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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링겐 주의 문화와 문학사 기행

2011년 12월 31일

고랑    

 

튀링겐 산행 기행문이라 적었지만, 실은 튀링겐 주의 문화사와 문학사를 두루 산보하는 전문적인 역사 기행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독일 18/19세기의 문화중심지였던 튀링겐주는 산행보다는 문화기행이 우선시 되는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자의 대중을 위하겠다는 글이 자신의 지적 무능력과 표현의 빈곤 때문에 지루하고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역사의 인물과 그 행적의 지루한 나열을 넘어서 자신의 새로운 의견과  해석을 주장하는 글이 되지 못하는 한계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시간과 흥미가 없으면 제쳐 놓아도 좋은 글이니 잘 판단하셔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고랑 배-

 

1. 루터와 종교개혁

 

30여년 전 동 서독 시절에 분단 된 베르린을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동독 6개 주의 하나인 튀링겐 주를 도보여행을 하면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분단도 되었었고, 또 지금은 문화적인 중심지도 아니고 변방에 서있기도 해서 소홀시 했던 이 지역의 지나간 역사를 좀 더 깊히 들여다 보면서 놀라운 재발견을 하게 되었다. 루터와 괴테의 활동지역 쯤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 지역이 근세 독일의 문화와 정신사뿐만 아니라 정치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구심점 역활을 했던 사실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독일 역사와 문화사의 중요한 사건들, 즉 종교혁명, 계몽주의, 인문주의, 고전주의 문학과 낭만주의 문학, 철학, 음악, 미술등의 문화운동, 민족과 자유주의운동, 사회민주주의와 공산당 정당운동,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헌법제정과 독일 초대 공화국 탄생같은 큰 정치적인 사건들이 바로 이 주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마치 실에 꿰인 진주 알들처럼 일열로 나란히 서있는 도시들인 아이제낙하,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예나, 라이프찍히, 빗텐베르크, 그리고 멀리는 드레스덴에서 압축되어 일어났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마치 독일역사 하늘의 북두칠성 도시들인 것 처럼 말이다. 독일음악의 거장들인 박흐, 봐그너, 리스트, 종교개혁자 루터, 독문학의 최고작가들인 괴테, 쉴러, 그리고 유명한 철학자, 문학, 예술이론가들이 출생했거나 몰려와서 한 때 독일 문화의 꽃을 함께 만발시켰던 역사적인 지역이다. 박흐와 그의 자손들, 텔레만등이 거주하고 활약했던 아이제낙하, 아른슈타트, 바이마르, 라이프찍히 도시들은 독일고전음악의 본산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튀링겐 주의 과거 역사를 한 번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아이제낙하 근처의 바르트부르그성은 12세기 때 독일의 궁정가인들(Minnesänger)의 시 낭송 경연대회(Sängerkrieg)가 열렸던 곳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무대가 바로 이 곳이다. 그러나 무엇 보담도 카톨릭과 봉건왕정에 의해서 추격 당하던 종교혁명가 루터(1483-1546)가 숨어서 라틴어 성경을 독어로 번역하던 은익처로 더 유명하다. 또 1816, 1848년 두차례에 걸쳐서 독일왕정에 반항하며 자유와 민족해방을 구가했던 독일학생동맹(Burschenschaft)의 축전도 여기에서 거행 되었었다.

마르틴 루터는(1483-1546) 라이프찍히 옆의 소 도시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했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했으며, 빗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신학강의를 했었고, 그 곳에서 교황청의 면죄부 비리를 비판하는 95개의 논제를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의 서막을 이 튀링겐주에서 올렸었다.

루터는 5세기에서 13세기라는 기나 긴 중세동안 면제부를 팔면서 유럽의 농민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유럽 각 국가들, 그 중 특히 신성로마제국인 독일로 부터는 황제임명의 대가로 엄청난 세금과 조공을 강제로 징수한 로마교황청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추기경, 대주교, 교황대사같은 성직 매매를하며 늘린 부정 재원 등으로 세속의 부를누리면서 세속정권까지 장악하고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온갖 불의, 부정, 타락, 악정을 일삼던 교황청에 항거하여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 시켰던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인문학을 부흥시킨 르네상스운동과 종교혁명 선구자들인 영국의 위크리프, 보헤미아의 후스의 사상에  영향을받았으며, 동 시대의 인문학자요 종교혁명가들인 에라스무스 폰 로터담, 멜랑크톤, 뮌처, 츠빙글리, 칼벵들과 함께  하나님을 왜곡하고 교황이 지배하는 카톨릭 도그마를 거부하고 참다운 하나님의 이해와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 믿음, 인간가치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신교 교리를 제시했었다.

그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고, 또 오래 동안 지속할 수있었던 이유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한 탓이다: 그리스와 로마 고대문학으로의 복귀를 추구했던 이태리 인문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의 지적 요인, 교황청의 왜곡 조작된  인간구원관과  종교정책에 대한 비판과, 오로지 믿음, 신의 은총, 성서에 입각한 의신칭의를 통해서 영혼구원을 주장하는 새로운 신학적 요인, 교황청의 억압, 착취, 사치와 타락에 대해서 분노하는 농민들의  도덕적 요인, 부를 증식하는 유럽 중산층의 형성 때문에 생긴 노동자, 농민들의 임금폭락과 그로 인한 조공부담 증가에 대한 피압박자들의 항거와 폭동 같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 그리고 1455년 구텐베르크의 인쇄활자 발명과  독일어성경의 보급을 통한 대중들의 계몽의식 발달이 모두 함께 작용했었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교리와 교회 자체만을 개혁한 단순한 종교적인 사건만이 아니고, 비록 루터 자신은 인간중심의 사상은 하나님 중심적 교리에 역행을 한다고 주장은 했지만, 결국에는 신 중심 으로 진행되었던 봉건적 정치와 사회체제가  인간이 중심이 된 정치, 사회, 문화의 체제로 변화 발전되어가는 근세 역사과정의 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해준 사건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벌써 1493부터 종교개혁 1년 후의 종교전쟁(1513)을 거쳐서 슈말칼덴전쟁(1535-1547)까지의 긴 농민전쟁, 그리고 신 구교끼리의 종교전쟁이면서도  동시에 유럽 각국들이 참가해서 벌린 영토전쟁인 30년전쟁(1618-1648)들을 초래 시켰다. 특히 후자의 전쟁은 카톨릭을 신봉하는 독일 신성로마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종교개혁으로 대두된 개신교와 그 영향권하의 북유럽 각 국가들과  대립해서 종교와 지역 패권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분열 동맹 대적을 하면서 진행시킨 유럽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그 결과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은 쇠퇴되기 시작하고, 유럽의 낡은 정치질서는 붕괴되었으며, 유럽은 지리멸열되어 물경 300개의 작은 독립제후국가들이 생겨났고, 유럽의 정치판도도 역시 바뀌게 되었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었다. 예를 들면, 튀링겐을 중심으로 한 남부 독일 및 인근 국가들은 전쟁과 기아와 전염병으로 초토화가 되었고, 그 인구의 1/3이 사망했으며, 유럽 각 국가들 간의 정치와 외교적인 복잡한 반목과 갈등과 긴장관계는 프랑스 혁명 때까지 계속 존속되어 유럽을 혼란 시켰었다.  처음에는 폭력에 희생 당하는 농민들 편에 섰으나 나중에는 농민들의 폭력과 전쟁에 실망을 하고 오히려 군주 편을 들게된 „보수적“인 루터 자신도 원치 않았던 악한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개혁은, 첫째, 부패한 카톨릭 교황청이 1555년 각 지역군주가 각자 자신들이 신 구교를 선택 결정 하게되는(cuius regio, eius religio) 아욱스부르그의 화의에 의거해서 자신의 독점적이고 전횡적인 정교일치 체제의 잘못을 자인하고 세속정치권을 양보하는 정교분리를 하게 해주었다. 둘째로, 카톨릭이 성경해석 독점권을 포기하고 개신교리를 인정하면서 개신교와 공존할 수있는 미래의 기반을 닦도록 해주었다. 세째는, 부패한 봉건왕정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과 개혁의도가 닥아오는 독일의 개몽주의운동과 인문주의 부흥운동에게도 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서양의 근대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한 역사적인 인물들 중의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알프스 남쪽에서 일어난 인문주의 운동이라면, 종교개혁은 알프스 북쪽에서 일어난 북유럽의 인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날 역시 중세의 카톨릭교회처럼 권력과 재화에 눈 어둡고 부패하고 타락한 한국의 종교들, 특히 기독 개신교가 정치, 문화, 사회를 어지럽히면서 난무를 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한국의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해 주었으면 하는 염원을 이 자리를 빌려서 잠시 덧 붙혀 본다.

