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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흑림 산행기

(독일 숲의 내력)

2012년 9월 16일

김 원 호     

 

독일의 가절 5월에 우리는 흑림(Schwarzwald)으로 산행을 갔다. 독일의 서남 쪽 끝에서 남북으로 150km, 동서로 50km 뻗어져 있고, 프랑스와 스위스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이름 난 관광지대이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유명한 월츠의 강 다늅과,  튀빙겐, 슈투트가르트, 하이델베르크를 잇는 낭만의 강 넼카의 시원지가  이 곳에 있고, 스위스에서 출발한 라인강이 이 흑림의 남쪽 끝을 감싸 안았다가 다시 북으로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흑림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이 주로 짙푸른 침엽수들인 독일 가문비나무 (Fichte), 전나무(Tanne), 소나무빽빽히 덮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산업으로는 키가 30미터가 넘는 질 좋은 나무들 때문에 임업, 목재 수공업, 그리고 정교공업이 성하다. 옛날에는 수분함유량이 많은 이 나무들을 뗏목으로 이어서  라인강에 띄워 네델란드 까지 운반하여, 마치 옛 베니스왕국이 리바논의 삼나무를 베어와서 매립지를 메웠듯이, 그 곳의 도시와 주택지 건설을 위한 저지매립지의 지주목과 선박제조와 돛대용의 목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독일의 유명한 뻐꾸기시계의 고향이 이 곳이고, 독일의 시계공업, 금은세공품, 유리제품과 장식품 제조도 활발한 곳이다. 독일에서 가장 일조량이 많고 온난한 지역이며, 산행을 하다보면 눈앞에서 번갈아 가며  연속되는 검은 숲, 푸른 초원과 목장, 단정한 색갈의 동네마을, 맑은 시냇 물, 좋은 경치, 전통의복 을 입은 순진하고 인정많은 슈바벤 농부들을 자주 만날 수가 있다. 이렇듯 수려한  자연경관, 친환경지역과 그 산업 때문에 매 년 3천 5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이 곳으로 몰려 온다고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 하이데거가 흑림에서 매일같이 사색하며 산책을 했었고,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도시 프라이부르크에는 숲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개울물들이 열어놓은 작은 도랑들을 따라 시내 한 복판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가 서로 어울려서 보여주는 매력이 흑림관광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독일의 신화와 숲

 

독일 전 영토의 1/3을 차지하며, 아우토반, 강, 도시, 마을들과 거리감없이 인접해 있으면서 독일인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의식 속에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숲은 독일인들과는, 딴 민족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없는, 매우 특별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있다. 숲은 그들에게는 단순한 자연공간만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공간으로서 자고로 그들의 신화와 역사, 전통, 민족, 예술, 의식과 일상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했다.

독일의 숲과 나무가 독일인들의 영혼과 민족과의 일치성, 동일성을 이룬 것은 과거 독일의 민족신화와 역사로 부터 시작되었다. 고대의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무속종교와 민속학에 의하면 나무는 세계와 우주의 중심에 서 있고,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지녔으며, 인간의 생과 사와 재생이 순환되는 성스러운 상징물이었다. 나무는 인간을 탄생시켜서 키우고 보호하는 어머니요, 인간은 세상 모든 위험의 피신처인 숲 속에서 자라고 커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고대 북유럽 게르만족 영웅들의 신화와 역사를 다룬 에다(Edda)신화는 우주의 영혼이 깃 들고 있는 „생명의 나무“(Yggdrasil)를 언급하고 있으며, 오늘 날에도 스웨덴의 엎살라시 근교에 실지로 이 성목이 서 있어서 외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숲 속에 살던 „야만인“ 게르만 민족을 고대 로마인들을 통해서 경건한 기독교 민족으로 교화시켰던 기독교의 경전에도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 예수의죽음과 새 생명의 상징인 십자가 나무,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등장하는 종려수가 언급 되어 있는 사실, 그리고 무엇 보다도16세기 중세 때에  독일의 숲에서 인간의 타락과 영생을 상징하는 상록수를 소재로 하는 „낙원 놀이“같은 연극과 축제가 자주 개최된 이 후부터 계속 전승되어서 성탄절의 전통풍속이 된 독일의 성탄장식나무, 게르만 민족의 여러 자연 신들의 축제행사지로서의 숲, 등 등 이 모든 것들은 게르만 민족이 전통적으로 나무와 숲과 각별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근거들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100년에 발간 된 그의 역사서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을 검은 숲 속에 사는 야만민족으로 묘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서기 9년 게르만 민족을 점령한 막강한 로마의 장군 바루스가 북독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케루스크족 제후인 아르메니우스(독일 명은 헤르만)가  이끄는 게르만 군대에 의해서 완전 섬멸을 당하고 독일과 유럽에서 점차로 후퇴를 하게 된 전쟁사를 기록 하면서 숲 속의 게르만민족의 용맹성을 경탄 하기도 했다. 헤르만 장군과 그의 승리는 그 이후 독일 민족과 역사와 신화와 예술에서 자랑스러운 불멸의 상징으로 채색 되어져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북독의 데트몰트시 근교에 헤르만의  거대한 기념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전쟁에서 신화가 된 것은 영웅 헤르만뿐만이 아니고, 토이토부르크 숲도 마술적이고 신화적인 숲으로 동시에 격상 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있었던 4세기 중부독일 라인강 가에 있는 보름스 지역에 잠시 존속했었던 동 게르만 족의 하나인 부르군드 왕국이 로마와 흉노족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던 사실을 내용으로 삼은 작가 미상의 독일 중세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독일 중세문학의 빼어난 걸작품이다. 부르군드의 왕 군터, 그의 누이동생 크림힐트, 크상텐왕국의 왕자 직프리드, 아이스랜드의 여왕 브룬힐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정절, 충정, 기지, 영웅, 무훈, 시기, 모함, 살인 복수, 보물 소유권 싸움 등의 모티브들을 중심으로 하고 벌어지는 방대한 서사적인 이야기는 독일의 일리아스로 높히 평가 애호 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용맹성, 순진성, 충성심(Treue), 정직성, 신뢰성을 갖춘 주인공 직프리드의 인간성은 독일민족성의 원형으로 높히 추앙되어서 그들의 정체성 형성과 예술창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직프리드가 보름스의 울창한 숲 속에서 사냥도 하고, 그의 명검 노퉁을 손수 대장질 해서 만들었고, 용과 싸워 이겼고, 그 피에 목욕을 했으며, 새 소리를 듣고 반지와 보물을 찾았으며, 브룬힐드와 결혼도하고, 마지막에는 운명적인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 곳도 숲이었다. 그래서 이 숲 역시 신비롭고 마술적인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 때에는 숲은 악한 악마와 적과 도둑들이 사는 어둡고 무섭고 위험스러운  세계였으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치면서 숲은 밝고 성스럽고 선한 기적과 신화가 지배하는 친인간적인 세계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숲은 독일의 민속음악, 민요, 동화, 전설, 문학, 미술 전반을 아우르는 모든 예술과 문화생활에 하나의 메타퍼로 정착하게 되었고, 문화생활의 무대와 배경을 이루었으며, 민족 향수의 공간이기도 했다.

