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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체제에서 정상체제로 전환하다

<연재> 정창현의 ‘김정은시대 북한읽기’ (3)

 2013년 5월 20일

정창현 / 통일뉴스

 

 

<연재순서>

3.  비상체제에서 정상체제로 전환하다

2.  김정은시대의 ‘변화’를 준비해 놓은 김정일 위원장

1.  김정은시대는 김정일시대와 다르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 <민족21> 대표>


북한은 2010년 9월 28일 조선노동당 대표자회를 열고 후계자 김정은 대장을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 당 비서국 및 전문부서 책임자, 당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을 새로 임명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당 대표자회는 1958년, 1966년에 이어 3번째였지만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만에 열리는 중앙 차원의 당회의였다. 북한은 3차 당대표자회 개최에 대해 “당을 영원히 김일성동지의 당으로 강화 발전시키고 당의 령도적 권위를 백방으로 높이는데서 중대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당 우위의 국가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인민의 향도력이며 혁명의 참모부”로 규정돼 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이 ‘혁명의 전위’로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듯 노동당 역시 권력의 원천이자 중핵이며, 모든 국가기관과 사회단체를 지도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북한 전체 인구 2400만 명의 10%가 넘는 약 300만 명(추정)이 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한다. 그런데도 북한은 30년 동안이나 당대회를 열지 못했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1993년 이후 개최 사실이 공개되지 않았다.

 

6차 당대회 이후 30년 만에 열린 당대표자회

 

 

  

 

▲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정은 부위원장은 10월 9일 열린 노동당 창건 65돌 경축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했다. [자료사진 - 민족21]

 

 

조선노동당 규약 제3장 21조에 따르면, 당의 최고기관은 ‘당대회’로 규정되어 있으며, 회기는 4년 1회로 당중앙위원회가 대회소집 기일과 의정을 3개월 전에 발표한 후에 소집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61년 4차당대회이후 불규칙적으로 당대회를 개최해 왔으며, 그나마 1980년 6차당대회 이후 당대회를 열지 못했다.

북한은 30년 동안 당대회를 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아무런 공식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언급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6차 당대회를 연지 3년 뒤인 1983년 6월 16~17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7차 전원회의 결론에서 “경공업 발전에 큰 힘을 넣어 주민 소비품 생산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와야 합니다”라며 “그리하여 가까운 몇 해 안에 주민생활을 쑥 높이고 당 제7차대회를 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발언했다.

김일성 주석은 1983년 6월 30일, 7월 1일과 5일 세 차례 가진 ‘페루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대표단’과의 회담에서도 “우리는 1985년까지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10대 전망 목표 가운데 중요한 고지들을 기본적으로 점령하고 1986년에 우리 당 제7차대회를 열려고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1984년 2월 16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협의회에서 한 연설 〈인민생활을 더욱 높일 데 대하여〉에서 “수령님께서는 최근에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비롯한 여러 회의들에서 인민생활을 한 계단 더 높이고 당 제7차회의를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였습니다. 인민생활을 한 계단 더 높이고 당 제7차대회를 하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즉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를 1988년까지 완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985년까지 10대 전망목표 가운데 중요한 부문의 목표를 달성해 제7차 당대회를 1986년에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80년대 중반 제2차 7개년계획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2년간 조정기(1985~1986)를 거쳤고, 특히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은 “우리의 경제는 발전의 속도와 균형을 잃어”, “원래 예견한 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됐다”며 북한 당국이 목표 달성 ‘실패’를 처음으로 시인할 정도로 난관에 봉착했다. 더구나 북한은 3년간 완충기(1994~1996) 기간을 설정했음에도 잇따른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게 되어 ‘고난의 행군’, ‘사회주의 강행군’ 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 대회를 열 경제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던 셈이다.

실제로 북한의 사회주의경제는 1990년대에 소련 및 동구사회주의체제의 붕괴, 1995년의 대홍수 등으로 완전히 붕괴됐고, 1995년부터 5년간 약 60여만 명의 주민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2008년 북한인구센서스 참조). 2006년 12월 7일 김정일 위원장도 당 간부를 질책하며 당시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은 바 있다.

“어디에나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차넘치고 있으며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도.시.군당책임비서를 비롯한 당일꾼들은 거기에 머리도 내밀지 않고 있다.…오늘 식량문제로 무정부상태가 조성되고 있는데는 정무원을 비롯한 행정경제기관 일꾼들에게 책임이 있지만 당일꾼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지금 인민군대에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인민들은 전기사정 때문에 텔레비전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며 석탄사정도 매우 긴장하다.”