 

19세기 말 독일의 급진적인 산업화로 생긴 노동자 계급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초기 사민당이 베벨, 맆크넥히트등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아이제낙하, 에르푸르트, 고타, 바이마르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형성되었다. 20세기 초에는 훗날 정치적인  암살테러를 당하게 되는 맆크넥히트, 로자 룩셈부르크들이 역시 튀링겐 주와 베르린 등지에서 독일 사민당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독일 공산당을 조직하고 정치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정치테러와 폭력, 강한 조직력을 통해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극우 히틀러 나치당과의 각축전에서 그들은 드디어 패배를 당하게 된다. 민주 공화당, 사민당, 공산당등 폭넓은 정당들로 구성된 바이마르 공화국 정권(1918-1933)은 이들 과격 극우세력의 정치적인 테러와 방해공작으로 마비되어 혼란기를 거치다가1933년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NSDAP)인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 하면서 15년만에 그 종말을 거두게 된다.

2차대전 후 전승국 러시아의 점령에 반대해서 수 만명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민중봉기가  1953에 에르푸르트, 예나, 게라등지에서 일어났고, 1961년 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 이 지역을 가로 질러 갔으며, 1970년 에르푸르트에서 브란트와 스토우 동 서독 수상들의 정상회담이 있었고, 1989년 동독 정권에 대항하는 군중대모가 일어난 후 1990년 10월 3일 드디어 동서독은 통일을 하게 되었다. 이 것이 독일 근세 근대사의 구심지 역활을 했던 튀링겐 주의 간추린 짧은 약사이다.

 

2. 독일의 인문주의

 

다시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독일 인문주의(Humanismus)를 논하기 전에 우선 유럽 근세화 과정부터 잠시 언급 하겠다. 신이 중심이 되고 인간은 그의 한낱 피 창조물 이상이 아니었던 중세, 그리고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격으로 모든 지상의 통치를 맡은 교황청과 그 위임정치를 맡은 봉건왕국들이 지배하던 암흑의 중세 때, 농노와 노예 역활만 해왔던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자유와 해방의 빛을 처음으로 제시해줄 사건은 인문문예운동인 르네상스였었다. 그 중요 역활을 한 인문주의자들은 14,15세기의 이태리에서는 단테, 보카치오, 다빈치, 프랑스에서는 페트랄카, 뷔데, 영국에서는  모루스였으며, 그 이후 지동설을 주장한 코펠니커스, 신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 지동설과 천체학을 중심한 근대과학의 혁명가 갈릴레이들이 인간 자신들이 발견하는 새로운 우주와 지구와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인문주의운동의 획기적인 첫 꼭지를 따 주었다.

유럽의 인문주의는그 이후17-18세기때에 신과 전제군주의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이성, 관용, 평등과 자유에 의거해서 발전하는 인간을 믿는 계몽주의의 이름으로 비로소 각 나라에서 본격적인 꽃을 피우기 시작했었다. 영국에서는 신 아닌 인간중심의 국가주의를  제창한 홉스, 인간의 감성과 자성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자 록크와 베이컨등이 그 대표자들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 볼테르, 룻소, 디데로등 철학자, 문학자, 백과 전서파들 같은 이성위주의 계몽주의자들이 인문주의를 주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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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인문주의발흥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도 철학가 칸트(174/1804)와 극작가 렛싱(1729/1781)이 대표적으로 독일 계몽주의시대의 막을 열었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 무폭력, 양심의 자유, 도덕, 관용, 창의성 개발, 인성교육, 그리고 신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등을 통해서 인간 자신이 저지른 우매성의 탈피와  자아의 성숙을 권유했다. 라이프찍히와 빗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 철학, 의학을 공부한 극작가 렛싱은 그의 수 많은 드라마에서 전통적이고 교조적인 종교와, 비인간적인 정치, 사회, 제도, 관습에서 해방된 계몽되고 독립된 인간의 상, 관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타문화나 타 종교까지도 수용할 수있는 성숙한 시민의 상 등을 추구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희곡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연되면서 애호를 받고있다.

 

현 튀링겐주의 수도에 있는 에르푸르트 대학은 벌써 루터가 독일의 첫 인문주의자 울릭히 훗텐과도 함께 공부를 했었고, 또 네델란드의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폰 롯터담과도 서로 학문을 교류했었던 독일 인문주의 운동의 첫 요람지였다. 이 지역이 이 운동의 선두역활을 한 이유는 튀링겐주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낙하, 또는 작센-고타지역에서 17세기 중엽에 아우구스타 왕, 경건의 왕 에른스트, 그리고 150년 후 괴테시대 때의 여 군주 안나  아말리아, 그 아들 칼 아우구스트왕과 같은 계몽된 현군, 현왕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선정과 이상적인 문화정치를 베푼 덕분이었다. 에른스트왕은 벌써 1642년에 루터의 빈민층 구제와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았었고, 그 아들들인 에른스트 아구스트 1세와 2세는1807에서 1814년 사이에 농민해방, 도시자치제, 직업의 자유, 직업교육같은 계몽 군주국 프러시아의 민주적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세계 최초로 12세 이하 아동들의 의무교육제도를 실행했으며, 1817년에는 현대식 학교, 1840에는 첫 유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튀링겐 여러 도시에서는 프랑스 디데로의 백과사전 영향을 받아 마이어, 브로크하우스, 두덴같은 독일의 유명한 백과사전들이 출판되었고, 1820년에는 고타의 첫 병보험회사가 출범했으며, 1882 백화점 헤르티가 문을 열어서 대중들의 편의를 도모했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기차로선이 생겼으며, 1833에는 세관과 상업협회도 결성 되었다. 대중들의 경제적인 부와 개몽을 통한 삶의 질이 착취를 당했던 카톨릭 봉건제도의 중세 이 후 처음으로  빠르게 상승되어 갔던 곳이 바로 튀링겐의 각 도시들이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까지 있었던 소위 독일의 „신 인문주의“(Neuhumanismus)운동도 바로 이 튀링겐주를 거점으로해서 전개 되었다. 칸트(1724-1804), 빙켈만(1717-1768), 헤르더(1744-1797), 괴테(1749-1832), 쉴러(1759-1805)들이 그 주역들을 맡았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 미, 예술교육을 통해서 지성과 심성,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인성 교육과 그 인간 형성을 그들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빙켈만은 그리스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중요시하는 독일의 신 고전주의, 신 인문주의자였다. 알렉산더 훔볼트는 신 고고학자요, 예술론자며, 식물학, 지리학, 지질물리학자로서 남미등으로 여행하며 자연을 탐구한 세계적인 자연과학자였고, 그의 형인 빌헬름 훔볼트는 정치가, 철학자, 언어학자며,  독일 인문주의 고등학교와 베르린 대학을  창시한 교육자로 유명하다. 이들 모두는 바이마르를 근거지로 하고 괴테, 쉴러와 친교를 맺으면서 신 인문주의 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철학자 헤겔(1770-1831)은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하고 교수가 되었다. 그는  변증법이론을 전개시켜서 현실과 역사를 함께 연결하는 총체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했고, 지나친 종교와 신앙성을 배제하는 계몽주의의 반작용으로서  절대적인 이상주의, 관념주의를 주창했으며, 신의 자의식이 인간 자체 내에서도 인식 가능함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그 후에 보수 기독교주의 우경학파와 혁명을 믿는 좌경 청년헤겔학파로 분열되었다. 후자에는 유물론자들인 막스, 엥겔스, 포이어박하, 브루노 등이 속했다. 특히 헤겔철학은 역설적이게도 막스가 현대인류사의 획기적인 이론인 그의 유물사관과 사회과학이론을 수립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말하자면 헤겔을 거꾸로 돌려 놓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 이상에 기반을 두고 귀족적인 엘리트교육을 강조하던 신인문주의도 19세기에 몰려오는 새로운 자연과학과 기술도입, 산업화에 적응 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비 현실적인 이상주의라고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니췌의 비판은 준엄했다. 또한 인문주의는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독일 문학과 예술사에서 감상주의(Empfindsamkeit),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 낭만주의(Romantik)같은 흐름에 의해서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기성 인문주의 세대들의 현실안주와 타협, 그들의 교조적인 이성과 계몽위주의 편향적인 경향을 맹열히 비판하는 젊은 질풍과 노도의 작가들인 괴테, 쉴러, 헤르더, 렌츠들은 이성의 절대적인 지배 에 대립해서 감성과 심성과 상상력, 그리고 불만스러운 현실에 반항하는 독창적인 개성과 천재성을 주장했었다. 슐레겔, 노발리스, 아익헨도르프, 폰 아르님들이 주동이 된 초기낭만주의도 이성위주의 계몽주의 문학운동이나, 고대 그리스의 언어, 문학, 질서, 조화, 균형, 완성, 안정, 이성적인 현실과 객관성들을 중요시하는 바이마르 중심의 독일 고전문학에 반발하고 대항하게 되었다. 이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 제한성의 극복,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과 꿈과 자유의 추구, 개성과 주관성과 감성들을 중요시하고, 중세의 신비성,  우주의 변천성과 영원성을 주장하였다. 이 낭만주의는 지나친 이성의 강조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에 균열이 생기면서 잃어 버렸던 인간과 문학과 시대를 총체적인 시성 추구, 창조적인 상상력, 영원성등의 개념을 통해서 통합 치유, 회복하고 교육 시키려고 했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숲과 계곡의 자연, 중세 수도원, 동화, 신화와 전설, 상상의 세계같은 비현실 내지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지배하는 곳이 이 세계적인 독일낭만주의 문학의 공간과 무대가 되었다.