 

독일의 낭만주의와 숲

 

독일의 숲은 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했던 18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에 등장해서 한 세대동안 독일 문화사를 지배했던 낭만주의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였다.

낭만주의 작곡가 칼 마리아 베버(1786-1826)가 작곡한 독일의 민족오페라  „마탄의 사수“(Freischütz)의 무대는 숲이며, 숲의 마력적이고 신비스러운 면, 어둡고 밝은 면을 이 오페라는 잘 들어내 주고 있다. 세습산림관 쿠노, 그의 딸 아가테, 아가테를 구혼하는 명사수 막스, 그리고 연적인 막스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사탄인 사미엘에게 팔아서 얻은 마탄으로 아가테를 억지로 쟁취하려는 구혼자 킬리안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질투, 흉계, 범죄같은  인간의 행위들이 악한 사탄의 마법이나 선한 은둔자의 선한 개입과 같은 초현실적인 요소들과 접목되어서 전개되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그 소재를 이루고 있다. 깊은 한 밤중 천둥, 번개, 폭풍, 마녀와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무서운 숲 속의 늑대골에서 백발백중의 마탄을 만드는 무시무시한 장면, 사냥시합 때에 킬리안의 흉계에 따라 막스가 그로 부터 받은 마탄으로 비둘기 (아가테)를 쏘았으나, 숲 속에 사는 은둔자가 흉탄을 킬리안으로 돌려서 오히려 킬리안이 죽게되는 마술적인 장면, 부정한 마법을 이용해서 아가테의 사랑을 쟁취 하려던 자신의 범죄를 깊히 속죄하고 용서를 받은 막스가 종국에는 아가테와 결혼을 하는 기독교적인 소재 등, 전형적인 낭만주의 요소들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낭만적, 신비적, 마법적으로 묘사된 숲의 분위기, 숲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두 세력, 그리고 숲 속의 전설적인 소재들의 혼연일치가 그에 걸맞는 아름다운 선율과 음악과 잘 조화된 이 작품은 그 당시 대중 속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독일의 가장 사랑 받는 낭만적 민족 오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릭하드 봐그너도 그의 유명한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의 세 번째 가곡 „직프리드“에서 영웅 직프리드와 숲과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신화화 시키서 역시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또 하나의 다른 거봉을 이루고 있다.

 

숲과 나무는 낭만주의 미술에도 중요한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 때 독일의 숲을 다룬  알브렉히트 알트도르퍼(1480-1538)를 시조로 하고, 화가 오토 룽게(1771-1810)와 함께 독일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카스파 다빋 프리드릭히(1774-1840)는 그의 수 많은 자연풍경화에서 특히 숲과 나무와 산을 그의 중요한 주재로 삼았다. 먼 곳, 가까운 곳에 안개나 구름 속에 싸여있는 나무와 숲과 산과 바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그들을 멀리서 내려다 보는 작중 인물의 배후투시법들은 그가 그린 작품이 자연을 단지 복사만 하는 풍경화가 아니고, 인간이 감지하는 자연세계와  허무, 고독, 멜랑콜리, 죽음, 제한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가 서로 만나서 무한, 영원, 피안, 신같은 보이지 않는 드높은 초월적 세계 속으로 함께 몰입하여 그 세계와 일치하려는 인간의 동경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적인 풍경화이다. 인간세계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독일 낭만주의 정신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작품들이다. „숲 속의 사냥군“( Der Chasseur im Walde)에는 독일 가문비나무들이 마치 좌우로 열병식을 하듯 서서 한 가운데의 (프랑스)사냥군을 조이 듯 에워싸고 있다. 19세기 초 독일을 점령한 나폴레옹군을 퇴치하고 독일의 자유를 잠시 초래시킨 프러시아의 해방전쟁을 상징적으로 그린 정치적 작품이다. 그 이외에 „눈 속의 참나무“, „숲 속에 밀집한  독일가문비나무“ 등의 작품들 또한 독일민족의 강인함과 영원성, 자연과 인간의 합일에 대한 동경과 갈망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살았던 독일의 언어학자들인 그림 형제(Jacob, Wilhelm Grimm)들은 그 때까지 구두로 전해지던 독일 민속동화들을 수집해서 „아동과 가정동화“라는 책으로 엮었다. „헨젤과 그레텔“, „븕은 두건과 여우“(Rotkäppchen und der Wolf), „백설공주“(Schneewitchen), „잠자는 숲 속 미녀“(Dornröschen), „지빠귀턱수염 왕“(Drosselbart) 등 수많은 유명한 독일 민속동화들의 주 무대도 역시 독일의 숲이다. 숲은 순진무구한 공주나 어린이들이 가난과 기아, 계급사회의 학대, 저주, 살인같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갈등과 위험에서 벗어나서 찾아가는 안전한 도피처이지만, 동시에 사악한 마귀와  마법이 지배하는 위험한 곳이며, 용감한 왕자나 기사와 영웅들이 공주들을 마법에서 구제하는 해방과 구원과 기적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곳은 계급과 갈등, 불의와 부정, 인간의 사악한 이성 세계가  아닌, 사랑, 평등, 평화같은 감성과 기적과 신화가 지배하며, 동물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도 하는 이상적인 영원한 유토피아의 세계였다.