 

체제위기와 선군정치

 

 

 

▲ 김정일 위원장이 1998년 9월 국방위원장에 재선출됨으로써 김정일시대가 공식 출범됐으나 북한은 경제난과 안보위기로 비상체제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자료사진 - 민족21]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절 북한은 계획경제이면서도 다음해 재정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1998년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제시했지만 10년이 지난 2007년에 와서야 ‘강성대국의 구체적 목표와 시한’ 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강성대국의 완성이 아니라 2012년까지를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설정했을 뿐이다.

이러한 최악의 경제조건에서 북한은 당대회를 열 수 없었고, 오히려 당.정.군을 비상체제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4년 11월 1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란 논문을 발표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했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 사후 단독으로 행한 최초의 군부대 시찰장소로 만경대에 있는 평양 제214고사포여성중대(다박솔초소)를 방문하고 선군후로(先軍後勞)의 선군정치를 시작했다. 외부의 개혁개방 요구, 북한붕괴론 등을 일축하고 체제위기를 선군정치를 통해 정면돌파하겠다는 의도였다.

1999년 북한은 10여 년 만에 경제가 플러스성장으로 돌아서고, 새로운 경제계획을 제시할 필요가 생기자 당대회 소집을 고려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언제쯤 당대회를 개최할 것이냐”는 질문에 “(2000년) 가을쯤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같은 해 8월 방북한 남측언론인 사장단과의 대화에서는 “준비했던 당 대회가 남북정세가 급히 바뀌어 모든 걸 다시 준비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 발언은 2000년 가을, 조선로동당 창건 55돌에 즈음해 당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남북정상회담과 북미대화의 급진전으로 미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미뤄진 당대회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열리지 못했다. 부시행정부의 등장과 이라크전쟁, 이른바 ‘2차 북핵위기’로 안보문제가 핵심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당 정치국회의, 당 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계속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고, 비서국 운영도 파행적으로 이뤄졌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3년간의 ‘유훈통치’기간을 거친 뒤 김정일 위원장이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되고, 다음해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선출돼 명실상부하게 김정일시대가 개막됐지만 북한은 경제, 안보 등 체제위기에 봉착해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기 위한 비상체제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9년은 새로운 전환의 시발점이었다. 새 후계자의 등장으로 인한 후계체제 구축의 필요성, 2차 핵실험을 통한 안보위기 해소, 중국.러시아와의 협력강화를 통한 경제 안정 전망 등이 주요 변수였다. 특히 북한은 후계체제 구축과 관련해 파행적으로 이뤄지던 당, 정, 군의 운영을 정상화시켜 나갔고, 그것은 김일성시대의 ‘집단주의적 협의구조’를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2009년 2월부터 국방위원회→최고인민회의→내각→노동당 순으로 김정은체제를 예비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운영을 정상화했다. 2009년 2월 북한은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인민무력부장에 임명하고 이영호 평양방어사령관을 총참모장에 기용한 데 이어,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기용했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인원을 대폭 보강해 부위원장을 2명에서 3명으로, 위원을 4명에서 8명으로 각각 늘렸다. 11명의 부위원장과 국방위원에는 군 인사와 군 내 당조직을 관할하는 인사가 두루 망라됐다. 군사.군수.당조직 등 인민군의 주요 부서 책임자가 모두 국방위원회에 배치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명실상부하게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 관리하는’ 국가 기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당.정.군 조직개편

 

국방위원회 개편을 마친 북한은 다음 수순으로 최고인민회의와 내각을 개편했다. 2009년 3월 8일 북한은 6년만에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 687명의 대의원들을 선출했다. 이를 통해 제12기 대의원 중 약 45%가 바뀌는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리고 1년 뒤인 2010년 6월 7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2기 3차 회의를 열어 새 총리에 최영림을 임명하는 등 내각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4월에 최고인민회의가 열린 뒤 2개월 만이었다.