 

3. 문화와 정치의 중심도시 바이마르

 

에르푸르트대학이 이미 16세기에 루터, 훗텐같은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들이 둥지를 일찍 튼 이후17세기에 와서는 독일 인문주의 운동의 시발점 역활을 했었다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철학과 문학의 중심지인 예나대학이 독일 문예사에서 그 찬란한 황금기를 맞게된다. 절대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픽히테(1762-1814), 절대적 이성을 믿는 헤겔, 독일 이상주의를 낭만주의와 기독교 전통과 통합을 시도한  쉘링(1775-1854), 낭만주의 이론가인 프리드릭히 슐레겔( (1772-1829), 역사철학자요 극작가인 쉴러(1759/1805)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이상주의를 강의하면서 많은 젊은 지성들을 교육시켰다. 그 중에는 유명한 젊은 낭만주의 작가 들도 많았다: 노발리스(1772-1801), 휄더린(1770-1802), 브렌타노(1778-1842),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1767-1845, 그리고 그의 동생 프리드릭히는 예나를 소위 „초기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칼 막스, 예나의 세계적인 광학회사 차이스의 창립자인 차이스도 이 곳에서 공부를 했었다. 1807년에는 괴테가 대학의 고문역을 맡은 후 자연과학 학부들을 새로이 개설해서 첫 종합대학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남부 독일에 있던 쉴러도 예나대학에 철학교수로 초빙 임명되어 학생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의 철학, 역사학, 문학이론과 풍성한 작품창작들도 주로 이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1808년에는 보수작가 괴테와 혁명가인 나폴레옹의 역사적인 상봉이 이 곳에서 있었다.

예나대학은 1806년 나폴레옹이 프러시아군을 예나근처에서 격파하고 독일을 점령한 이후 독일의 과격한 청년 민족해방운동의 근원지가 되기도 했었다. 학생들은 1815년 프랑스 치하에서 독일 최초의 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를 조직하고 격투(Mensur)의식 등을 통해서 독일의 민족주의와 자유운동을 전개 시켰으나, 1815년 강력한 메테르닉히의 반동보수주의 정책으로 혁명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혁명을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한 보수주의 나라 독일의 한 전형적인 역사현상이다. 그러나 그 대신 독일은, 혁명의 나라 프랑스와는 달리, 종교개혁이니, 왕성한 철학과 문학의 부흥, 인문주의 운동같은 머리 속으로 하는 문화혁명은 활발하게 했던 문화의 나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는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옮겨 가 보자.

바이마르는18세기 말 에서 19세기 초엽까지 독문학사의 고전주의문학의 중심지, 19세기 중엽에는 미술대학, 음악대학, 여러 문화유산의 기록 보관소들이 설립된 문화의 중심지,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는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된 곳이었지만,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히틀러 청소년단이 창설되고,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에 반발하는  나치정권의 모태가 이 곳에서 태동되면서 진보 보수의 대결이 격렬했던 정치의 중심지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1816년 민주주의 헌법을 최초로 제정한 독일의 첫 도시였고,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의 제정 선포와 첫 대통령의 탄생이  국립극장에서 있었으며, 그 역반응으로 그 당시 독일의 유일한 언론의 자유 도시인 이 곳을 히틀러는 40번이나  방문하면서 보수반동운동을 집중 전개시킨 곳이기도 하다.

 

문화적으로는 괴테 쉴러의 고전주의 문학운동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에 매혹된 낭만주의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이며, 올해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리스트(1811-1886)가 이주해와서 유명한 리스트 음악학원을 설립한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849 드레스덴의 5월 민주봉기에 가담했다가 피신한 후 바이마르에 오게 된 릭하드 봐그너(1813-1883)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을 했고, 1850년 리스트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초연을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직접지휘로 성공시켰다. 근대 음악가들인 릭하드 슈트라우스(1864-1949), 막스 레가(1873-1960)들도 이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활약 하기도했다.

라이프찍히 근교에서 출생했고 한 평생 모반적인 철학이론을 세웠으며 만년에는 지병으로 고생하던 철학자 니췌(1846-1900)도 남은 여생을 이 도시로 이주해와서 살다가 그의 문서 보관소(Nietzche Archiv)를 남기고 사망했다. 19세기의 문화애호가요 후원자인 작센의 여 현군 안나 아말리아(1739-1807)는 진귀한 옛 문헌들을 수집 보관한 유명한 동명의 도서관(Anna Amalia Bibliothek)을 창설했다.

이 도시는 또한 미술대학교인 바우하우스(Bauhaus)로도 유명하다. 1919년 건축가 봘터 그로피우스와 디자인가 헨리 클레멘스 판 드 펠데들이 수립했고, 뵉클린, 렌박흐가 교수했던 이 전위적 현대예술학원은 건축 혹은 구조(Bau)라는 단위가 모든 조형예술의 기본요소이며, 건축은, 현대의 영화처럼, 딴 예술들과 깊은 연관을 가진 대표적인 종합 예술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순수와 응용예술의 차이, 예술가와 수공업자들과의 사회적인 구분을 철폐시키고 예술의 민주화를 주장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엽의 독일의 유명한 화가요 조형예술가들인 리오넬 파이닝거, 러시아 화가 바질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오스카 슐렘머, 오토 딕스등이 이 바우하우스 출신들이며, 그들은 15-16세기 옛 독일의 화가 알브렉히트 뒤러, 루카스 크라낙하,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들의 전통을 이어 받은 독일의 후예 예술가들이다. 이렇게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있는 바이마르가1999년 유럽의 문화도시로 인정 받게 되었고,  유네스코 유산문화재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독일의 문화도시로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있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4. 총체적 천재작가 괴테

 

그러나  바이마르는 무엇 보다도 독일의 대표적 작가인 괴테없이, 그리고 괴테 자신도 바이마르 없이는 생각할 수없는 도시이다.