이제는 독일낭만주의 문학의 정수 중의 하나인 시, 특히 숲에 관한 시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보기로 하겠다. 독일의 깊고 넓은 숲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과 영원한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작가와 시인들에게 시적영감과 정서와 분위기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지역이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룰 수없는 이 세계를 숲에서 찾았고, 숲과 영적인 대화와 교접을 하면서 인간과 작가의 고독도 이기려고 했다. 낭만주의 이전의 고전주의 작가들, 특히 자연을 중요시한 괴테도 수많은 자연, 산, 숲, 나무, 꽃들을 찬양하는 시들을 많이 창작 했었다. 사회의 정의와 자유와 혁명을 주제로 하는 쉴러의 유명한 희곡 „군도“도 보헤미아 숲을 그 무대로하고 있다. 이들 고전주의 작가들과 동시대 인물인 프리드릭히 휄더린(1770-1843)의 작품에 „참나무들“(Die Eichbäume)이라는 시가 있다.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이 시에서 인간이 사회와 인간들에 대한 의무, 책임,. 순종, 종속과 같은 인간조건들에 얽매여서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부자유스러운 삶을 한탄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늘과 땅과 신과 교유하면서 자유, 건강, 행복을 누리고 사는 숲 속의 나무들을 그의 부러운 동경의 대상으로 묘사 했다. 초기 낭만파 작가 프리드릭히 슐레겔(1772-1829)은 „스페사르트 숲에서“라는 시에서 푸른 숲은 과거의 제후들의 화려한 궁과, 기사들의 성, 주민들의 삶의 안식처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켜주고 있고, 그 숲은 독일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삶의 동력의 상징이며, 자연의 비밀과 신비로움이 간직된 거룩한 성역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독일 낭만작가들 중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고운 시적음색을 지닌 단어들로 독자들의 머리 보다는 가슴을 손쉽게 공명시키는 노래를 불렀던 경건하고 보수적인 작가 요셉 프리드릭히 아익헨도르프 남작(1788-1857)은 독일의 숲을 가장 많이 다루었다. 그는 „숲 속에서“라는 시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아름다운 꿈과 기억들이 고통스러운 현실과 부딪히는 아픔을 그리고 있다. 숲은 그에게는 두렵고  비밀스러우나, 그러나  아늑한 두려움과 동경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이별“이라는 시에서는 도시는 허위와 사기와 불안이 횡행하는 숨 가쁜 곳이지만, 먼 골짜기나 높고 푸르고 아름다운 숲은 그에게 기쁨과 고통을 제공하는 성스러운 안식처요, 그를 보호하고 쉬게하는 푸른 천막 이라 노래한다. 19세기 초 급속히 진행되었던 산업화, 전쟁, 인간사회의 분열과  소외현상들이 인간의 주거지와 고향뿐만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인 인간의 본향마저도 빼았아 갔던 그 당시 독일의 아픈 시대감각과 자신의 쓴 경험을 애절하게 표현한 시다. 이렇게 상실된 인간본향에 대한 망향과 동경이 전형적인 독일의 낭만적, 서정적 시 감각으로 표현된 그의 유명한

시 „달밤(Mondnacht)“을 낳았다:

 

 

하늘이 마치                                           Es war, als hätte der Himmel

땅에 입을 마추었고,                               Die Erde still geküßt,

땅은 희미한 꽃들의 미광 속에서              Daß sie im Blütenschimmer  

꿈 꾸는 듯 하네.                                    Von ihm nun träumen müßt.

                                                               

들판에 미풍이 일자                               Die Luft ging durch die Felder,

이삭들은 가볍게 미동을 하고                 Die Ähren wogten sacht.                                                                                            

숲들은 조용히 미성을 내며,                   Es rauschten leis die Wälder,

밤 하늘엔 별들이 맑게 빛난다.               So sternklar war die Nacht.

 

내 영혼은                                             Und meine Seele spannte                                                                                                           

조용히 날개를 펴고                               Weit ihre Flügel aus

정적의 벌판을 가로질러,                       Flog durch die stillen Lande,

본향으로 날아가려 하네.                       Als flöge sie nach Haus.

(저자의 졸역)                                       (Eichendorf)

 

 

이 시는 역시 낭만주의 작곡가 슈만이 작곡을 해서 독일에서 가장 애호를 받고 있는 노래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에 나오는rauschen이란 단어는 독일의 시나 산문에서 숲이라는 단어와 항상 동반해서 등장하는 동사이다. 숲의 나무나 잎들, 시냇 물, 또는 들의 이삭들이 바람에 불려 서로 조용히 부딪혀서 솨 솨 하며 은은한 소리를 내는 의성어이다. 특히 한 밤중 숲에  바람이 일 때 생기는 이 조용한 소리는 실지로 귀에 들릴 때 뿐만 아니라, 들리지 않을 때에도 시인의 머리 속에서 공명되는 상상적인 의성어로서 낭만주의 시인들이 애호하는 서정적 단어이다. 그들의 영혼이 광활한 정적의 숲과 만나서 서로 교접해서 내는 해방과 사랑과 환희에 찬 침묵의 소리였다.

