면서 아름답게 흘러가는 모젤강에게 우리의 깊은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아쉬운 석별인사를 고한 후, 각자 얻은 전리품을 가슴 속 깊히 간직한 채, 모두 귀가의 길로 들어섰다.

2010.9.26. 고랑

산행 + 생일축하

    70. 생일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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