이제 부터 바이마르에서 60여년 동안 살았던 괴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유한 조부 덕을 본 괴테의 부친은 풍부한 교양을 지닌 법학자요 프랑크푸르트 시의 왕실고문이지만,  정치 보다는 학문과 교양, 그리고 무엇 보다도 자식의 이상적인 교육에 전념했다. 괴테의 모친 역시 프랑크푸르트시의 부유한 행정수반인 부친의 딸이었다. 어린 괴테는 부친에게서 건실, 근면, 교양을 통한 건전한 생활관과 인간도야 성향을, 모친에게서는 명랑성, 낙천성, 그리고 전설과 동화 구두전술을 통한 예술과 문학취향성을 일찍 전수 받았다. 부유와 교양과 예술이 지배하는 가정환경, 소년시절 내내 부친과 가정교사를 통한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천재교육, 그리고 총명성과 학구열이 겸비된 타고난 천재적인 재질은 이 행운의 소년을 미래의 독일문학과 세계문학의 한 뛰어난 작가로 만든 기본 바탕이 되어 주었다. 어린 시절 작은 인형극장을 통한 민속과 전설문학과의 접촉,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태리어등 유럽 각국의 언어습득, 자연과학, 종교, 음악, 목각과 동판조각, 승마, 검술, 무용실습등 광범하고 종합적인 제반 인문교육은 괴테를 조화와 균형있는 건전한 인본주의적 교양인과 문화인으로, 그리고 성숙되고 통찰적인 큰 인문주의작가로 성숙시켜 주었다.

그의 문학의 인문주의적인 방향설정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고,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 역활을 해준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두가지 경험이었다. 7세 때쯤 접한 수 십만명의 죽음을 초래한 리스본의 대지진 체험과,  7년전쟁기간 동안 자기 집에 머물던 프랑스 장교를 통해서 경험한 프랑스 희곡문학과 그 당시 선진국 프랑스 문화와의 상봉이었다. 전자는 괴테가 기독교 신과 교리에 대한 실망과 회의에서 „나는 반 기독자가 아닌 비 기독자다“라고 고백까지 한 그의 비기독적이고 범신론적인 종교관 형성의 씨앗노릇을 해주었다. 그는 만년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도 배우면서 코란과 이스람 종교에 심취하였고, 페르시아의 작가 하피스의 영향을 받아 근동아시아문화를 다룬 „서동시집“(West-östlicher Divan)을 창작했었다. 후자의 경험은  그가 순진하고 우직하지만 편협한  독일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타민족, 타국가들과 상봉하는 그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관을,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 사회, 민족, 국가, 세계, 자연과 만나는 그의 범우주관적 사고를 형성 시키게 해준 결정적인 기억이 되어 주었다.

16세 때 부친의 권고로 부친이 공부했던 라이프찍히대학 에서 법학공부를 시작한 괴테는 법학대신 고대미술사, 예술사, 문학이론, 시 창작, 그리고 여인과의 사랑에 더 관심을 가졌다. 자신을 구속하던 프랑크푸르트의 가정에서 자유가 된 젊은 소년은 개방과 유행의 새로운 도시 라이프찍히의 아우어박하 켈러같은 주점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가 결핵병을 얻게되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귀가해서 요양을 받는다. 요양시절 동안  경건주의, 신비과학, 연금술에 심취를 한다. 라이프찍히 시절의 아우어박하 슬집, 신비과학, 마술, 연금술같은 소재들은 괴테가 소년시절 프랑크푸르트에서 경험한 사생아를 살해하고 처형된 그렡헨사건과 함께 파우스트 1부에 생생히 재등장한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다시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 입학해서 법학박사학위(실은 그의 논문 중 반 교회대목으로 거절되었다가 준 학위를 인정받음)를 취득한다. 이 시절 그는 다시 연애와 시 창작에 몰두했고, 법학, 신학, 문학 연구가 헤르더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으며, 호머, 쉐익스피어, 오씨안의 작품들과 접촉하게된다.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법율사무소를 운영했으나 흥미를 잃었다. 다시 부친의 위임으로 베츨러시에 출장생활을 하던 중 친구의 애인을 헛되이 사모하다가 자살하는 젊은이를 소재로한 유명한 소설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판했다. 25세의 민감한 젊은 문학청년인 그가 겪고있는 청춘시절의 모순과 고통과 정열의 체험을 고도의 폭발적인 감정과 감성적 표현으로 터뜨려 묘사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전 유럽에 인기를 얻고 유명하게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775 그가 26세가되어 바이마르로 가기 전까지 왕성한 작품창작에 몰두한다. „토르콰토 타소“와 더불어 질풍과 노도운동의 기폭제 역활을 한 그의 유명한 희곡 „굇츠 폰 베르릭힝겐“, „우어 파우스트“, 그리스를 소재로한 여러송가들과 희곡들을 창작했었다.

 

18세의 젊은 왕 칼 아우구스트가 남독을 여행하던 중 인문주의자며 유명한 작가 괴테를 수소문한 후 자기 모친 안나 아말리아제후의 허락을 얻어서 그를 바이마르의 자기 왕궁에 행정인재로 초대하게 되었다. 26세의 젊은 문학청년인 괴테가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낙하 제후국의 귀족칭호를 받고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그리고 끝내는 내각수반의 직을 맡아 활동을 할 정치가로 변신하게되는 첫 순간이다. 문학창작이 그 인생의 주임무이었지만, 총체적인 인문주의사상과 신념을 소유한 그는 사고와 행위, 이성과 감성, 문학과 정치, 인간과 자연같은 이원론의 합일을 생활 속에서 현실화 시킬려는 거대한 목표를 품고 정치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광산업, 전쟁과 도로사업, 재정같은 여러 행정부문에서 바쁜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작품창작행위는 계속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광물학, 식물학, 골상학, 해부학, 광학같은 자연과학부문의 연구와 개발에도 고심을 했다. 고산지대의 광산도시 일메나우에 수 십번 여행을 하며 광업개발에 정진을 했다. 매일 궁중의 여러 뛰어난 인물들과 교류하는 궁정사회생활에서는 자기억제와 마음의 평정과 인간성숙을 훈련했다.

이렇게 그는 다방면의 생활 속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공동체, 소우주와 대우주사이에 지배하고있는 법칙을 몸소 인식하고 터득하려는 노력을 끝없이 한다. 그 범주에 그의 연극활동도 속한다. 그는 궁정극장의 극장장으로서 극장운영, 유능한 극작가, 작품, 배우선발과 교육의 책임뿐만 아니라, 직접 연출과 연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 보다도 그의 쉴러와의 상봉과10여 년 동안의 우정관계는 독일문학사에 더욱 크고 중대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예나대학의 고문인 괴테는 사생활과 작품창작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던 남독에 있던 쉴러도 괴테의 스승인 헤르더처럼 예나와 바이마르 대학교수로 초빙임용해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 두 작가들의 성격과 문학 취향은  괴테가 종합적이고, 직관적이요, 감성적이며, 질서, 균형 조화를 중요시 했다면, 쉴러는 그 반대로 이념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적이었고, 현실에 머물지않고 끝없는 자유와 인간해방을 모색 추구한 점이 서로 달랐다. 그러나 서로가 상반 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고대인문주의에서 예술의 최고이상을 찾겠다는 공통의 관심사 속에서 그들은 서로 상부 상존의 자세로 작가적인 우정을 유지하면서 각자가 풍부한 작품생산을 한 것은 세계문학계에서 보기드문 이례적인 성공사례였다. 그들은 서로가 공동으로 잡지편찬과 서한교환을 통해서 비판과 자극과 고무를 제공하면서 생산적인  창작생활을 이루어 내어 소위 말하는 바이마르의 독일고전문학 전성기를 만들어 내었다. 병약한 쉴러가 일찍 죽자, 그의 두개 골을 들고 깊은 사색에 빠져서 읇조린 괴테의 시는 유명하다.