아익헨도르프는 이 시의 1절에서 자신의 영혼이 꿈 속에서 하늘과 땅이 접문하듯 자연과 합일하려는 동경을 그렸고, 2절에서는 바람아닌 공기(Luft는 공기 내지 미풍의 뜻)에 의해서 조용히 흔들리는 이삭과 숲이 내는 은은한rauschen의 유성음 파도가 소리없는 rauschen을 하며 무성음의 시각적인 파도로 변해서 역시 소리없이 빛나는  별들과 함께 침묵과 죽음의 세계로 서서히 전이되어가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으며, 드디어 3절에는 자신의 영혼이 죽음이 지배하는 정적의 들판을 가로 지르며 날라 간 후 죽음의 세계를 극복하고 피안에 있는 자신의 본향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간절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낭만적인 근대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지은 „흑림“이라는 시에도 이 단어 rauschen이 등장한다. 그가 어린 시절 즐겨히 듣던 흑림의 검은 전나무들이 내었던 이 경건한 소리는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전설을 불러 일으키는 축복과 환희와 풍성의 의미를 담은 아늑한 소리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독일의 숲은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특히 숲 속의 고독(Waldeinsamkeit)이라는 영상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이 단어는 초기 낭만주의 작가 루드빅히 팈(1773-1853)의 창작동화 „금발의 에크버트“(1796)와 그의 시 „숲 속의 고독“ 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숲 속의 고독은 거짓, 증오, 훤소와 허무가 지배하는 현실에 상반되는 신성하고 조용한 목가적인 낙원을 연상시키는 상징어다. 침묵, 정적, 고독으로 싸여있는 숲에서 시인은 숲과 대화를 나누며 잃어버린 자신과 인간들의 낙원을 되 찾고자 했다.

 

유성과 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 rauschen이라는 의성어는 문학의 장르인 시와 산문의 서로 다른 본질까지도 설명할 수가 있는 단어이다. 시나 산문의 언어들 모두가 표현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침묵이 소유한  언어들이 표현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와 비한다면 빙상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 많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산문은 비록 시의 언어 보다는 더 풍부하고 다양한 언어의 세계를 소유하지만, 그 산문의 언어들은, 산문이나 시문들이 추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적 세계와 영혼의 오묘성, 짧고 함축된 언어들의 서정성의 차원에서 시의 언어들과 비교해 볼 때는, 한 낱 수다스럽고 내용없는 겉 껍질같은 지껄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산문보다는 빈약한 양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없는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내용을 상과 그림으로 함축시켜서 암시하는 수많은 은유(Allegorie)와  상징(Symbol)dm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시는, 산문과는 달리, 침묵이 지닌 무한한 비밀을 우리의 심장에 직관적으로 호소하면서 그의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유성음인 rauschen은 비록 한 짧은 시어에 지나지 않지만, 이 시어는 동시에 우리들을 인간의 청각 세계를 넘어서 언어들의 무한한 가능성의 보고인 침묵의 세계로, 그 침묵의 절정인 신비로운 죽음의 세계로, 인간의 잃어버린 기억의 세계로, 그리고 영원한 낙원의 세계로 유혹해서 그 세계를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제시하며 보여 주려고 한다. 이처럼 시는 본질적으로 산문과는 달리 침묵하는 숲과 자연과 일치성을 이루려고 하는 문학의 장르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숲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일치성을 갈망한 것은 장자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나 주객의 일치사상과  어느정도 상통한다 하겠다. 자연의 정복과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서양에서 낭만주의 작가들이 자아와 자연과의 합일성과 동질성을 추구했던 사실은 서양에서는 나름대로 매우 혁신적이고 놀라운 문화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장자가 추수편에서 자신을 물고기와 나비와 일치시킨 비유에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자연과 자신의 극단적이고 과격하며 절대적인 혼연일체 사상에 비한다면 아직도 자아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이다. 독일의 고대나 중세때에 존재했던 질서가 배제된 숲의 카오스 사상 역시 장자의 인간이 배제된 혼돈으로서의 자연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겠지만, 그 카오스는 여전히 제한되고 협소한 인간세계의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질문명과 이기주의가 동양 보다 더 발달한 서양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과의 일치성을 그 나름대로는 애써서 추구 하고자 했었다. 위의 아익헨도르프 시에서 자신과 자연, 자신과 죽음, 그리고 종국에는 그들을 넘어서 자신과 신과의 최종적인 합일성을 모색하고 있다. 괴테도 그가 죽기 3년 전 일메나우 인근의 킥켈한 산위에 있는 산장을 방문하고 30여년 전 벽에 손수 새겨 놓았던 그의 시 „방랑자의 밤 노래“를 다시 한 번 조우하면서 자신과 숲, 자신과 죽음과의 일치성을 찾고있다.   

 

 

방랑자의 밤 노래 (괴테)

 

모든 산 꼭대기 위에는                          Über allen Gipfeln

고요함이 덮혀있고,                               Ist Ruh,                                                                   

모든 나무 끝에는                                  In allen Wipfeln

숨결소리 들리지 않으며,                       Spürst du

숲 속에는 작은 새들 마저                      Kaum einen Hauch;

침묵을 지키고 있네.                             Die Vögelein schweigen  im Walde.

잠시만 기다리면,                                 Warte nur, balde

너 또한 쉬게 되리라                             Ruhest du auch.

(저자의 졸역)                                      (Goethe)

 

 

좀 전에 살펴 보았던 아익헨도르프 의 „달밤“에서 처럼, 괴테 역시 이 시에서 자신의 영혼을 산 봉우리위에서 불던 바람이나, 숲 속의 나무 꼭대기 위에서 들리던 나무들의 숨소리와 같은 rauschen소리, 숲 속의 새소리들이 일제히 그 소리들을 멈춘 정적의 자연, 즉 죽음의 세계와 완전히 일치 시키고 있다. 전자의 시가 우주의 창조자요, 인간의 본향인 하느님에게로 복귀하려는 낭만주의 작가 아익헨도르프의 기독교적 종교관을 표현하고 있다면, 후자의 이 시는 자연속으로  회귀하려는 고전주의 작가 괴테의 범신론적인 종교관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이들 두 시 모두는, 장자의 동물비유에서 처럼 언어 내지 생각과 물체, 인간과 동물, 주체와 객체, 생과 사가 전혀 구별이 없이 동질화가 되어 혼연일체를 이루는 일원론과는 달리, 자신과 신, 또는 자신과 자연과의 합일의 과정에는 생의 대립자요 이질물인 죽음이, 환언하면, 생과 사라는 서양의 이분법이 엄연히 그 중간에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다. 동서양의 사고의 차이이다.