내각 인사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총리 교체와 부총리의 대폭 보강이었다. 내각 인사에서는 최영림.전하철 등 김일성 주석 서기실의 책임서기 출신이 각각 총리와 부총리에 임명된 것, 도당책임비서 출신들이 다수 부총리에 기용된 것이 주목된다. 경제 재건을 책임진 내각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이고, 흐트러진 지방 민심을 제대로 읽고 반영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경험이 많은 원로들을 등용해 후계체제를 보좌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국방위원회와 내각에 대한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한 김정일 위원장은 2010년 9월 28일 전격적으로 제3차 당대표자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김정은 후계자를 공식 석상에 내세웠다. 당 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향후 김정은정권을 이끌 인맥으로 노동당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사실상 김정은정권이 출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0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 후계자를 동행하고 중국을 방문해 북중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1970년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할 때는 당내에서 후계자로 확정된 뒤 3년 동안 당.정.군에 후계체제를 수립하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에야 노동당 6차당대회를 통해 공식석상에 등장했다. 이에 비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08년에 후계자로 내정됐고, 2년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만에 압축적으로 후계체제를 수립한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8년 8월 건강이상 이후 김정은으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란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정.군에 대한 운영을 후계자에게 맡긴 채 지방 현지지도에 몰두했던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다는 의미다. 후계체제를 속전속결로 마무리지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후계자 권력승계를 직접 경험해봤고 스스로 수령제 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본 사람으로서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정치 차원에서 챙겨야 할 차기 권력구조를 사전에 준비해 마련해 놓은 것이다.

 

‘집단적 협의’구조 복원

 

2009년부터 2010년에 걸쳐 이뤄진 당, 정, 군에 대한 조직개편 이후 김정일시대에 들어와 파행적으로 운영되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정치국 회의,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북한은 2009년 당대표자회 직후 당전원회의를 개최했고, 2011년 6월에는 30년 만에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위원회 정위원, 후보위원 등이 모두 참석하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2월에도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린 것이 확인된다. 또한 정치국 회의와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1월에는 6년여 만에 노동당의 최일선 현장조직인 당세포 비서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특히 올해 2월 정치국 확대회의→3월 당전원회의→4월 최고인민회의→내각 확대전원회의 개최를 통해 ‘경제건설과 핵 무력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법제화 및 예산 편성, 실무 대책 등 후속조치를 마련해 가는 의사결정과정은 김정일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김정일시대에 파행적으로 이뤄지던 당의 운영이 정상화되고 집단적 협의구조가 복원된 것이다. 물론 김정일시대에도 국방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결정이나 지시 문건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 기구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운영되고는 있었다.

2010년의 3차 당대표자회, 2012년 4월의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김정은체제의 권력구조는 집단지도체제가 아닌 김정은 제1위원장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귀결됐고,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권력분산을 통해 ‘특정인’을 내세워 섭정을 하거나 후견인으로 부상시키기보다는 ‘집단 협의’를 거쳐 조직적으로 최고지도자를 보좌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북한의 ‘집단주의적 협의’ 전통에 대해 한반도문제 전문가는 알렉산더 보론초프 러시아과학원 교수는 “두 요소의 균형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지도자의 유일적 지위와 최고 수준 정책 결정과정에서의 집단주의가 결합하는 것은 북한의 오랜 전통”이라며 “김일성 주석조차 초기에는 노동당에서나 정부 내에서 유일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고,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 모두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을 때에도 당 중앙위원회나 국방위원회 같은 집단주의적 정책 결정 구조를 없애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브론초프 교수의 전략문화재단(Strategic Culture Foundation) 홈페이지 기고문(2011.12.25). <프레시안> 2011년 12월 30일자 재인용].

북한은 1990년대 들어 경제난과 안보위기 등으로 ‘비상체제’에 돌입했고, 20여 년 만에 새로운 후계자의 등장과 함께 ‘정상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을 당 제1비서로 선출한 2012년 4월의 4차 당대표자회는 북한이 완전히 김일성시대의 당과 국가 운영시스템으로 회귀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당.정.군의 집단협의 구조가 복원돼 당과 국가기구의 운영과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것은 그만큼 김정은시대 북한의 체제안정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한신대, 방송대, 상명대 등에서 강의했다. 1994년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통일문화연구소)에 전문기자로 입사해 10년간 주로 남북 현대사, 남북관계 분야 기획연재를 담당했다.

KBS "현대사 다큐멘터리 극장",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등의 방송프로그램에 자문으로 활동했으며, 통일부.국가기록원 자문위원과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활동하며 『한국현대사』(1~4),『한국역사』,『한국역사입문』등의 집필작업에 참여했다.

저서로 『곁에서 본 김정일』,『인물로 본 북한현대사』,『변화하는 북한 변하지 않는 북한』,『북한사회 깊이 읽기』,『북녁의 사회와 생활』,『CEO of DPRK 김정일』,『KIM JONG IL of NORTH KOREA』,『남북현대사의 쟁점과 시각』 등을 출간했다.

공저로 『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실록 박정희』,『WWW.한국현대사.com』,『남북정상회담600일』,『朝鮮半島のいちばん長い日』, 『박병엽증언록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박병엽증언록2-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등이 있다.

현재 (주)이제이컨설팅 대표, 국민대 교양과정부 겸임교수,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집행위원,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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