 

괴테는 이렇게 궁중의 연회실, 여 제후의 살롱, 자택과 사저에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작가, 학자들을 광범하게 초빙하고 상봉해서 활발한 대화, 토론, 작품발표, 강연등을 통해서 자신의 인품고양과 문학작품 증진을 동시에 시도했으며, 나아가서 독일 문예사와 문학사의 중요한 구심점 역활을 해준 독일의 모범적이고 뛰어난 작가의 원형상을 제공한다.

 

행정전문가가 아닌 괴테는 처음의 의욕과는 달리 행정실적을 올리지 못하거나 실정을 연속하게되어 정치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는 입궁 10년 후인 1786년에 1년간의 이태리여행을 하게된다. 태생이 작가인 그에게는 이 여행은 자유와 해방 그 자체였었고,  제 2의 탄생 이었다. 특히 감성적 작가인 괴테에게는 북유럽의 어둡고 음침한 자연, 우울과 사색이 지배하는 내면적인 삶과는 달리, 남 유럽의 맑고 밝은 자연, 인간, 관능적이고 감성적인 생활분위기,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문화와의 밀접한 접근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관, 자연관과 예술관을 제시해 주었다. 수 많은 스켓치와 수채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독일고전문학의 백미의 하나로 손꼽히는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가 이 곳에서 완성되기도 했다.

중년과 만년의 괴테 정치관은 보수적이다. 청년시절 그는 쉴러처럼 프랑스혁명에 열광하고 지지를 했으나, 혁명이 점차적으로 폭력화되고 체바퀴도는 것을 보고, 혁명을 거부하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점차적인 개량 개혁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1817년경 독일의 수많은 작가들이 독일민족의 자유와 해방과 민주주의를 제창했던 것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그 상관적인 관계와 발전을 믿는 보수적인 괴테는 오로지 자연과학이론과 문학작품 창작에만 몰두하였다. 괴테의 인생관과 자연관은, 파우스트나 그의 „은행 잎“이라는 시에서 보듯, 일방적이고 편중적이 아니고 양극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항상 변화 발전하는,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지혜로운 자연의 변형(Metamorphose)이 그 중심사상을 이룬다.

나날이 원숙되어가는 작가 괴테는 시와 희곡뿐만 아니라 소설과 자서전도 집필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교양소설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편력시대“, 또는 „친화력“이 유명하고 „문학과 진리“라는 자서전도 유명하다. 괴테는 소설 „친화력“(Wahlverwandtschaft)에서 한 부부가 각각 서로 다른 이성을 남 몰래 사랑했다가 다시 정상화되어가는 인간들의 합일과 분열과 변화를 통한 인간성숙과정을 화학물의 반응과 역반응과 비유하면서 묘사를 했다. 괴테는 그의 평생의 필작인 희곡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완성한 후 1년만에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희곡들은 산문이 아니고 유려한 운율로 된 시형식으로 쓰여져서 고전의 우아함과 위엄을 보태어 준다. 괴테는 모든 문학장르를 섭렵한 천재적 작가이다.

 

괴테의 문학은 그의 후세대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어떻게 수용이 되었을가?

1871년 지방분권국 독일이 드디어 통일된 보수주의 독일제국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던 인기있던 쉴러와는 달리 괴테는 비애국주의, 반혁명성, 비기독성, 비윤리성같은 성향때문에 인기가 하락되다가 통일이 된 이후부터는 그의 친제국주의적 성향, 그리고 인간과 행위와 작품을 잘 조화 통일시킨 천재적 작가의 능력 때문에, 높히 추앙되면서 괴테숭배론이 시작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는 그가 제국주의를 기피하면서 이상주의를 선호한다는 점 때문에 독일정신사의 한 거물로 역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그는 지난 왕정시대 때 보수시민적인 이념사회의 한 영웅에 지나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평을 받았다. 브렉히트도 그의 파우스트를 귀족 부르죠아 학자가 서민계급의 처녀를 농락하는 것 그 이상의  작품은 아니라는 혹평을 가했다. 나치시대 때에도 그의 비민족주의, 세계주의, 개인주의적인 경향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그들의 독일 민족주의 이념에 왜곡되고 남용되었다. 그는 나치가 숭배하는 독일민족의 신화적 영웅 직프리드가 교양을 받아서 승화된 독일의 한 영웅으로 취급 당한다. 기존 기독교에 혁명적 자세를 보여준 니췌는 괴테가 시민사회의 속물이라 비난을 하면서도, 그의 반기독성, 반종교성, 그리고 반독일적 성향때문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1945년 이 후 사회주의체제 동독에서도 독문학의 사회주의학자 루카치가 괴테의 청년시절의 프랑스혁명지지, 1848년 3월혁명의 정신적 기여, 그러나 무엇 보다도 파우스트2부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과 자유속에서 사회주의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누려야 한다는 괴테의 정치사상을 근거로해서 막스 레닌주의적인 해석을 해주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누리게 되었다. 서독시대와 현재의 독일학교에서는 괴테와 그의 작품은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인문주의적 고전작가요 뛰어난 명작으로 독일 교과서에 고정화 되어서 독일소년들의 인성교육, 교양교육에 이바지되고 있다. 그의 희곡들은 독일의 극장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상연되고 있다. 헤세, 호프만스탈을 위시해서 수많은 후대 작가들도 괴테를 존경하고, 자신들의 작품창작을 위해서 괴테의 작품들을 분석, 토론하며 도움을 청했다. 괴테가 죽은 후 수많은 작가들이 파우스트소재를 다루었지만, 그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는 다른 시각과 다른 차원에서 다루었고  파우스트를 음악 작곡가로 변모시켜서 집필한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파우스트 박사“가 유명하다. 토마스 만은 같은 건전한 보수성향을 띈 괴테를 높이 숭상 했었다.

괴테숭배는 문학에서만이 아니고 음악계에서도 열열했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등은 체험과 자연을 다룬 그의 수많은 아름다운 시들을 작곡해 주었고, 프랑스 작곡가 구노는 가곡 „파우스트를"작곡했다.

오스트리아의 비교도자(Esoteriker)요, 철학자, 교육자인 루도르프 슈타이너(1861-1925)는 20세기에 지배하는 이기주의, 물질주의, 기계 기술만능주의에 사로잡혀서 인성을 잃은 인간에게 자연, 예술, 생활을 종합한 총체적인 삶과 사고와 교육을 주장하는 괴테 사상 (Goetheanismus)을 정립 했다. 그가 발전시키고 꽃을 피운 인지학(Anthroposophie)과  창조적인 인성 교육학교 발도르프(Waldorfschule)는 오늘 날 에도 이상주의 교육의 한 모델로 애호받고 있다.

끝으로 젊은 시인 하이네도 딴 여러 작가들처럼 바이마르에 있는 제후작가 괴테를 방문하고 자기와 자기 작품소개를 하면서 그의 총애를 구했으나, 괴테는 낭만적이었고  상상력이 더 풍부하면서도 비꼼과 풍자성이 강한 하이네의 시에 실망을 한 탓인지, 혹은 혁명적인 하이네의 성향이나, 또는 자기 시와는 다른 인기있는 하이네의 시에서 느낀 시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이었는지 모르나, 하이네를 문전걸인 대우를 해주었던 일화는 독일 문학에서의 이질적인 두 작가들의 경쟁심, 자부심, 시기심, 반목들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우리들은  도보여행의 마지막 순서로 바이마르 근교에있는 나치 수용소 북헨발트를 방문했다. 저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만행을 새삼 피부로 느껴 보면서 상상해 보았다. 전쟁과 폭력과 살인을 혐오한 괴테가 이 곳을 방문했다면, 그는 아마도 독일민족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민족이라고 저주했을지도 모른다고.