 

독일의 민족 및 군국주의이념과 숲 

 

1815나폴레옹의 독일과 동유럽 확창전쟁이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서 저지되어 프랑스가 자국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독일에서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통일의 열기가 비등하게 되었으나, 빈 회의에서 결정된 메테르닉히의 반동보수주의 체제가 득세해서 1848년 까지 전체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1848/49프랑스에서 민주와 자유를 제창하고 일어난  2월혁명이 독일을 자극하자, 독일에서도 역시 자유, 민주, 그리고 통일을 요구하는 3월혁명이 일어났고, 드디어 1848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주의회가 최초로 형성 되었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프러시아정권은 비스마크재상을 선두로 해서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국력을 신장시킨 후,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드디어 1871년 파리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했다. 유럽과 해외로의 팽창과 보수적인 민족주의를 추구하던 독일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배하자, 1919년 바이마르의 자유민주 공화국이 탄생 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국제와 국내의 정치와 경제의 혼란 등으로 올바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체제가 정착되지 못한 채 나치독재정권(1933-1945)에 강제 영입이 되었다.  2차대전 패망 후에야 비로소 독일은 진정한 민주공화국 체제를 완수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독일의 근대사가 아닌 독일의 숲에 있다.

독일이 지난 100여년 동안 보수왕정체제에서 민주화, 자유화, 그리고 민족단일화 과정동안 독일의 숲은 어떤 문화적인 과정을 거쳐 왔을가?

토이토부르거 숲의 승리는 독일민족의 역사적인 긍지로서 단절되지 않고 항상 전승되어 왔었지만, 특히 1813-1815 프랑스와 프러시아전쟁 때에는 독일 민족의 자유와 해방운동에 하나의 동기부여와 동력의 역활을 했다. „3월혁명 전 시대“(Vormärz. 1815-1848)를 주도하던 자유와 독립을 꿈꾸는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특히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독일제국을 수립해서 독일통일을 이룩한 비스마르크 보수정권은 토이토부르그 숲의 민족신화, 낭만주의 시대의 숲과 독일민족의 일치성, 그리고 독일민족의 강인성과 영웅적인 기백과  충성을 상징하는 참나무 신화등을 그들의 정치이념에 계속 사용했었다. 독일제국시대 때는 군인으로, 1차대전때에는 무공을 세운 장군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시대에는 대통령, 그리고 나치정권 초창기에는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면서 나치정권의 공식적인 등장에 기여했던 불운의 군인이요, 정치가인 파울 힌덴부르크(1847-1934)는 „독일수림협회. 숲 보호와 봉헌연맹“이라는 단체를 창설하고 불멸의 독일민족의식 고양, 조국수호와 애국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 했었다.

19세기 말 부터 독일의 숲은 독일의 사회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숲은 사회의 모든 산업의 개발과 육성정책과 병행해서 국민의 건강, 교육, 교양증진정책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특히 청년들의 육체 단련, 도보여행장려, 독일전설과 신화개발과 보급, 충성심, 동지애, 신의, 협조심, 연대심같은 공동체의 덕목들을 고양 시키는 정책이 숲과 함께 전개되어 나갔다. 독일민족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자연과 문화재보호 정책이 주로 숲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예를 들면 독일의 역사적인 인물이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동상유산정책에 의거해서 니더발트 동상, 헤르만 동상, 키프호이저 동상, 하이델베르크 고성 유적지, 린더호프궁,  노이슈반슈타인성, 함박허 자유축제지등을 전 독일의 숲 속에서 복구내지 새롭게 신축하면서 독일민족의 애국심을 선양 시킨 것이다.

1차대전의 패전과 나치정권집권 사이에서 14년간 존속했었던 바이마르 민주 공화국 시절에도 독일의 숲은 쇄도하는 서구의 정치, 군사와 문명의 침투, 동유럽과 러시아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위협, 즉 유럽 속의 독일이 소유한 지정학적인 운명에 시달리는, 독일을 막고 보호해주는 민족방어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긍정적인 신화로서, 그리고 이성적이고 건전한 민족주의의 상징으로서 존경받아 오던 독일의 숲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등장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완전히 상실당한 채 오로지 나치정권의 광적인 정치이념으로 왜곡되고, 그 시녀로 악용되었다. 나치정권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민족 요소들인 유대민족, 사회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를 도입시켜서 독일 민족뿐만 아니라 그 상징인 숲마저도 부패, 타락, 황폐화 시킨다면서 인종차별과 몰살정책을 전개 시켰다. 유대민족을 황무지나 사막에서 사는 육체와 정신이 병들고 메마른 „사막의 민족“인 열등민족으로 폄하 멸시하는 반면,  독일민족은 그와는 반대로 생명력이 왕성한 참나무나, 가문비나무, 전나무같은 상록수와 그 숲처럼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소유했고, 충성, 신뢰, 복종과 애국심이 강한 우월민족인 „숲의 민족“으로 격상 시켰다. 춤추는 보리수(Tanzlinde. 민속축제 때에 그 아래에서 춤을 추던 보리수), 오월의 나무(Maibaum.오월주. 오월제 때 장식을 한 높은 나무기둥. 오늘 날에도 지켜지는 풍습)같은 민속적이고 낭만주의적이며 평화적인 나무와 숲의 개념들을 그들은 „히틀러 참나무“, 하켄크로이츠 숲“(나치스의 갈코리 휘장처럼 나무를 심어놓은 숲)과 같은 사이비 종교적인 개인숭배나 비평화적인 군국주의 같은 전쟁과 정치이념들로 왜곡시켜서 악용을 했다. 나치정권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지어서 잔인한 전범행위를 하는 그들의 전쟁 하수인인 군인들을 숲 속에 빽빽히 그러나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게 줄 지어 서있는 키 크고 건강하고 위엄있는 나무들과  비교 시키면서 그들의 야만적인 군국주의를 합리화하고 미화 시키려고 했었다.

나치정권이 대두했던 1930년 바로 직전에, 마치 나치에 쫓겼던 철학자요 문학비평가인 발터 벤야민(1872-1940)처럼, 그리고 약 80년 전 역시 경찰국가 프러시아 정부에 쫓겨서 망명지 빠리에서 눈을 감았던 하이네(1797-1856)처럼, 도피했던 망명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진보좌파주의자요, 반나치군국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판적인 언론인인 동시에 유명한 풍자작가였던  쿠르트 툭홀스키(1890-1935)는, 비록 나치정권처럼 숲을 반 이성적으로 변형하거나 신화화 시키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진보주의자들도, 보수주의자들 못지않게, 숲을 참다운 자기조국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건전한 민족주의적인 숲 이론을 표방하기도 했다.