 

5. 괴테의 불휴의 명작 „파우스트“

 

1부와 2부로 구성되었고, 전 작품이 시적 운율형식으로 쓰여졌으며, 비밀에 쌓인 천지만물의 진리와 운행법칙을 탐구하는 학자가 회의와 절망 끝에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악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모험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당한다는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비극이다. 이 인물의 계보는 루터의 동시대인물이요, 마술, 주술, 연금술에 능했다는 역사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민속전설화 된 학자 파우스트, 영국극작가 마를로가 다룬  희곡 „파우스트“, 그리고 의사, 철학자, 화학자, 연금술사였고, 인간의 영과 육과 자연을 아우르는 대우주론(Makrokosmus)을 통해서 인간 삶의 본체와 인간의 최종지식을 구했던 스위스의 파라첼수스(Paracelsus, 1493-1541)가 파우스인물의 원형들이다. 이 인물에 새로운 소재도 가미하고 새로운 시각과 구성으로 깊고 넓은 문학적인 지평선을 부여하며 창작한 비극 „파우스트“는 괴테가 죽기 1년 전까지 60여년 동안을 실험작품(Urfaust)도 발표하고 끊임없는 구상과 사색을 거친 후 성공시킨 그의 필생의 걸작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문제들인 육체와 영혼, 선과 악, 현실과 이상, 자유와 숙명, 절망과 구원, 인간과 자연등을 총체적으로 다룬 그의 최고 최대의 거작이다. 이 작품은 시간적으로는 인문주의의 본향이었던 그리스, 봉건왕국이 지배하던 중세, 인간중심사상을 주장한 르네상스, 그리고 작가가 살았던 18-19세기의 인문주의시대를 관통하고 있고, 공간적으로는 독일, 그리스 뿐만 아니라 천상, 지상, 연옥, 지옥,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광활한 시공의 무대를 보여준다. 육중한 철학적 소재의 선택, 폭넓고 깊게 다루는 역량있는 문학적 구상, 활달한 전개와 시적으로 정제된 표현들은 괴테가 과연 뛰어난 총체적 작가(Universaldichter)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작품의 1부와2부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테마는 절대적인 진리를 탐구하다가 회의와 좌절에 빠지는 학자의 비극, 악마의 도움으로 청년이 된 주인공이 순진한 처녀를 유혹 농락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 악이 교체되는 그렡헨비극, 그리고 학문과 진리의 상징적 인물인 파우스트와 지상 최고의 미와 예술의 상징적 여인 헬레나와의 짧은 결합같은 인간의 이상적인 행복도 역시 지상의 찬라적인 허상과 허무와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러나  사랑을 상징하는 영원한 여성적인 은총이 그의 영혼을 구원 한다는 세 가지 테마들이다. 이 테마들은 이 희곡의 서막에서 하느님과 그의 상대역인 메피스토가 하느님의 „종“으로 간주되는 파우스트의 속성권을 두고 서로 내기를 하는 큰 틀 이야기 속에서 전개가 된다. 즉 파우스트 이야기는 그의 구원이 처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는 한계 안에서 발전 전개된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욥이야기에서 처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정론(Theodizee)에 의거해서 파우스트의 자기에 대한 충실과 귀의를 믿었고, 메피스토는, 자신은 과거에 하느님을 배반한  천사였고, 또 하느님에게 상대되는 적합한 대적자가 아님을 스스로도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약점과 불완전성을 투철하는 영리함을 소유했고, 인간에 대한 회의, 비판, 조소의 자세를 가진 부정적인 악마이기에 하느님과 경연을 감히 시도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단 하나님과 악마는 파우스트가 지상에서 인간인식의 절정과 최대행복을 찾는 바로 그 순간 악마는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는 있지만, 천상에서의 영혼은 악마가 침범해서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조건하에서 소위 제1의 내기를 서로 약조를 하게된다.

희곡의 1부에서 자신의 진리탐구의 절대적 요구에 매도되어 죽음을 통해서라도 목적달성을 하겠다며 자실시도까지 했던 파우스트는 이 번에는 악마 메피스토와 제 2의 내기를 건다. 내기 조건은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인간과 우주의 최종의 진리추구에서 지금까지의 실망과 회의대신 명확하고 만족스러움을 줄만한 답을 제시 해 준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내용이다. 악마는 이 계약에 서명한  어리석은 파우스트에게 약물을 먹여 청년으로 환원시키고 라이프찍히의 아우어박하 주점의 주색여흥과 고슬라 근처의 브록켄산에서5월1일 전야에 벌어지는 마녀들의 광란의 축제(Walpurgisnacht)에 초대한다. 곧 이어서 가난하고 무죄한 처녀 그렡헨을  중매시켜서 그에게 인생 최대 행복 중의 하나인 성의 환희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 녀에게서 인간의 영원한 행복대신, 오히려 그녀 오빠를 살해하고, 그녀에게는 처녀유린, 사생아 잉태, 영아살해, 광녀, 처형이라는 일련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비극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희곡 1부는 그렡헨이 처형되는 순간 그녀는 구원되었다는 하늘의 소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작품의 1부가 자신의 비극적인 삶의 기복들을 그리며 극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사건들 속에서 고통받는 한 개인의 현실적인 삶을 주관적인 차원에서 극적으로 진행 시켜 나갔다면,   2부는 그와는 매우 다른 차원, 즉 객관적인 상상, 판타지, 은유(Allegorie)와 상징(Symbol)의 세계 속에서 관조적으로 객관적으로 진행된다.

제1막에는 작품 제1부의 원치않던 결과를 초래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영육이 모두 지친 파우스트가 아침 해가 찬란히 빛나는 우아한 초원에 누운 채 긴 악몽에서 깨어난다. 그가 보고 경험한 지나간 속세와 인생은, 마치 플라톤의 동굴비유처럼,  단지 영원히 비밀의 베일에 쌓인 찬란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유토피아 세계의 한 그림자, 여운, 자취, 반조(Abglanz)에 불과하고, 지각과 이해와  근접이 불가능한 세계의 은유(Metapher)에 지나지 않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곧 이어서 그는 메피스토의 인도로 재정에 시달리는 중세의 어는 황제의 궁으로 안내된다. 메피스토와 파우스트는 지폐 제조로 그 왕국의 위기를 극복 시켜준다.그 보답으로 황제는 그들에게 고대 그리스의 가면을 쓴 부의 신, 목양 신,  마차몰이 소년(Wagenlenker)같은 은유적인 인물들, 반신 반인들이 등장하고 각 국 민속 춤들이 벌어지는 중세의 카니발인 가장무도회(Mummenschanz)로 초대한다. 황제는 또한  그리스의 이상적인 남녀의 원형들인 파리스와 헬레나를 등장 시키게해서 청중과 특히 파우스트에게 연정의 불꽃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그 것도 한 순간. 갑작스런 큰 폭발과 함께 모든 가면들과 허상들은 풍비박산, 공중분해가 되어 사라졌으며, 그 때문에 파우스트는 기절을 하게된다.

제2막에서는 메피스토가 병든 파우스트를 다시 그의 옛 서재로 다리고 가서 그를  다시 학사로 변모 시켰고, 그의 옛 조수 파물루스 봐그너는 그 사이 박사가 되어 시험관에 여러 물질을 배합해서 인조 영혼인간인 호문쿨루스를 창조한다. 호문쿨루스가 파우스트의 병은 그리스에서 치유할 수 있다면서 그리스 여행을 제안하자, 메피스토와 파우스트는 마술외투를 입고 그리스로 떠난다. 그들은 메피스토가 착상하고 연출했고, 또 다시 여러 고대 그리스의 실제인물, 신화와 전설의 신같은 각종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그리스의 광란의  축제(Walpurgisnacht)에 함께 참가한다. 호문쿨루스는 난장이에서 성인으로 변모가 되었지만,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의 마차와 충돌하고 시험관이 파괴되면서 사망하고 아울러 축제도 다시 파장으로 끝난다.

제3막에서는 메피스토는 스파르타에 있는 메네라오스의 왕궁에 변장을 하고 침입해서 여왕 헬레나를 납치해서 중세 독일의 궁으로 대려온다. 기사차림을 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가 유인해서 데려온 미와 예술의 상징인 대망의 트로야 여왕 헬레나와 드디어 결혼을 하게된다. 괴테가 바이런을 재생시켰다고 하는 미동의 오이포리온이 출생된다. 제2의 이카루스라고 하는 오이포리온은 하늘로 날라 올라가다가 추락해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헬레나도 유토피아 그리스의 화려한 환상도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고 축제는 파탄으로 끝이난다.

제4막. 깊은 산 속의 한 밤중. 현란한 그리스의 축제와 헬레나의 헛된 영상들이 불타버린 한 줌의 재처럼 손에 남게 된 파우스트는 다시 현실세계로 되돌아 오게 되었고, 인생의 깊은 무상함과 헛됨을 느낀다. 애처러운 그렡헨의 상도 그의 망막에 다시 떠 오른다. 그는 학문, 부, 권력, 명성과 꿈대신 이제는 인간사회를 위한 보다 보람있는 행위가 더 중요 하다는 새로운 인식을 얻게된다. 마침 황제의 나라에 분란과 전쟁의 난국이 지배하자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전쟁을 평정 시켜주게 되었다. 그 공훈의 대가로 그는 황제로 부터 해안의 넓은 땅을 봉토로 하사 받는다.

마지막 제 5막은 파우스트가  작품의 1부와 2부를 거쳐오면서 제한되고, 믿을 수없고, 죽은 시체같은 언어, 지식, 학문, 육체적인 사랑, 부와 권력, 그리고 그리스의 이상적인 미와 예술 모두가 불확실하고 불충분한 허상과 허구와 허무임을 인식하며, 인간 역시 절망, 불안, 우울과 소외 속에 갇힌 외로운 존재임을 재확신 하게된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제는 한 선한 식민지 개척자가 되어서 빈민자, 노약자, 억압당하는 대중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서 해안 땅의 간척사업과 도시계획과 주택건설에 몰두하게 된다. 모든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참다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면서 만년을 보내는 것이 그의 가장 보람되고 만족할 만한 새로운 삶의 비젼이 되었다. 그는 그 상징적인 인물을 언덕위에서 외롭지만, 그러나 행복하게 사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노 부부에서 보았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가 그의 마지막 생애의 새로운 꿈의 모습이라고 보았던 이 노 부부들 마저도 그의 간척사업에 방해가 된다해서 소사시켜 버리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이 비젼이 그가 찾는 인간의 최상 최대의 인식의 절정이고 행복임을 인식하고 드디어 파탄적인 독백을 외우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나에게는 나의 최대의 행복일 것 같으니 머물러다오!“라고.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현재의 확신 아닌 소원을 표현하는 가상법으로 쓰여졌지만, 그 것은 분명히  메피스토와 맺은 계약조건을 충족 시키는 문장이기 때문에 독백이 끝나는 즉시 그는 생명을 잃게 되었고, 메피스토는 승리해서 의기양양하게 된다. 그는 파우스트를 땅에 묻고 그의 영을 지옥으로 데려가서 응분의 보복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 떼의 천사들이 홀연히 나타나서 그를 혼란시키고 파우스트의 영을 빼았아 연옥을 거쳐서 천상으로 호송해 가자, 메피스토는 드디어 자신의 패배를 맞게된다. 인류의 시조모요, 천상계의 지배자인 „영광의 모“(mater gloriosa)가 베푸는 자비와 성경 속의 세 참회 여인들이 해주는 기원의 도움으로 연옥에서 참회중이던 그렡헨은 파우스트와 천상에서 영원한 재결합을 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은 드디어 천사들의 유명한 합창으로 해피엔딩이 된다: „모든 허무는 은유일뿐, 부족함이 성취되고, 말이 전할 수없는 일은 일어나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도다.“ 

 

파우스트 작품의 해석은 수없이 많고 무한 하지만 절대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들간에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같은 이원론들인 육체와 영혼, 선과 악,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 언어와 행위, 자유와 구속, 현실과 이상, 의지와 예정(Theodizee), 절망과 구원등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마다 시각과 가치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괴테는 자기가 살던 시대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회상이나 문제점 보다는 인간의 이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근본문제들을 다뤘기 때문에 역사적 사회적인 시각에 입각한 해석방법만으로는 근본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은유, 비유, 상징같은 문학매개체를 통한 작품의 내재적이고 보편타당한 해석방법이 불가피하다.

실지로 작품 전체, 특히 2부에서는 괴테가  인물, 사건, 장소, 시간, 묘사등 모든 것을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암시와 비유적인 그림과 상징들을 통해서 파우스트뿐만 아니라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이면에 숨은 참다운 실체의 세계로 늘 눈을 돌리게 만든다. 파우스트는 최대의 진리인식과 지고의 유토피아를 향해  끊임없는 탐구를 하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외롭고 불상한 비극적인 인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렡헨도 인간의 비극적인 죄와 참회라는 지상적인 사랑과 속죄와 구원이라는 천상적인 사랑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숭고한 여성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여인이다. 메피스토 역시 약점과 미완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교만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부정성을 투시 폭로하며 조소하는 통찰적인 시각의 상징인물이요, 동시에 신에게 거역을 하지만 종국에는 옳고 절대적인 신에게 정복당하는, 말하자면 신의 하수인 역활 밖에 못하는 인간 상을 상징시켜 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헬레나 역시 고대 그리스의 관능적인 미와 예술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임은 자명하다. 그 이외에 마차몰이군, 호문쿨루스, 성루지기 린코이스, 오이포리온들도 각각 시정(Poesie), 원소의 결합으로 만든 인조 영혼인간, 인간과 세상을 투시하는 관조성, 그리고 파우스트의 이성과 헬레나의 미의 새로운 창조적인 결합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사랑에 희생물이 되어 죽은 그렡헨이 구원당하고, 메피스토와의 내기에서 패배하고 죽은 파우스트도 구원받는다는 내용 자체도 인간 속에 내재한 사랑의 힘과  인간적인 성실과 노력이 받게되는 보상의 상징적 행위들이다. 그들을 구원한 영원한 여성적인 것도 인간 최고의 가치를 모색하다가 절망하고 방황하는 인간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천상의 신인 영광의 모 역시 괴테의 중심사상인 우주, 자연, 인간탄생과 부양, 그리고 변형,  변신(Metamorphose)과 그 힘(Entelechie)을 주재하는 신적 존재의 상징 인물이다. 세상의 최대 지배자인 하나님을 모성으로 대신한 것은 괴테의 비 기독교 사상에서 온 것임을 우리는 곧 알아차릴  수가 있다. 괴테는, 신을 잃은 현대인처럼, 신 자체는 부인하지만, 현대인과는 달리, 신적인 것은 아직도 수긍하는 200년 전의 작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 이외에도 우리는 인물이나 사건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문학적 의도 자체도 상징성을 띄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탐구자의 비극, 그렡헨비극, 그리고 지상에서 인간, 세계, 자연, 이성과 미와 예술의 결합시도들, 이 모든 것들은 허구, 허상,허무에 지나지 않고, 비가시적이고 비밀에 쌓인 피안의 영원한 지고적 존재의 반조, 반사광 즉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괴테는 이 작품에서 지상의 인간들은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그들은, 파우스트 처럼, 신의 조건없는 은총대신, 그들이 보여주는 노력과 성실성 때문에 구원을 받게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그렡헨 비극에서 처럼 살인범죄, 처녀유린과 벌을 초래시키는 불완전한 존재요, 인간사회는 분쟁, 소유욕과 집착으로 인한 전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파우스트가 갈망하던 그리스의 이상세계도 광란의 축제라는 저속하고 천한 세계로 전락되어서 조소와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결합처럼, 독일 인문주의적 고전문학과 고대 그리스문화와의 새로운 결합마저도 모두 허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괴테)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진리와 인식추구의 노력을 쉬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짧게 종합 정리해서 해석을 해보자.