 

이처럼 숲은, 인간들과는 달리, 민족을 적과 아군으로 차별을 두지 않고 민족을 하나로 보며, 그들 모두를 꼭 같이 자신의 품 안에 안아주고 이롭게 해준다. 38선을 중심으로 하고 뻗어있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는 지난 60여년 동안 숲과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서 한반도의 유일한 무공해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미래의 한반도가 지향해야 할 환경정책의 모범이 될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도 아직까지도 서로 적대시 하며 대결하고 있는 두 나라가 앞으로 서로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상생공존 할 수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할 미래정치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한반도 통일의 출발점은 바로 이 숲에서 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망상일가? 실지로 과거에 윤이상씨를 비롯해서 세계의 유명한 지휘자들이 통일 음악회를 이 곳에서 주최하겠다는 발상을 한 적이 있었다. 60년동안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가 해결할 수 없었던 어려운 한반도의 갈등도 같은 핏줄을 타고 난 남북의 단일 민족이 서로가 적대감없이 꼭같이 공감하고 열광할 수있는 음악이나 축구나 금수강산의 자연같은 전혀 다른 미디어가 오히려 기적적으로 해결해 줄 수가 있지는 않을가? 38선 무공해 지역의 울창한 숲에서도 과거 독일의 토이토부르그 숲에서 처럼 외세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자립시킬 수 있는 신화가 왜 일어날 수가 없단 말인가 하고 강한 의문을 품어본다. 비록 그런 신화야 외세배격과 자주독립과 고립주의 정치가 거의 불가능한 오늘의 글로벌 시대에 한 낱 몽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강한 자립정신과 자기주장 때문에 외세들이 한반도를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게 될 새로운 한국의 신화는 가능하지 않을가?

 

독일의 지속성과 숲

 

현대의 독일은 숲을 과거처럼 신화, 전설, 종교, 또는 비이성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각과는 달리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정책으로 다루고 있다.

통독이후 흑림을 비롯해서 바이에른 숲, 스페사르트 숲, 타우누스 숲, 베스터발트 숲, 아이펠 숲, 토이토부르크 숲들을 소유한 서독은 구 동독에 있던 광물들이 많은 튀링겐 숲, 기암절벽이 많은 작센 숲, 광활한 메클렌부르크 포폼메른의 숲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짙 푸른 숲들로 덮혀져 있는 오늘의 독일 땅이 되었다.

독일의 숲은 매우 울창 하지만, 아마존강이나, 시베리아, 카나다, 인도네시아나 콩고분지에 있는 무질서한 자연원시림이 아니고, 실은 고대에 벌써 켈트족과 게르만족들이 숲 속에서 살면서 인위적인 개간을 했고, 16세기 이후 케플러, 뉴톤, 데칼트같은 수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내세운 수학원리와 질서법칙에 의거해서 인위적으로 질서있게 통제되는 조림의 숲이 되었다. 중세 때에 주택건축과 연료의 수요증가와 목장확창때문에 지나친 벌목현상이 있게되자, 벌목지의 나무가 다시 자랄 때 까지 과도한 벌목을 금하는 규정과  제도가 생기게 되었고, 1713년 프러시아 왕정이 비로소 벌목금지와 수목의 재육성 기간을 설정하는 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그 이후 보다 더 낳은 미래를 꿈꾸는 독일의 이상주의사상과 철저성, 완벽성, 근검절약성, 그리고 법의 준수와  권위주의를 존중하는 독일의 민족성들이 접목되어서 독일의 경제, 사회, 문화, 생활 전역을 지배하게 된 생활원칙인 지속성 (Nachhaltigkeit)이라는 개념이 수림영역에도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독일은 지하자원이 부족한 대신 유리한 토지와 기후조건으로 수목은 풍부한 나라이기에 이 중요한 자원과 수입원천에 적용한  지속성정책은 필수불가결한 정책이었다. 과거에는 울창한 수림이 많았지만 벌목을 한 후 독일처럼 다시 나무를 심지 않아서 황무지나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그리스와  이태리나, 혹은 남아있는 숲을 로코코풍이나 영국식 숲같은  인위적인 공원으로 단장을 시킨 프랑스와  영국의 숲들과는 달리, 독일의 숲이나 공원은 철저한 육성과 보호정책으로 마치 사람 손이 가지 않은 야생의 밀림처럼 수림이 빽빽하고 울창하다. 나무와 숲은 끊임없이 자라고, 친환경적이며, 인간에게 다양한 사용처와 이익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숲은 경제문제, 환경문제, 사회문제 사이에서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그 평형과 조화가 잘 유지되고 보호 육성되어야하는 특수한 자연공간이다. 따라서 독일은 300여년 전 부터 숲을 특별히 이성적이고 지속적이며 신중하고 세심한 보호정책으로 시종일관하게 다루었다. 그 결과가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풍성하고 건강한 독일의 수림이 되었고, 그래서 독일은 „숲의 나라“라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중국은 현재 독일의 무진장한 목재들이 생산하는 뗄감과 숯에 많은 관심을 표시하고 수입을 다량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위주의 문명, 비이성적인 과소비주의, 그리고 이기주의는 인간에게  자연과 환경의 대규모적인 파괴를 초래하고 있다. 과도한 에너지와 과소비 정책은 지구의 폐 기능을 하는 아마존, 보르네오의 원시림지역을 무자비하게 벌목하고 대두와 유채화 농사지로 대체화 시키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원시림 소멸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현금에는 대두, 옥수수, 유채, 밀, 사탕무우로 바이오 에너지를 다량생산해서 식품산업과 저개발 지역 주민들의 기아문제에도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시림의 파괴는 지구의 온난화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남북극의 빙하는 시시각각 용해되고 있고, 생태계가 단절내지 멸절 될  위기를 맞고 있다. 1980년대에 독일에서는 산성비에 의해서 독일 숲의 1/3이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숲의 죽음“(Waldsterben) 이라는 단어가 유행해서 전 독일의 언론과 학계에 불안과 공포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자연은 비록 인간에 의해서 파괴는 되지만, 그러나 자체의 자생력에 의해서 스스로 다시 회복도 되기 때문에 그 것은 안전, 안정, 불안, 걱정에 지나치게 예민한 독일인들의 과잉반응이라고 사람들은 해석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긴 했다. 왜냐하면 독일수림은 현재까지 아직은 그렇게 우려하던 병피해의 규모가 심하지는 않아서 그 피혜는 1/3 전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은, 독일의 이성적인 수림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가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엄연한 진실이다. 인간의 기본 행복을 위해서는 자연은 어쩔 수없이 정복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성을 잃은 지나친 자연착취와 파괴, 그리고 지속적인 후속처리가 없는 자연은 다시 회복되지 않고 영원히 멸절된다는 사실도 깊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적응성과  역동성이 강해서 한국이 서양보다는 더 빨리 성장과 복지에 도달한다고 자랑하는 한국인들은 이 자연의 자력재생 능력만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연이 그들의 후세대와 미래에 제공하는 무궁한 혜택보다는 물질이 주는  눈앞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산과 숲에 필수불가결 하지 않는 케블카들을 수 없이 세우고,  4대강을 인위로 직선화 시키고, 제주해안을 파괴해서 기지화 시키는 등, 자연을 너무나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파괴하고 있다. 눈앞의 권력과 재화와 물직적인 복지가 그들을 양심이 둔화된 자연의 파괴범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번 소멸되면 다시 회복되지 않는 원시림, 그 속에서 서생하는 동식물,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 지구의 기온, 다시 청정화되기 어려운 담수와 해수의 수질, 그리고 우리의 지구, 이 모두는 자연과 우주에서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일회성 세계에 속한다. 이러한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오래 전 부터 철저히 관찰하고, 그 파괴를 미리 방지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독일의 녹색당같은 단체처럼 우리도 자연을 좀더 존중하고, 진지하게 다루며, 자연의 정복을 이성적으로 자제할 줄 아는 민족이 왜 될 수가 없는지 심히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숲에 대한 건전한 생각과 이상적인자세를 가졌던 현대 독일의 한 모범적인 예술가를 잠시 살펴보면서 독일의 숲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1921-1986)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행위예술가요, 사회철학가요, 독일 녹색당의 창당멤버이기도 한 정치적 예술가였다. 그는 상실된 자연과 인간의 합일성을 인간의 원형성, 신비성, 마술성, 종교성의 총체적인 인식과 이해, 그리고 참여예술을 통해서 다시 회복 할려고 했다. 그의 예술이론의 한 전형적인 예가 바로 그의 „사회적 조형예술“(Soziale Plastik)라는 이론이다. 물질주의화된 서구문명과 사회를 예술을 통해서 개혁, 변화, 조형하는, 즉 사회의 예술적인 개혁과 조형화라는 참여예술과 종합예술의 미학을 의미한다. 그는 이 추상적인 사회의 조형화를 1982년 카셀의 도큐멘타(카셀에서 5년마다 100일 동안 열리는 현대 전위예술전시회)행사에서 그의 유명한 행위예술작품의 하나로 구체화 시켰다. 즉 그는 도시의 행정화(Verwaltung) 가 아닌,  „도시의 수목화(Verwaldung)“라는 구호아래에서 거리, 공원, 행정구역, 병원, 학교, 공장시설, 핵발전소등 도시의 각 곳에  7,000그루의 참나무심기 운동을 벌린 것이다. 산에 있는 나무와 숲이 인간의 현실생활과 격리되어서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 하거나, 혹은 인간에 의해서 항상 피동적으로만 그 존재확인을 받는 대신, 이제는 오히려 인간 세계로 과감히 들어와서 이상적인 인간사회의 개혁을  인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착상을 구체적으로 상징화 시켜서 표현한 예술행위였다. 그는 동시대의 폽 아트 예술가 앤디 워르홀(Andy Warhol. 1928-1987)에서 처럼 예술이 예술 자신이나  작가 자신, 또는 인간의 소비를 위한 예술이 아니고, 오로지 남과 사회와 인류전체를 위한 행동하고 생산하는  참여예술이 되어야 한다면서 그와는 상반되는 예술관을 명확히 피력 하기도 했다.

 

독일 흑림의 교훈

 

지금까지 우리는 좀 지루하게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독일 숲의 내력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보았다. 이렇게 숲에 대한 넓고 깊은 인식의 눈을 가지고 해 보았던 흑림의 산행길은 나에게 각별한 체험과 의미를 제공해 주었다.

우선 높고 날신하게 자란 늠늠한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흑림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마음 속에서 울어나오기 시작하는 희열감부터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시원한 송풍은 무더위와 땀을 식혀줄 뿐만 아니라, 짙푸른 초록색은 피로한 눈을 진정시켜 주었으며, 맑고 싱그러운 송진냄새는 나의 모든 감각과 뇌를 자극해서 영혼의 즐거움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키가 58미터이고, 몸 둘레는 4.5미터요, 수령 350년이나 된다는 안내판 뒤에 서 있는 큰 나무는 나에게 존경과 외경심을 강요했다. 말을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영혼이 부재한다고 하는 나무가, 내가 떨리는 손으로 나무를 만지자, 자신의 침묵을 깨고 마치 살아있는 영적인 동물인 것처럼 나에게 말을 해 주었다. 독일의 작가들이 숲 속에서 자신을 잃고 숲과 일치감을 느끼고 낭만적인 감정에 취했던, 현대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좀 치기스러운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내가 나무와 일체가 된다는 환상적인 열광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유치스럽기만한 나의 낭만주의적인 피 때문일가, 아니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자연을 접할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외경심, 친근감, 일체감같은 인간들의 타고난 보편적인 감정들과 영적인 느낌 때문일가?  