첫째, 제2부 1막의 초원장면에서 파우스트가 독백하 듯, 인간이 지상에서 그렇게 열열히 추구하는 언어, 지식, 학문, 진리의 세계는 죽은 시체, 껍데기, 허구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실체요 알맹이인 참다운 유토피아같은 세계는 인간에 의한  접근과 이해와 인식이 불가능 하다는 점.

둘째, 파우스트가 5막의 끝 장면에서 인식하 듯, 제한, 불완전, 허무만이 지배하는 현실뿐만 아니라, 완전과 영원과 절대가 지배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꿈의 세계 마저도 허구와 허상이요, 지상에서의 인식이나 현현은 불가능하며, 단지 저속한 비유(Allegorie)나 기껏 고상한 상징(Symbol)같은 추상적인 매개체를 통해서만  암시될 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인류를 위한 사회복지국 건설과 같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다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며 지상으로 눈을 돌리는 그의 친 현실관.

세째, 수많은 좌절, 갈등,허무,죽음과 새로운 재생의 변형(Morphologie)을 통해서 지고한 이상세계를 지상에서 실현하려는 파우스트의 끝없는 갈구와 노력과 앙망의 눈길에 천상은 그 세계를 여는 열쇠인 상징과 사랑과 은총과 구원을 그 회답으로 그에게 하사한다. 인간의 앙망과 그 보상으로 하사되는 은총의 강림이라는 두 인과관계의 힘들이 동시적으로 연계되어 상하 운동을 한다는 사실.

이 세 가지 내용이 극작가 괴테의 최종적인 착상이요 구상이며 작품 구성의 골격이다. 다만 파우스트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이나 헤겔과는 달리, 현실의 피안이나 천상에 있는 이상, 신, 구원을 의식하면서 갈구하고 앙망하지 않고, 이상의 실현 가능성을 지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믿으면서 실천한 인물이다. 노력하는 그에게 내린 하늘의 은총과 구원(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면서 하는 천사의 노래:“항상 추구하고 노력하는자를 우리는 구원한다.“) 은 작가 괴테가 자신을 대변하는 파우스트에게 내려 준 긍정적인 가치평가요 보상일 따름이다. 괴테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눈을 두고있고 범신론적인 종교관을 가진 고전주의 작가이다.

 

 마지막으로 200년전에 살았던 괴테가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 해보겠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판이하게 다르다. 시대적인 상황, 인간의 생활, 가치, 철학관들 모두가 변화되었다. 극도로 발달한 자연과학과 기술은 지상의 시공을 좁히고, 우주의 접근을 가속 시켰으며, 인간생체의 비밀이 밝혀졌다. 지하자원과 자연의 과다착취및 파괴는 인간에게 최대의 부와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인간은 이렇게 지상과 우주를 장악하면서 그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신은 죽은지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 대신은 자연과 환경은 파괴 오염되었고, 이제는 자연이 오히려 인간을 보복하고 위협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어 인간은 억압없는  평등과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지만, 인간의 얼굴 아닌 야수의 얼굴을 하고있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독점자본의 폭식, 폭력은 지구상의 빈부 차이와  계급사회와 부자유, 불평등을 상대적으로 더욱 심화 확창 시키고 있다. 학문과 지식과 사회는 고도로 전문화, 세분화가 되어 인간들의 상호소통과 상관관계는 단절되었고, 물질주의, 소비주의, 이기주의는 그들에게 신 내지 신적인 것, 영혼, 인간성, 사회성을 망각 시키고, 그들을 불안과 고립과 소외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환경오염과 그 결과로 오는 기후변화는 인간과 지구와 그 생물들의 미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있다. 이런 오늘의 우리에게 괴테는 아직도 균열과 분리가 되지않은 인간상을 제시하는 좌표역활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괴테는 민주주의제도 이전 아직도 봉건적인 독일 군주시대때에 왕으로부터 제후칭호를 받은 제후작가이지만 그는 독일문학과 문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화사위에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도 높이 솟아있게 될 고매한 „제후적 인작가“로 남게되리라 확신한다.

 

한 달 전에는 문화와 예술의 주 튀링겐에서 아이러닉 하게도 신 나치 극우파들이 터키인 아홉 명을 살해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동서독 통일이 낳은 악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심한 동독만의 현상이 아니고, 전체 독일인들의 보편적이고 잦은  외국인 적대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괴테가 보고 경악할 독일민족의 추한 모습이다.

괴테는 비록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균열되고 서로가 적대적이고 파탄적인 관계로 발전되리라 전혀 예상을 할 수 없었겠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우리가 잃었던 그의 친 자연적, 친 환경적, 친 인간적이고, 그리고 아직도 균열되지않은 그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이며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세계관, 인생관, 예술관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경의와 존경마저도 느끼게 된다. 그의 인문주의적인 사상과 삶의 자세가 오늘 날 절실히 요구된다.

특히 서양문명과 문화를 비판없이 받아들여서 경제성장제일주의, 물질주의, 배금주의, 소비주의, 치열한 경쟁과 이기주의들이 지배하는 살벌하고 반 인간적인 황야같은 땅에 살고있는  한국인 들에게는 인성, 인본, 윤리, 도덕, 정신과 영혼, 문화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위엄과 인간들 끼리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식을 중요시하는 한 큰 인문주의자 괴테의 삶과 사상이 재인식되고 토론의 대상도 되어질  수가 있다고 본다. 무엇 보담도 자신의 사회적인 출세와 경제적인 행복만을 위한 겉 껍데기 교육에 아까운 소년시절과 청춘을 희생당한 체 정신과 영혼의 빈혈증을 앓고있는 가련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참다운 진리와 자아, 미와 삶을 동시에 추구하고, 자신과 사회공동체와의 유기적이고 조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인문주의자 괴테는, 비록 서양인이긴 하지만, 그들의 훌륭한 사표요 인생의 지표가 될 수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록 괴테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가 분단된 한반도를 보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조화와 균형과 통합사상을 강조하면서 분열과 분단된 한반도아닌 통합 통일된 한반도를 우리에게 간곡히 제안하고 충고하리라 믿는다.

 

끝으로 이 글은, 제목이 말해주 듯, 튀링겐주의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하고 전개 되었으며, 독일 문화와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 했었던 독일 인문주의와 고전문학을 좀 지루하지만 자세하게 다룬 탓으로, 재미있는 도보여행부분을 소홀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메나우 도시를 중심으로 „괴테 도보 길“과 „박흐에서 괴테까지의 길“을 부분적으로만 답주를 하던 도중에 있었던 한 감동적인 장면을 유종의 미로 삼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우리는 일메나우 근처의 킥켈한이라는 산의 정상에 서 있는 나무로 지은 한 조그마한 괴테 산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젊은 행정가 괴테가 이 지역의 광산개발 계획으로 수 십번 방문했을 당시의 어느 날 그는 이 곳에 세워진 그의 산장에 들러서 한 쪽의 나무 벽에 칼로 자기의 아름답고 유명한 시 한 수를 새겨 두었다. 그 시는 오늘 날까지도 희미하게나마 유리에 끼워져 있고 각 국의 언어로도 번역되어 보전되고 있다. 그 후 괴테는 그가 죽기 3년 전에 노구의 몸으로 이 곳을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마멸된 시를 손으로 어루 만지면서 회상도 하고 마음으로 되 뇌이면서 자신의 조용한 말로를 감상적으로 그려 보았다.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과 조용히 동질화되어 영면하려는 괴테의 모습이다. 저자가 이 시를 아래처럼 졸역해 보았다.

 

방랑자의 밤 노래 (괴테)

 

모든 산 꼭대기 위에는  

고요함이 쌓여있고                                                                                                  

모든 나무 끝에는                                  

숨결소리 들리지 않으며,

숲 속에는 작은 새들 마저

침묵을 지키고 있네.

잠시만 기다리면

너 또한 쉬게 되리라.                                

 

(2011.11.25. 고랑)

 

6.15정신

615 유럽공동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