숲 속을 산행하면서 우리는 넓은 길 혹은 좁은 길, 돌자갈 길 혹은 풀섶 길, 아스팔트 길 혹은 흙 길등 수많은 길들을 만났다. 독일의 산행길은 이처럼 여러 종류이고 다양하며, 산행문화와 벌목과 조림사업을 위한 도로망도 잘 조직되어 있다. 독일산행협회나 수림청의 산행도로정책은 가능한 이기적인 인간의 이해 보다는, 이타적인 자연의 본성과 특수성을 더 중시하는, 자연 그대로의 친자연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인간의 손이 가장 적게 간 도로가 일등도로요, 아스팔트길이 가장 등급이 낮은 도로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의 친환경정책의 한 작은 예이다.

몇 년 전 이 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위해서 복사해갔던 독일의 강들은 이미오래 전 부터 재자연화가 되었다. 그 후 라인강에도 연어가 돌아왔다는 보도를 이미 옛날에 읽은 적이 있다. 독일이 소규모의 홍수가 잦았던 보름스 지역의 라인강을 일직선화 시켰다가 오히려 더 큰 홍수의 재화와 재정손실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 재자연화 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이 명박 정권은 아예 묵살시켜 버린 것 같다. 이 명박정권의 한국형 자연개발 정책이 철저한 검증과 안전을 중요시 하는 과학의 나라요, 지속적인 미래지향주의 나라인 독일보다 더 낫기 때문에 한국의 자연을 그렇게 임의적으로 경솔하고 무자비하게 일사천리로 정복을 해도 된다는 말일가?! 한국의 역동성이 한반도의 무책임한 자연 파괴 범죄에 면죄부라도 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혈세를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어리석게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무의미한 시행착오정책에 더 이상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손이 많이 침범하지 않은 흑림의 „지옥계곡“이나 „부트악흐트“계곡은 맑은 개천물이 흐르고, 양 쪽 옆으로는 오래동안 급한 물살에 깍인 아름다운 바위절벽들이 몇 킬로미터나 우리들을 친절하게 동반해 주어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검은 흑림 속에서 진주 알 처럼 희고 맑게 빛나는 티티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몇 년전 이 곳에서 한 인기있는 인도의 볼리우드 영화를 촬영한 이후로 사리를 입은 인도관광객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인다. 무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지라 그들이 시원하고 깨끗하고 사람 손 안간  흑림을 동경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눈에 띄인다. 즐거운 관광에 희희낙낙하는 그들도 독일 숲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숲, 그리고 지구전체의 숲과 자연이 파멸 직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염두에 두고 숲을 즐긴다면, 지구의 자연파멸 속도는 조금이나마 지연되어질 수가 있지 않을가 하고 상상을 해 보았다.

우리는 깊은 전나무 숲을 산행하다가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맑고 밝은 햋빛을 받으면서 강한 향기를 품은 꽃가루로 온통 덮힌 전나무 꽃 송이를 채집하는 몇 명의 젊은 여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물음에 갖 피어나서 강한 향기를 내 뿜는 꽃을 채집해서 전나무 꿀을 비롯해서 각종의 식품제조에 자연향료로 사용한다고 알려주었다. 인공향료가 넘쳐나는 오늘날 가상 할만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꽃가루를 코에 데어보니 과연 싱그럽고 향기로운 솔향이 코와 뇌와 마음을 사로잡아  희열감을  안겨준다.

지금까지 독일 숲의 신비와  전설, 목가적인 유토피아와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 등등, 형이상학적인 꿈 속에서만 헤매고 다녔던 나는 이제 눈을 드디어 현실세계로 다시 되돌리게 되었다. 숲을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의 도피처로 삼아서 그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치료받고, 영혼도 위로를 받으면서, 낭만적인 꿈 속을 배회 하는 희열의 시간을 가질 때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산과 숲과 강과 지구라는 자연의 세계, 더구나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어 가고 있는 그들의 현실에 관심을 돌려서, 비록 늦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우리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할 때가 되었다. 무공해의 전나무 꿀, 맑은 공기, 맑은 물, 약초, 목재들을 인간에게 제공해주는 이타적인 숲과 자연에게 우선 우리는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다. 동시에 우리들 각자 모두는 가능한 한 에너지를 위시한 모든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과도한 소비성 생활보다는 절약과 생산적인 활동을, 명품과 사치생활 보다는 실용과 검소의 생활을, 재화가 주는 행복보다는 진선미가 약속해주는 행복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는 과감한 삶의 개혁을 해야 할 줄 안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찰라적이고 물질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무리들과 싸우는 투쟁에서 숲과 자연을 우리 후손들의 생존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번영과 행복도 지킬 수 있는 실질적 이면서도 상징적인 마지막 보루로 삼아야 하겠다. 숲과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투쟁은  인류 모두를 위한 현대의 위대한 성전이다. 이 성전에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줄 안다. 나날이 사라져 가는 원시림을 국민전체의 복지대신 자신들의 권력과 자본축적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정치가들, 잔인한 투자자본가 무리들과 이성잃은 이기적인 소비위주자들로 부터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은 우선 우리들 각자 자신이 시작하는 개혁을 위한 작은 환경운동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우리들 각자의 확신은 남을 감동시키고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참여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의식있고 깨어 난 수 많은 시민들이 함께 모여서 환경의 적들을 향해서 부르는 항거의 함성은 원시림의 사멸 속도를 적어도 저지내지 지연 시킬 수가 있는, 소극적이긴 하나 지속적이고 확실한, 강한 무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의 무책임한 정권자와 기득권자들이 4대강 사업, 제주기지 건설등 조국의 자연과 산하를 이성을 잃은 채 성급하고 경솔하게 파괴하고 있는 불의를 우리에게  뼈저리게 환기시켜주고 있고, 자연과  환경보호에 대한 간곡한 교훈을 전해주는 독일의 흑림이 우리에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 한국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슬픔과 분노와 항의의 함성을 자기와 함께 한 번 불러 보자고 제의를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먼 독일에서 이지만  „한국의 자연을 살립시다!“라고 소리높혀 고함을 질렀다. 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하산을 했다.

2012.7.15. 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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